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박지혜]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햇빛부터 시작하는 게 좋
겠다고 했다 질경이가 좋겠다고 했다 투명한 유리병
이 더 낫겠다고 했다 하얀 말을 따라가고 싶다고 했
다 그냥 노래를 부를까 노래를 부르느니 물로 들어
가겠다며 발끝을 바라본다 몽환적이라는 말을 좋
아하느냐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든 말에 속고 있다
고 했다 차라리 일요일의 햇빛을 생각하겠다고 했다
무심한 지렁이를 생각하겠다고 했다 가벼움에 대한
얘기를 다시 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가볍고 빛나게
떨어지고 있는 고독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텅 빈 모
음만을 발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잊히지 않는
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만 사는 섬에서 나오지 않았
다 흐린 눈빛의 그들은 언덕을 그리거나 나무를 심
거나 물고기를 불렀다 물빛을 닮은 눈빛은 항상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곳을 말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을 따라가고 싶기도 하다며 희미하
게 웃었다 더 웃거나 웃지 않는 방법에 대해 생각 중
이라고 했다 너는 담배를 입에 물고 나는 스타킹을
끌어올리며 다리를 뻗었다 쉬지 말고 계속 얘기를
하자고 했다 어제는 모순을 끌고 가는 아름다운 너
를 보았지 오늘은 태양을 한없이 바라볼 거야 무언
가 오래 바라보는 일은 자랑할 일이라고 모든 건 사
랑 때문이라고 설명 없이 우겼다 비밀의 풀을 본 일
이 있니 비밀의 풀이라는 표현이 싫다고 했다 소용
돌이치는 물로 들어가는 여자를 따라간 일이 있니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불안해
도 괜찮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북극에 가는
건 어떻겠느냐고 들뜬 아이처럼 말했다 털이 많은
동물을 상상하자고 했다 북극의 하지의 환한 밤을
상상하자고 했다 그런 건 혼자 하라며 문을 열었다
그럼 해 넘어가는 하늘은 어떨까 물었다 서로가 닮
아 있었다 드디어 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이
제부터 입을 열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 햇빛, 문학과지성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