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김하늘]
맑은 것들만 사랑할 때가 내게도 있었어
빛나는 알전구나
부드러운 새끼 고양이의 털
너의 봉긋한 가슴 같은
희망이라고 부를 만한 걸
세상이 예뻤고, 내가 예뻤어
뭔가를 사랑하는 일이 제일 쉬웠었지
너의 생각에 감탄하는 것도
너의 기억에 작은 뿌리를 내린 내가 기특했어
너의 심장박동 수를 세는 일이나
허공에 질주하는 마음까지도 근사해 보였으니까
긴 장마가 시작되던 해에
빵을 조금씩 뜯어먹으며 널 기다렸어
손톱을 깎고, 눈 화장을 하고, 높은 구두도 샀지
네가 사라질 거라고, 한 점 의심도 못 하고
떠돌이 개처럼 너를 기다렸어
나는 더 이상 미소할 수 없고
스스로를 곰팡이로 여기며
민감한 살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어
나를 놓지 않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나
희미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도,
점점 휘발되어 가는 내 영혼을 바라보면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원 같은 게 돼
오늘은 또 내 어디가 사라졌을까
이렇게 갉아먹듯 사라지는 동안
이 비도 멈추고, 너도 돌아오겠지
아마
- 샴 토마토, 파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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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김하늘]
joo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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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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