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은 보스턴 레드삭스에 돌아갔다. 류현진 선수가 뛰는 LA 다저스를 4승1패로 제압했다. 그 과정에서 변곡점이 됐던 4차전. 다저스는 7회까지 4대0으로 앞서고 있었다. 1승2패로 뒤지던 다저스는 이 경기를 이기면 레드삭스와 동률을 이루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저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7회초 무사 1루에서 그때까지 1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던 선발 투수를 내리고 구원 투수를 올렸다. 그런데 구원 투수들이 연달아 난타당하면서 다저스는 4차전을 역전패했고, 곧바로 다음날 5차전까지 내주면서 무릎을 꿇었다. 다저스 팬은 물론, LA 언론, 트럼프 미 대통령마저 로버츠 감독의 경기 운영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다저스가 자충수를 둔 덕에 레드삭스가 우승한 걸까. USA투데이가 요약한 레드삭스에 대한 '팩트 체크' 내용은 이렇다.
① 메이저리그 최다승(108승)팀.
② 포스트시즌 1라운드(디비전 시리즈)와 2라운드(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리그 전체 승률 2·3위팀 격파.
③ 리그 전체 30개팀 중 최다 득점 팀.
④ 다저스는 92승 팀.
결론은 레드삭스 우승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얘기다. 더구나 레드삭스는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선수들에게 준 연봉이 가장 많은 팀이다. 비싸고 좋은 선수를 많이 확보했다는 뜻. 선수들 연봉 총합이 2억2700만달러에 달한다. 1인당 평균 700만달러가 넘는다. 막대한 투자까지 뒤따랐으니 우승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지만 높은 확률 조건을 지녔다고 반드시 우승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레드삭스 우승은 분석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 원동력을 3가지로 요약해봤다.
1. 구단은 적기(適期)에 과감하게 투자
레드삭스는 원래 부유한 구단이다. 그동안도 선수 연봉 총액은 항상 상위권이었다. 2012~2015년 사이 4년간 레드삭스는 3차례 지구(地區·division) 최하위라는 수모를 겪었는데 연봉만큼은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평균 4위 규모였다. 2016~2017년엔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포스트 시즌에 올랐으나 계속 1라운드에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절치부심, 올해는 반드시 우승하자는 단호한 목표를 세우고 첫 번째 결단을 내렸다. 단순했다. '돈을 더 많이 쓴다'였다. 사실 레드삭스 연봉 총액은 2011년 이후 5년간 거의 제자리걸음이었다. 본격적으로 지갑을 열었던 건 2016년부터다. 2군에서 길러낸 젊은 저연봉 선수들 기량이 올라오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돈을 쓸 줄 아는' CEO를 영입했다. 2016년 구단 사장으로 임명된 데이브 돔브로스키는 1997년 플로리다 말린스를 월드시리즈 첫 우승으로 이끈 인물. 그는 레드삭스 사장에 오르자마자 선발 투수 데이빗 프라이스(연봉 3000만달러), 마무리 투수 크레이그 킴브럴(1300만달러)을 거액에 영입했다. 지난해에는 특급 선발 투수 크리스 세일(1250만달러)과 대형 타자 JD 마르티네스(2375만달러)까지 데려오면서 팀 전력을 극대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지갑을 화끈하게 열어 레드삭스는 지난 20년 사이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연봉 총액 1위 구단 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그 과감한 투자는 우승이란 결실로 돌아왔다.
2. 감독은 투쟁심과 동료 존중 강조
레드삭스 우승 과정에서 또 돋보였던 인물은 알렉스 코라 감독이다. 스포츠에서 팀 선수와 감독, 구단 간부 사이 불화 때문에 전력에 금이 가 실력 발휘도 못 하고 주저앉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코라 감독은 선수들에게 목표 의식과 투쟁심, 팀에 대한 헌신성을 불어넣은 리더였다. 보스턴글로브는 "올해 레드삭스에서 가장 달라진 건 자세"라고 지적했다. 코라 감독은 연습경기에서조차 승리를 향한 정신 무장을 강조했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집념을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배려와 존중을 잊지 않았다. 월드시리즈 3차전을 앞두고 기자회견장에서 그는 취재진에게 지역 라디오 리포터 자니 밀러 안부를 먼저 물었다. 밀러는 40년 넘게 레드삭스를 담당한 기자. 전날 심장 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후송된 처지라 걱정됐던 것이다. 코라가 작년 감독에 취임하면서 계약 조건으로 태풍 피해를 심하게 입은 고향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을 위해 구호품을 수송해달라고 구단에 요구한 일화는 유명하다. 야구계에선 '사람 좋으면 꼴찌(Nice Guys Finish Last)'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코라는 언론으로부터 "때론 좋은 사람이 1등을 하기도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존중을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고 믿는 지도자다.
3. 코치는 '빅데이터 혁신' 소통 창구
코라 감독을 보필한 참모 중 라몬 바스케스 코치의 공(功)도 빼놓을 수 없다. 코라가 취임 후 첫 번째로 한 인사가 바스케스 코치 임명이었다. 바스케스 역할은 일종의 '통역사'. 구단 전력 분석팀에서 생산한 방대한 분석 자료를 선수들에게 의미 있는 정보로 변환시키는 임무다.
'빅 데이터' 시대는 야구단 운영도 뒤흔들고 있다. 많은 구단은 데이터 분석가들을 고용, 엄청난 정보를 쏟아내면서 경기에 개입한다. 이른바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로 부르는 이 기법은 이제 야구기록지 숫자를 분석하는 차원을 넘어 레이더와 카메라로 투구와 타구의 물리적인 특성을 계량화, 투수는 자기에게 맞는 구종과 구질을 터득하고 타자는 더 빠르고 강한 타구를 날릴 수 있는 스윙법을 연마하도록 한다.
레드삭스는 2003년 '세이버메트릭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마추어 야구 애호가 빌 제임스를 구단 고문으로 전격 영입, 이 분야 혁신을 주도해오고 있다. 레드삭스가 코라를 감독으로 고른 이유 중 하나도 데이터 분석에 대한 높은 이해도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혁신은 소통을 통해 뿌리 내려야 의미가 있다. 혁신이 조직 위계상 아래에 있는 전문 분야로 내려올수록 더 그렇다.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는 나름 자기 분야 전문가다. 숫자를 들먹이며 '전문가'를 가르치려할 때 이들은 종종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수년 전 한국 프로야구 한 구단 전력분석팀은 천적으로 군림하던 타 구단 외국인 투수 직구 구위를 분석했다. 직구 움직임이 시간이 갈수록 우하향 곡선을 그리면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그들은 '이 그래프를 어떻게 설명하나…' 고민 끝에 "A투수 직구가 B투수 직구가 됐다"고 설명했다. B투수 직구는 빠르지만 움직임이 밋밋했다. 그 결과 타자들은 자신감을 갖고 이 외국인 투수를 신나게 두들겼다.
레드삭스에서 바스케스는 바로 이런 '통역사 겸 중개인'이었다. 선수들은 통상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는 분석가보다는 같은 유니폼을 입은 업계 선배 말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2년 연속 포스트시즌 1라운드에서 탈락한 레드삭스 선수들은 올해는 바스케스 말을 귀담아들으면서 투수는 구종 배합을 바꾸고 타자는 타석에서 좀 더 오래 끈질기게 승부하는 습성을 몸에 새겼다. 분석팀이 전해준 혁신적 데이터가 소통을 통해 비로소 팀 전체에 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