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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비잔틴의 갑옷과 무기. A~D: 4~5세기의 투구들이다.
(A)세르비아의 베르카소보에서 발굴.
(B)독일의 보름스에서 발굴. (C)헝가리의 두나펜텔에서 발굴.
(D) 슈베린성의 무기 콜렉션 3번. 빈에서 발굴.
(E)5세기 초의 투구. 루마니아의 콘세스티에서 발굴. (F)3~5세기의 투구. 이집트의 파이윰에서 발굴.
(G)8세기의 비잔티움의 최후의 투르크형 투구. 러시아의 쿠반 강 유역의 겐디크에서 발굴.
(H)9세기 중후반의 투르크형 비잔티움 투구. 쿠반 강 유역의 노보로시스크에서 발굴.
(I) 비잔티움의 대황궁에서 발굴한 철 바이저.
(J)8세기 투르크형 비잔티움 철 정강이받이
(K)10세기의 금박처리된 청동 방패. 시리아의 아인 다라에서 출토.
(L)이탈리아의 노케라 움브라에서 발굴된 6~7세기의 방패 일부 (M)4세기 쇠뇌 탄환의 촉. 화살대 부분은 점선으로 표시했다. 스위스의 할테름에서 출토.
(N)쾰른에서 발굴한 4세기의 검
(O) 6~7세기 초반의 검. 아프로디시아스에서 발굴했으며 아마 사산조의 것이었을 것이다. 길이는 1.8m
(P)이스탄불에서 발굴된 4세기의 도끼
(Q) 북알바니아 지역의 아나말리에서 발굴된 6~8세기의 도끼
(R) 나중에 장식에 쓰였을, 유스티니아누스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의식용 창촉 (S)6세기 투르크형 비잔티움 창촉. 코린트에서 발굴.
유스티니아누스의 후임자들의 아래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새로운 군사 조직은 아마도, 마우리키우스(582~602)의 재위기에 나타난 옵티마테스일 것이다.
그들은 아마 4세기 말에 서부 아나톨리아에 정착했던 고트족 포로들을 선조로 둔, 고소그라이키(그리스의 고트족들이란 뜻)의 후손일 것이다. 당시 포이데라티는, 오늘날의 불가리아인 트라키아에 본부를 두는 코메스 포이데라툼 아래에 배치되었다.
많은 부켈라리와 다른 준사병 군조직들은 정규군에 편입되었으며, 다른 연대들로는 본디는 정예 황실 근위대였으나 당시에는 장식적인 황궁 부대로 전락한 스콜라이, 한때 하얀 제복을 입은 보다 엄선된 황실 경호대였던 칸디다티 그리고 도메스티키가 있었다.
서방의 도메스티키는 테오도리쿠스가 493년에 이탈리아를 정복한 후 연금을 줘서 퇴직시켰지만, 반세기 후 마침내 해체되기 전까진 여하튼 유스티니아누스를 위해 여전히 존속했다.
동방의 도메스티키도 현찰로 그 소속을 사는 특권이 있는 부대로 살아남았으며, 레오(457~474)가 비능률화된 스콜라이를 대체하려고 창설한 300명 규모의 작은 근위 보병대인 엑스쿠비토레스는, 철퇴로 무장했으며 두 세기 넘게 진정한 군인들로 남았지만 7세기 초반 즈음에는 퍼레이드용 부대로 전락해 있었다.
변화는 변경 지대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시리아의 스텝 지대는 동맹 아랍 부족들(아래 참조)에게 내맡겨져 있었고, 시리아의 변경 리미타네이는 농경 지대의 변두리들을 따라 여전히 존속했지만 전투력이 크게 떨어졌다.
사실 비잔티움령 시리아는 겨우 몇 개에 불과한 주둔지들과 주요 도시들의 몇몇 야전 부대들만 가지고, 매우 나눠 배치된-very localized way-방식으로 지켜졌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발칸 지역에는 트라키아의 기병들과 함께 사기가 저하된 몇몇 주둔지들이 있었으며, 아마 총합하여 15,000명이었던 것 같다-가장 뛰어난 자들은 동부 변경 지대로 보내지고 있었다.
슬라브족 약탈자들이 6세기 후반 즈음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닿았고, 황제의 근위병들이 그들을 직접 쫓아내야만 했다. 이집트는 사산조의 이란인들에 의한 7세기의 재앙적인 점유 전까진 이 소란스러운 침공들에 거의 손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으며, 그곳 지역 부대들은 군대가 아니라 경찰에 가까웠다.
키프로스도 사산조 페르시아가 지중해로 뛰쳐나오기 전까진, 황제가 전략적 요충지들을 지키기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식민을 시행한 578년도의 이른 때에도 비슷하게 평화의 안식처였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의 중요성은, 한 세기 후 키프로스가 비잔티움과 신흥 세력 이슬람에 의해 공유된 때에 증가했을 것이다.
6세기 비잔티움 군대의 조직은 몇 가지 면에선 눈에 띄게 현대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대들은 부사관층이 이끄는 소규모 전술 단위인 데카키아로 나뉘어졌다.
옛 켄투리오는 당시, 오히려 후기 로마의 비카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군대의 코메스 바로 밑인 2인자가 되어 있었다. 일라코스는 부사관들과 하급 장교들을 감독했고 연대가 전술적으로 분할되면 그 절반도 지휘했다.
하급 장교로는 로카고스 혹은 데카코스 그리고 펜타코스와 테트라코스가 있었으며, 모두 용기와 지력으로 선발되었다.
기본 군복은 백색이었고 오직 근위대 군인들만이 스타일리시한 색상의 군복을 입었지만, 프로텍토레스, 도메스티키, 스콜라이 그리고 칸디다티티는 여전히 하얀 외투를 입었다.
이란인들에게 기원을 두는 새로운 형태의 케이프인 마니아키온이 5~6세기에 황제의 대관식에서 데아데마(왕관)를 대체했고, 단추 셋이 있는 판의 마니아키온은 칸디다티의 일부 근위병들도 착용했다.
역시 이란인들에게서 기원한 긴 가짜 소매의 코트는 7세기에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에서 보이며, 아마도 둑스의 지위를 표시했을지 모른다. 러시아 귀족들과 오스만인들은 이것들을 비잔티움에서 곧 받아들였고, 결국은 그들의 독특한 복장이 되었다.
6세기 후반부터 펜던트 끈들이 달린 투르크인들에게 기원을 두는 허리띠는, 군인의 표식으로 착용되었고 ‘불가르인들의 허리띠’라 불렸다. 단, 그것들은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물론 비잔티움인들은 군인적 화려함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황제는 즉위할 때 충성스런 가신들에게 캄피독토레스라 불리는 무거운 황금 목걸이 장식-Tortue-를 하사했다.
비잔티움의 군사 엘리트들도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면서 로마적 전통을 거슬렀다. 단, 수염은 고위급 장교들의 몫으로 남긴 했지만.
첫댓글 로마군인들이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엇나요??
"비잔티움의 군사 엘리트들도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면서 로마적 전통을 <<거슬렀다.>>"
마법의활//아하 제가순간이해를 잘못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