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45호
어떤 당부
권혁소
저녁 약속 있어,
과음하지 말고
운동하고 올 거야,
과음하지 말고
저녁에 회의 있어,
과음하지 말고
출장이야 오늘,
과음하지 말고
친구가 온대,
과음하지 말고
문상問喪 갔다 올게,
과음하지 말고
집회 다녀올게,
과음하지 말고
현관문에 매달려 있는
요지부동의 어떤 당부들
- 『거기 두고 온 말들』(달아실, 2024)
***
권혁소 시인의 신작 시집 『거기 두고 온 말들』에서 한 편 띄웁니다.
- 어떤 당부
당신이 만약 아직 연애 중이거나 아직 신혼이거나 혹은 이제 결혼 10년차쯤 되었다면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결혼 30년차를 넘겼다면 '그래 맞아'할 테지요.
시의 화자와 그 아내도
모르긴 몰라도 부부로 함께 산 지 최소 30년은 더 되었을 겁니다.
시 속에서
화자의 아내는 남편이 어떤 핑계를 대든
"과음하지 말고"라는 당부만 할 뿐입니다.
아내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하는 모든 일이란 게 마침내는 과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을요.
과음하지 말라는 아내의 당부를 저 또한 피해갈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니 명심하세요.
어느 날부터 술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릴 때,
그때부터 술이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당부 드립니다.
아직 늦지 않았을 때, "과음하지 마세요."
어떤 당부가 끝끝내 당신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때
세상의 아내들은 비로소 세상의 남편들을 기꺼이 떠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길요!!
사족 하나. 오늘은 초복이지요. 복달임하겠다 모여서는, 복달임을 핑계로 "과음하지 말"기를요!!
사족 둘. 우리 집 부부의 출근길 당부는 "아프지 말고"입니다.
2024. 7. 15.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