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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태풍의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 용유진에게 말했듯이 천마군림보를 사용해서 아직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실패를 기록한 것이다. 결국 숨기고 숨겼던,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쓸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비기를 내놓을 수밖 에 없다는 것이 그를 착잡하게 했다. 이길지 질지는 몰랐다. 솔직히 꼭 이긴다는 자신은 없었다. 전일 북 경성 밖에서 본 용유진의 검법 조예는 그가 상상하지 못하던 정도의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검리(劍理)에 대해서 그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 의 고민을 하고, 그결과 상승의 경지에 올라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신하건데 그는 용유진에게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정확 히 말하면 그가 지거나 이기거나 간에 상대는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아수라파천무, 달리 마검파천황(魔劍破天荒)이라 부르는 이 거 창한 이름의 검법은 전적으로 파괴와 살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골 약장수의 입에서 나온다면 조소를 사기에 족한 이름이지만 마교 교주에게만 전승되어 오던 검기(劍氣)라는 내력을 갖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손에서 발휘된다면 전혀 우스운 것이 아니다. 한 번 시전되 면 반드시 상대를 파괴시키고야 그치는 검법이 이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적어도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를, 그게 누 구든 간에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이다. 그 결과로 설사 그 자신이 죽는 다 해도. 그를 착잡하게 하는 것은, 그래서 검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지 않고 망설이게 하는 것은 질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일생 단 한 번 있을지 도 모를 필살의 결투를 지금, 여기에서,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일개 표사 와 치르게 되었다는 것, 게다가 그 표사가 제법 마음에 드는 놈이었다 는 것이 문제였다. 혹시 강호의 존망을 걸고 소림사 장문인이나 무당파 장문인, 혹은 십대고수의 하나와 겨룰 수는 있다고 남 몰래 상상해 왔었다. 그리하여 검치니 오행마군 따위의 노물들을 지나간 좋은 시절의 전설로 치워버 리고 강호의 새로운 힘과 질서를 만드는 계기가 되는 멋있는 결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고 은근히 기대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눈 내리는 산꼴짜기 에서 표물을(비록 그게 황금 오백 만 냥짜리라도) 털면서 표사와 겨루는 자리가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또한 용유진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미진한, 불안한 감정을 추스르느라고 애써야 했다. '뭔가 찜찜하군.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지 않았던가. 싸움을 시작한 이상 결과를 만들어야 했다. 녹림맹과 그의 체면이 걸린 싸움인 것이다. 그는 손보기를 향해 외쳤다. "내 검을 가져와." 명령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쏟아지는 눈발을 뚫고 다시 소리쳤다. "검을 가져오라니까!" 손보기가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그이 검이 들려 있었다. 비단 보 자기로 싼 그대로 풀지도 않은 채였다. 임태풍이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 는 검을 내놓지 않고 그를 향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 다. 눈송이가 시선을 막아 그 표정을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무언가 마 음에 안 드는 듯한 빛이었다. "뭐야? 할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하라구!"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 손보기가 말했다. 임태풍을, 그의 내력과 실력을, 그리고 드러내지 않은 고민들까지 가장 잘 아는 여자였다. "일개 표사를 상대로." 임태풍은 왠지 솔직해지고 싶은 기분이 되어 대답했다. "안 쓰면 질지도 모르니까." 손보기는 불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용유진을 힐끗 보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검을 내밀었다. 보자기가 풀리며 핏빛 칙칙한 검집과 손잡 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적동색이 고리들과 붉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것 위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검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일검파천황(一劍破天荒) 천추군림행(天秋君臨行) 지금보다도 훨씬 젊었던 시절 마교 교주의 진전을 우연히 얻은 이후 이 두 구절의 대구는 그의 마음에항상 남아 때로 목표가 되고, 때로 부담이 되어 왔었다. 한 번 휘두르면 반드시 파천황의 기세를 보여야 하고, 군림의 길을 가야 할 거라는 부담감이 은연중에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검을 쓰는 것을 무의식중에도 꺼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이 검을 꼭 써야만 할까? 그는 검을 쥐고 용유진을 향해 말했다. "준비됐나?" 용유진이 한숨을 쉬며 손으로 팔목을 더듬는 것이 보였다. 검과 하 얀 팔찌가 이제야 그의 눈에 띄었다. '환검(環劍)인가?' 보기 드문 검을 쓴다 싶어서 자세히 보려는데, 누군가가 그를 방해 했다. 전장에 이장도가 개입한 것이다. 용유진의 동작이 멈추었다. 임태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장도를 노 려보았다. 이장도는 짐짓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본의는 아니지만 비무를 방해하게 되어 죄송하오." "미안한 줄 안다면 그만 비켜주는 것이 어떻소?" 이장도는 얼굴을 슬쩍 붉히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자기 뒤를 가리켰다. "나는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소만 우리 물주께서 한 말씀 하시 겠다고 하셔서 말이오." 커다란 우산이 이장도의 뒤편에서 움직였다. 거령장의 호원무사가 든 우산이었다. 그 아래에서 눈을 피하는 왕소팔이 임태풍의 서선에 들 어왔다. 임태풍은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강호인으로 남의 결투에 끼어든다는 것이 어떤 비난을 받는 일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왕소팔이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왕소팔은 알려진 바대로라면 강호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모르고 그랬소 한 마 디로 비난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임태풍은 이 행위에 어떤 뜻이 있는지, 나아가서 이 행위가 정말 와 소팔의 독단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이장도의 사주에 의한 것인지 곰곰 이 생각하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오?" 우산으로 내리는 눈은 피할 수 있어도 이미 쌓인 눈을 밟지 않을 수 는 없는 법이다. 왕소팔은 값비싼 가죽신발이 망가질까 두려워하는 듯 아래쪽에만 신경을 쓰다가 임태풍의 질문을 받고서야 그를 보았다. 그 리고도 한동안 입 속으로 말을 고르다가 불쑥 말했다. "눈이 오고 있소." 임태풍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이냐. "그래서요?" 왕소팔은 다시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면서 하늘을 가리켰다. "눈이 오고 있다는 거요. 그것도 많이 오고 있소." 임태풍은 기가 막히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크게 한숨을 내쉬고 하늘 을 보다가 다시 왕소팔을 향해 말했다. "그렇구려. 폭설이구려. 아마 내일 아침까진 그치지 않을 거요. 산에 선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래서요?" "아까 총표파자도 말씀하시지 않았소. 산에서 눈을 만나면 유쾌 하진 않을 거라고." "그래서 지금 유쾌하지 않으시겠구려." "나보다도......." 이장도가 그를 핑계로 삼았듯이 그는 자기 뒤를 핑계로 삼았다. "우리 식솔들이 매우 두려워하고 있소." 임태풍은 거령장 식솔들이 탔을 법한 가마들을 힐끗 보고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산에서 도적을 만나면 원래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이오. 여태까진 괜찮았는데 눈을 만나 비로소 두려워한다는 것은 내겐 모욕인 셈이구 려." 왕소팔은 여유있게 웃었다. "난 일개 장사꾼이라 무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몇몇 유 명한 무림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소. 당신 사대철인 임태풍도 그 중 하 나죠." "어떻게 알고 있길래 그렇게 날 무시하시오?" "사람을 노릴 땐 재물을 건드리지 않고, 재물을 노릴 땐 사람을 해 치지 않는 다고 알고 있소. 이번에 재물을 노리는것일 테니 우리 큰마 누라, 작은 마누라, 셋째 마누라에 열셋째 마누라까지 다 안심하고 있어 도 상관없겠지요?" 그는 다시 여유 있게 웃었다. "어떻소, 내가 잘못 본거요?" "아니, 제대로 봤소." 임태풍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왕소팔의 여유 있는 웃음 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이번에 확실히 황금만 노리디. 하지만 당신, 왕 장주께서느 황 금밖에 가진 게 없잖소. 그 황금이 없어지면 그 밖의 모든 것이 왕 장 주를 떠날 거란 생각은 않으시오? 왕 장주에게나 왕 장주의 큰 부인, 작은부인 셋째 부인에 열 셋째 부인에게나 그게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일이 아닐텐데." 모욕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인데도 왕소팔은 여유를 잃지 않았 다. "진짜 내 재산은 저 황금이 아니라 사람이오. 그리고 총표파자께 서 황금만 노린다면 정말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요. 황금을 지키는 건 내 일이 아니라 저기 이장도 대협이 할 일이니 말이오." "그럼 이국주와 내가 당신 황금을 가지고 다투는 걸 구경이나 하시 지 지금 왜 나오셨소?" "싸움은 나중에 해도 되지 않겠소. 지금은 눈이 오고 있으니 싸우기 도 좋지 않고, 자칫 이러다가 황금은 둘째치고 우리 식속들까지 곤란을 겪을 테니 말이오." 임태풍은 잔뜩 인상을 썼다. "그게 비무 중간에 끼여든 이유요? 눈이 오니 싸움을 미루자는 게?" "그렇소." "이 사대철인 임태풍이 고작 눈 때문에 하던 싸움을 멈춰야 한다?" "그래 주셨으면 좋겠소." 임태풍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상대가 워낙 뻔뻔하 게 나오니 혹시 자신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눈이 오면 원래 안 싸우는 건가?' 그때, 채륜이 다가왔다. "잠시 말씀을 좀......" 임태풍은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잠시 생각해 보겠소." 왕소팔이 밉살스럽도록 여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신 대로." 채륜은 임태풍에게 다가가자 낮게 속삭였다. "절대로 동의해 주시면 안됩니다." "왜?" "이대로 가면 우리가 유리한데 왜 여기서 그만두겠습니까?" 임태풍은 조용히, 표정의 변화 없이 화를 냈다. "고작 그 말 하려고 날 부른 거냐? 넌 내가 그 정도로 판단하지 못 한다고 생각한 거냐? 넌 내가 네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제대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저.... 그게 아니라..... 이쯤에서 본격적인 싸움을 하시는 게 어떤가 해서...." "넌 내가 여태 싸운건 싸움이 아니라는 거냐? 보기 답답했다 이거냐?" "아니, 저...., 화만 내지 마시고.... , 일단 제 얘기를...." "말해 봐. 헛소리 했다간 혀를 뽑아버릴 줄 알아라." 채륜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을 했다. "어차피 비무 결과가 어찌 나오건 전면전을 각오해야 합니다.그렇 잖습니까? 저놈들이 비무에서 졌다고 순순히 표물을 내줄 지라 없잖습 니까. 여태까진 탐색전이었다고 치고, 이제라도 와락 달려들어 전부 죽 이고 빼앗아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거면 애초에 그랬지 왜 비무 따위는 했을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채륜은 무심결에 본심을 털어놓고는 제풀에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 다. 그리곤 얼른 때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론 표파자님께는 표파자님만의 방식이 있으시죠. 제가 그걸 부정 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임태풍은 이를 갈아붙이고는 나직하게 말 했다. "나중에 보자." 그는 왕소팔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말씀대로 합시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엔 화로를 끼고 화주나 한잔 마시는 게 제격이긴 하지요. 하지만 기억해 두시오. 다음 번엔 오늘 채 못 끝낸 비무의 결판을 내는 거요." 왕소팔은 빙글빙글 웃으며 이장도와 용유진 쪽을 향새 손을 들어 보 였다. "그렇게 하시오." 표행이 떠나고, 임태풍의 녹림맹마저 자리를 비운 만인평에 사람들 이 나타났다. 간신히 일행을 수습하고 온 장강십팔타와 흑기회의 인물 들이었다. "늦었군." 연운찬은 씹어 뱉는 것처럼 말했다. 안개 때문에 시간을 버린 탓에 원래 계획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원래 계획이라는 것이 녹 림맹과 표행간의 싸움을 지켜본 뒤 상황에 맞게 행동한다는 정도의 보잘것없는 것이긴 했지만. "다, 다행인 건 벼, 별달리 큰 싸움은 없었던 것 같다는 거야. 표, 표행은 아직은 무사한 것 같군." 과천성은 만인평에 남은 자취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연운찬 도 눈썰미가 있었기 때문에 발자국들, 그리고 표행의 수레바퀴 자국과 녹림맹도들의 이동경로가 다른 것을 보고 과천성이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명을 맡겼다면 답답해서 속이 터졌을지도 모르니 다행한 일 이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겠어." "어, 어떻게?" "어부지리라는 건 우리가 그 옆에 있어야 가능한 거라는 걸 오늘 깨 달았어. 만약 녹림맹이 표물을 탈취했고, 우리가 오늘처럼 늦었다면 어 떻게 됐겠나? 그야 말로 지붕 쳐다보는 개꼴이 되는 거지." "그, 그럼 어떻게?" 연운찬은 결연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우리가 먼저 표행을 치는 거다." "노, 녹림맹이 뒤를 치면?" "재빨리 표물을 치고, 바로 빠지는 거지." "가, 가능할까?" "가능한 장소에서 해야지. 우리에겐 저게 있잖나." 연운찬이 가리킨 것은 과천성의 기마대였다. 과천성이 그 뜻을 알아 차리고 웃었다. "펴, 평야에서라면 누구도 우릴 못 따라오지." "그래, 흑기회니까." "하, 하지만 수레는? 수, 수레까지 말처럼 빠르다고 할 순 없을 텐데." "강이 있지. 계획은 이렇게 되는 거야. 재빨리 표물을 털어서 도주한 다. 적들은 기마대를 쫓겠지. 하지만 표물은 따로 준비된 배에 실어보 내는 거야. 기마대는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아. 흑기회니까. 배 또한 누 구에게도 잡히지 않아." 뒷말은 과천성이 이었다. "장강십팔타니까." "바로 그거야." 두 사람은 웃었다. 황금이 이미 그들의 손에 들어온 것처럼 흐뭇하 게. |
첫댓글 잘밨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ㅈㄷㄱ~~~~~```````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