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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제26강 무단무멸분/설우스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27분이죠? 무단무멸이다. 끊어짐도 없고 멸함도 없다. 아주 허무적멸의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먼저 본문을 한 번 읽고 강의를 하도록 하입시다. 『수보리야. 내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여래는 구족한 32상을 쓰지 않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여래는 구족한 상을 쓰지 않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라.』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 다음장은 조금 있다 강의를 하고. 먼저 26분에 보시면은 법신비상분이었죠? 법신은 상이 아니다. 상으로서는 법신을 볼래야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소제목이 되어 있었고. 저번시간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이렇게 물었죠? 26분에서. 그러니까 수보리가 처음에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했거든?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러면 32상으로, 형상으로, 그 여래의 진법신을 볼 수 있다고 할 진데는 그러면은 저 전륜성왕도 그러면 여래의 진 법신을 갖춘 그런 법신이겠느냐? 이렇게 묻는거요.
전륜성왕은 인도에서 하나의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왕인데. 온 세계를 한 사람도 생명을 죽이지 아니하고. 온 세계국토를 통일시키는 그런 복과 덕을 갖춘 임금을 전륜성왕이라 하는데. 그 전륜성왕도 사실은 복과 덕을 많이 갖추어서 상으로서는 32상 80종호를 갖추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그러면은 전륜성왕도 여래의 진법신이 있느냐? 이렇게 되 물은 거죠. 그러니까 수보리가 생각하니까 부처님이 되 물으신 의도가 그건 아닌 거 같거든.
그러니까 말을 바꾸어서 아닙니다. 32상으로는 여래의 진법신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전륜성왕은 복을 많이 지어서 상호는 원만했지만 부처님과 같이 그 공덕장을 열어서, 그 지혜의 작용이 일체중생을 성불시킬 수 있는 그런 지혜의 공덕성은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여래의 진법신은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죠. 그래서 부처님이하신 말씀이 그래 소리로나, 색으로나, 음성으로 어떤 형상으로서 나를 보고자 할진데는 결코 나를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저번 26분에서 말씀 하셨거든? 그 이야기 생각이 나죠? 그래서 그렇게 말씀을 하고 나니까. 또 중생들이 생각을 할 때 이거는 수보리에게 부처님이 말씀을 하시는 거지만은 사실 수보리가 이걸 모르는 게 아니거든요. 이 말씀은 중생을 위해서 수보리가 묻고 하기 때문에 중생들이 생각할 때 여래가 구족한 상을 쓰지 않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구나 하는 집착의 상을 일으킨다 이 말이야. 아~ 그렇다 보면은 우리가 32상 80종호라는 것이 참 의미가 없는 것이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32상 80종호를 거기에 갖추려고 애쓸 것도 없고. 그거를 완전히 중생들이 필요 없이 생각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또 필요 없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상호에 너무 중생들이 상호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당견에 빠졌단 말이오. 그거를 또 살려 내느라고 부처님이 말씀을 하신 거에요. 그래서 32상 80종호라는 것은 사실은 부처님이 과거생에 많은 보살의 인행을 거쳐서 원만한 상호가 이루어진 것이거든요.
그래서 과거의 500생 인욕보살행을 인해서 그런 상호를 갖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상호도 무시 못한다 이 말이야. 쉽게 말해서. 그 상호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은 이런 거에요. 이게 전부 다 연기적으로 서로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부처님이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 그러면은 예를 들자면 제가 하나 물어 볼게요. 한 여름에 매미가 그렇게 울잖아요.
그 아름다운 매미 울음소리를 여러분이 들으면은 그 매미가 한 여름에 평지 돌출해서 갑자기 날개 달린 매미가 나온 건 아니거든. 그 매미가 사실은 알에서 또 그 애벌레로. 애벌레를 굼벵이라 그러지. 굼벵이. 굼벵이로 7년 내지 8년간 땅속에서 살은 거에요. 살고서는 그 애벌레가 땅 위로 나와서 매미가 되어서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이 말이야.
그러면은 알에서 있었던 그 기간과 또 애벌레로 7년 내지 8년 있었던 것들이 그게 다 매미하고 상관이 없는 것이냐?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해? 그게 상관이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사실은 굼벵이가 땅속에서는 그것도 굼벵이가 매미는 매미지만 아름다운 음악소리는 못 내죠. 아름다운 소리는 굼벵이가 낼 수가 없죠. 그러나 굼벵이가 매미라고는 할 수 없지만은 또 매미가 굼벵이를 떠나서는 존재 할 수가 없는 거잖아. 그게 연기성이라는거요. 다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은 32상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전륜성왕은 그 굼벵이와 같이 그런 상호를 굼벵이가 매미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못 내듯이. 그 아름다운 소리를 부처님의 아주 공덕장에서 나오는 지혜, 광명, 또는 지혜의 중생을 위한 작용. 이런 것들로 봐야 되겠죠. 비유를 하자면은. 그래서 부처님이 과거 세에 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100천생을 지옥에 따라가고, 찾아가고, 중생교화를 위해서 원을 세우고, 그러셨거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32상 80종호, 또 부처님의 법신공덕을 갖추는 그런 다 결정적인 관계성이 있다는 것이죠. 부처님도 과거 비구시절에 성불을 하기 위해서 수행할 적에 큰 선지식을 찾아 법을 배우러 가는데. 사막의 길을 가다 보니까. 비가 너무 안 오니까. 두 비구가 도반을 지어 가다가 목이 말라서 죽게 되었어요. 그런데 죽을 직전에 이렇게 보니까 사막에 물이 조금 고여있는데. 거기 물을 먹으면은 살 수 있을 만큼 양은 고인 거야.
그런데 보니까 거기에 고기들이 그 물 때문에 잔뜩 들어 앉아 있더라는 것이지. 그래서 한 도반은 우리가 저 물을 먹고라도 부처님을 뵈오러 가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부처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묻는 거죠. 결국 부처라는 것은 중생으로 인해서 부처가 있는 것이지. 모든 중생을 다 부처로서 길을 인도해주고 부처로서 삶을 살 수 있게끔 마음을 안락하고 편안하게 해 주고. 지혜의 공덕을 갖추어 주기 위해서 부처가 존재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부처가 되기 위해서 이 중생 생명들을 다 죽여가면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부처님의 큰 자비사상에 맞지 않지 않느냐? 둘이 생각이 엇갈리는 거요. 그렇지만 한 사람은 그래도 이거를 물을 마시고 우리가 성불해서 우리가 많은 중생들을 구제해야지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부처님은 비구시절에 나는 여기서 죽었으면 죽었지 이 생명들을 죽여가면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생각의 의미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부처님은 그 비구시절에 그 물을 먹지 않고 거기서 사막에서 죽었어요. 한 스님은 그 물을 먹고 부처님을 뵈오러 갔던 거에요. 갔더니만 부처님을 뵈오러 가니까. 부처님 옆자리에 사막에서 죽은 그 비구가 먼저 와서 어서 오너라 이렇게 반기더라는 거요. 이거 재미있는 하나의 상징적인 이야기인데. 우리가 부처님이 그러한 32상 80종호를 갖추기 위해서 많은 생을 그렇게 보살의 그 인행을 했다는 것이죠.
그 보살의 인행을 함으로써 이루어진 게 32상 80종호인데. 그것을 아주 끊게 만들지 말아라. 그거를 끊어지게 이야기를 하지 말아라. 무단이다. 끊어진 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요. 그래서 저번시간에 32상이나 80종호가 그것으로서는 부처, 여래, 법신을 볼 수 없으니까 부처님이 그거를 무시하고 이야기를 그 32상의 의미와 가치를 가볍게 이야기를 하니까. 또 중생들이 그러면 32상80종호 그렇게 좋은 호상이 다 수행하고 상관이 없는 것이구나. 보살인행하고.
이렇게 또 생각을 아주 단적으로 가질까 봐. 생각을 끊는 생각을 가질까 봐. 부처님이 또 이장에 와서는 다시 그것을 살려놓는 거에요. 32상 80종호도 부처님의 보살인행으로 생긴 것이니까 그렇게 항상 단견으로 생각지 말아라. 항상 이것이면 이것이다.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항상 양변에서 있다 없다 그 쪽으로 생각을 집착하지 말아라. 우리 중생들은 사물을 보면은 항상 있다 없다 이렇게 딱 당견으로 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진리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거요.
그래서 그 어려운 것을 여러분들에게 이해시키고자 저번시간에는 제가 연기 중도를 이해를 시켜야 되거든. 연기중도를 잘 모르면은 우리가 부처님의 이 대승경전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연기중도 이해시키는 방법이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저는 저번시간에 천태지지선사의 일심상간이라는 중도 법문을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시키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여러분들이 얼마나 이해를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 일심상관이라는 중도연기법이 굉장히 중요한 법문이고, 굉장히 중요한 중도연기법인 데.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못하셨으면은 시간이 되면 오늘도 잠깐 그거를 한 번 더 정리를 해 드리는 걸로 하고.
그리고는 그 다음 밑에 문장이 뭐라 고 나오냐 하면은 『수보리야. 내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했다고 말 하는가.』 아까는 당견으로 가서 생각을 이것이다 저것이다 서로 연관시키지 아니하고 끊게 만들지 말라 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또 법을 단멸법으로 보지 말라는 뜻이죠. 그래서 모든 법이 단멸 했다고 말 하는가? 이런 생각도 하지 말지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법에 있어서 단멸상을 말하지 않느니라.
이런 말들이 대승경전에서 특히나 이 반야부 경전에서 굉장히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입니다. 이거를 읽어도 지금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이런 말들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시켜야 되는데. 반야경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런 말들입니다.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인데,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이렇게 논법으로 들어가니까.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데. 첫째 여러분들이 금강경을 배우면서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많이 주목 했을 거에요. 어떤 부분이었냐 하면은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할 때는 부처와 중생은 정 반대되는 개념이죠. 그렇죠? 부처와 중생은 정 반대되는 개념이고. 번뇌와 보리도 정 반대되는 개념이죠.
그리고 또 나고 죽는 생사와 열반이라는 것도 반대되는 개념이에요. 그럼 우리 일반 상식으로서는 극과 극을 이야기 하는 거요. 그러니까 스님은 경전에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양극단의 극적인 판단을 가지는 것을 가지지 말라는 거요. 그렇게 하면은 부처님의 불법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거든.
그러면 지금 중생이나 부처나 또는 보리나 번뇌나 생사나 열반. 이런 건 양극단을 이야기 하는 것들이죠. 극과 극을 이야기 하잖아요. 중생과 부처도 극과 극이죠. 이런 극과 극이 어느 날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은 중생즉 부처다 이렇게 나오잖아. 기억하시죠? 기억 안 난단 소리는 못 할거요. 중생즉 부처다 그랬고, 또 번뇌적 보리라 그랬고, 생사적 열반이다. 이렇게 이야기 했잖아.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극과 극이 같다는 이야기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금강경에서는 극과 극이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요. 어느 날 갑자기 부처님이 중생이 부처다. 번뇌가 보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요. 이렇게 할 때 원문에는 보면은 한문으로는 (곧 卽즉) 들어가 있거든. (곧 卽즉) 같다는 의미를 이야기 할 때 (곧 卽즉) 들어가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즉이 들어간다 하면 같은 동일 진성이기 때문에 같다는 의미인데. 이 말이 금강경에서는 왜 통하느냐? 중생세계에서는 절대 통할 수가 없죠. 악한 극중에 악인하고 지극한 천사하고 같다 하면 그게 말이 되겠어요? 우리 일반 상식으로는 말이 안되는거요.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그게 같다고 이야기가 탁탁 튀어 나오는 거요. 그런 거 많이 경험했죠. 경을 배우면서.
이거는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가 그 근본인 인간의 생명의 본질 본성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이지. 본성. 그럼 제가 이거를 비유를 하기 위해서는 바닷물이 있잖아요. 바닷물이 있는데 그 바닷물이 어떤 인연의 바람에 의해서 바닷물이 파도가 일어난다 이 말이죠. 파도가 일어나면은 그거는 고요하게 바다가 있을 때는 아주 명경지수와 같아서 맑다고 그래서 우리가 거기에 모든 세상의 그림자가 다 들어난다고 좋게 볼 수가 있고.
바다가 파도가 거칠게 일어나면은 심란스럽고 번뇌고 그거는 중생심이고 어지럽다 이 말이오. 좋은 이미지는 아니잖아 그렇죠? 불안하고 긴장되고 그렇잖아. 파도가 많이 치면은. 그렇지만은 그 아무리 큰 파도가 많이 친다 하더라도 그 파도는 결국은 바다라는 이야기죠. 물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물 이라는 것을 다시 돌이켜서 우리인간 심성에서 볼 때 우리 인간 심성자리는 바닷물에다 물에다 비유를 해 보시라는 거에요.
물에다 비유를 하면은 그 물이 본래는 청정하다 그랬잖아. 그 고요한 청정한 자리는 금강경에서는 부처라 그랬고, 보리라 그랬고, 열반이라고 그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그랬거든. 같은 말이잖아. 거기에 반대되는 경우는 생사, 번뇌 이런 것들을 이야기를 했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본래 청정한 마음바탕에서 인연 따라 나온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것을 바탕을 놓고 볼 때는 이것도 마음이고 이것도 마음이기 때문에 같이 중생이 부처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고, 번뇌가 보리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고, 생사가 열반이라고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요.
그런데 그 금강경에서는 마음이라는 말을 안 쓰고 무슨 말을 쓰느냐 하면은 여기에는 공이라는 말이 없지만 공을 바탕으로 해서 출입이 서로가 자유 자재하게끔 만들어 준거에요. 그러니까 공이라는 것은 우리가 숫자적으로 볼 때 제로라는 말은 플러스 무엇이 붙든, 마이너스 무엇이 붙든, 공은 자유로운 거에요. 그렇죠? 실제 숫자가 되었을 때에 3이나 5가 되었을 때에는 그것이 다른 걸로 가기는 어려운 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실제 숫자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제로는 실제 숫자가 없기 때문에 플러스로 가든지 마이너스로 가든지 자유롭다는 거에요. 공이라는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공이라고 할 때는 텅 빈, 아주 단멸된, 그 허무 적멸하고,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움직이지 아니하는 그런 단멸이 아니고. 공이라고 할 때는 이 세상에 공이라고 비었다고 할 때는 허공 속에는 공이기 때문에 허공 속에는 아름다운 산천도 있고, 수목도 있고, 날라 다니는 날짐승도 있고, 생명들이 거기에 다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것을 참공이라 그러는 거에요. 참공은 거기에 많은 가능성과 무엇이든지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공덕의 지혜의 장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표현할 때 공을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요. 그래서 그거를 참 진공이다. 또는 다른 말로는 공성이다. 성품은 공해져 있다. 그래서 공성이라 그러고. 또 거울에 비교하면은 거울이 아주 맑기 때문에 거울은 왜 맑습니까? 번뇌 망상이 없으니까, 물결이 없으니까 맑은 거죠.
맑기 때문에 집착이 없기 때문에 그 맑은 것은 사물이 오면은 그대로 정확하게 사물을 잘 비출 수 있는 지혜공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부처님이 이야기 하는 거요. 아주 공이라 하니까 악공에 빠지고 단공에 빠져서 아무것도 없는 허무하고 그런 공으로서 생각하지 말라는 거에요. 이거를 부처님이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 이 부분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공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들이 다 평등하다는 이야기거든요. 다 평등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평등하다고 할 때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있는데,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어떻게 평등 하다고 불 수가 있느냐? 또는 지하철에서 얻어 먹는 사람도 있는데, 얻어 먹는 사람이 대통령하고 어떻게 평등하다고 볼 수가 있느냐? 이렇게도 우리가 생각 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지하철에서 동냥을 얻는 한 푼의 노숙자라도 대통령과 동등하다고 금강경에는 그렇게 가리키는 거요.
그러면 왜 동등하냐는 것이지. 왜 동등한 거냐? 왜 평등하냐 이 말이야. 평등하다는 것은 그 마음에 진성자리를 놓고 볼 때는 그 마음도 진성에는 부처의 불성이 있고, 이 사람도 노숙자지만은 부처의 불성의 진성자리가 거기에 있다는 거요. 그래서 이것을 평등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럼 있는 사람 거를 이렇게 얻어다가 없는 사람을 갖다 줘서 균형적으로 똑같이 맞춘다.
예를 들어서 A가 재산이 10억인데 B는 재산이 100원 밖에 없다. 그러면 A에게 있는 재산을 5억을 빼다가 B에게 5억을 갔다 주면 똑같이 5억이 되니까 평등하다. 이거는 중생이 생각하는 평등 논리법이라는거요. 그런데 부처님이 보시는 평등논리법은 그게 아니라는 거요. 학의 다리가 길고 오리 다리가 짧은데. 중생 논리로 보면 학 다리 끊어야 되는 거요. 끊어다가 오리다리에 연결 시켜 줘야 되는 거요.
그런데 학다리를 끊으면 학이 굉장히 불편하게 사는 거요. 왜 그러냐 하면은 학은 그 다리를 길게끔 하기 위해서 굼벵이가 매미가 되기 위해서 7년 8년 동안 땅속에서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살아온 것이 다 연기성으로, 연기관계로 가져온 거에요. 필요에 의해서.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어진 것이고. 사실은 오리가 다리가 짧은 것도 그냥 오리가 어느 순간에 다리가 짧아 진 게 아니고. 그 자기에 맞게 끔 다리를 짧게 하기 위해서 오리도 많은 세월 동안에 그 연기성을 접해오면서 오리도 거기에 맞게끔 다리가 짧아 진 거에요.
그러면 이거를 놓고 볼 때는 부처님도 32상 80종호나 지혜 공덕장을 이렇게 다 하시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 동안에 부처님도 보살의 인행을 해 오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끊기는 것도 아니고, 단멸된것도 아니고, 다 그렇게 연기적으로 관계성을 가지면서 그렇게 다 진행 되 왔다는 거요. 그래서 자업자득이고 자작자득이라는 말이 있거든. 다 자기 업에 맞게끔 그렇게 한 건데.
그러나 업으로 볼 때는 자기가 필요해서 했지마는, 그 업하고 상관없는 자리가 있는데, 그게 무슨 자리냐 하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자리라는 거요.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은 불성이라 그러기도 하고, 법성이라 그러기도 하고, 주인공이다 그렇게도 이야기를 하고, 금강경에서는 여래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자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금강경에서는 극과 극이 동일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이야기를 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라고도 또 부정하는 말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 부정은 궁극적으로 뭐냐 하면은 참 된 진실성이 있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었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는 거요. 중생은 부정을 하면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돼서 부정에 빠져버려서 부정으로 인한 고통을 받지만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부정은 참된 진실성을 진여를 불성을 또는 여래를 드러내기 위해서 부정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요것을 다른 말로 제가 잘 이해를 시킬 테니까 들어보세요.
금강경에서 제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뭐냐 하면은 사구게죠. 사구게 이야기가 참 어렵다 이 말이야. 사구게 이야기를 하면은 이 금강경이 이해가 쉬워지는 거라. 왜? 극과 극을 이야기한 것도 이해가 되고, 부정한 것도 왜 부정했는가를 이해를 하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은 사구게의 첫머리가 뭡니까? 범소유상이라 그랬거든. 한문으로 되 있으니까 우리말로 번역하면은 모든 형상 있는 것 이렇게 이야기 했거든. 그렇죠?
모든 형상 있는 것이라 할 때는 그거는 긍정적인 이야기죠. 다 형상 있는 거 다 긍정하잖아. 전부 다 어떤 형상을 가지고 형상 다 가지고 이 세상에 다 존재하고 있잖아요. 형상 있는 것을 가지고 믿으라 마라 할 수 없잖아요. 형상 있는 거니까. 이 컵을 보고 이 컵이라고 믿으라 할 거 없잖아요. 그냥 컵이잖아. 이건 긍정적인 이야기죠. 그렇죠? 범소유상. 형상 모둔 형상 있는 거. 개시허망이다 할 때는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 할 때는 부정이죠. 형상 있는 거를 부정하는 말이잖아.
부정하는 말은 뭐로 통하느냐 하면은 공으로 통한다 이 말이야. 금강경에서는 부정을 공을 이야기를 할 때 공이라는 낱말을 쓰지 안하고 허망이라는 말로 쓴 거에요. 아주 그래서 금강경이 뛰어난 거에요. 공을 드러내고자 하면서도 공이라는 단어를 안쓰고 허망이라 그랬거든. 왜 허망인줄은 여러분들은 아시죠? 연이생법. 연생연멸이기 때문에. 인연법으로 모였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요.
그러면은 모든 형상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는 이 말이야. 허망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부정한 거죠? 형상 아니다 이 말이죠. 부정했잖아요? 그 다음에는 개시허망인데. 약견, 만약에 말이지, 모든 형상 있는 것을 형상이 형상이 아닌 줄을 알면은, 왜 형상이 형상 아닌 것으로 알아야 됩니까? 연생연멸이기 때문에 그렇죠? 형상이 형상 아닌 줄을 알면은 아는 그것이 뭐에요?
아는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거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어디 저 멀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형상이 형상아닌걸로 연생연멸했다는걸로 그냥 지혜로서 보는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거요.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다른 말로는 불성이다. 또 법성이다. 또 진여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지혜가 법성이라는 지혜가 불성이라고 하는 지혜가 그런 마음이 있구나. 이렇게 또 그거를 집착하지 말라는 거요. 그냥 이 컵이 색으로서 인연연법으로 다 모인 것일 때는 연생연멸로 인연으로 다 모였을 때는 이게 상이 있는 것이라 컵이지만도 이게 인연이 다 흩어질 때는 없는 것이니까 공이라고 그냥 보는 그 자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거에요. 그게 지혜라는 것이지.
그때 그때 그 순간에 지혜롭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연기법으로 보는 그 자체가 그냥 지혜고,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했고,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따로이 뭐가 또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공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공도 철저하게 빈 것이다. 그래서 이게 사구게거든. 이게 사구게잖아. 이 원리 알면은 금강경은 다 알아버리는 거에요.
부정을 천 번을 한다 하더라도, 저 천 번을 부정하는 이유가 불성이라든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부정을 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고. 번뇌가 보리고 중생이 부처라고 극과 극을 이야기 한 것도 저렇게 중생과 부처가 하나가 될 수가 있고 동등하다고 얘기하는 것도 본래 그 본성 자리는 불성이라는 그 텅 빈 공심을 가지고 바탕으로서 했기 때문에 그것도 된다는 거에요. 이렇게 되면은 이해가 됩니까?
그래서 그것을 저 번 시간에 조금 제가 간단하게 이해를 시키느라고 뭐라고 이야기 했느냐 하면은 공가중이라는 일심상관 원리를 한 거에요. 사실은 이 공가중이 더 복잡하게 이야기 하면은 일심삼천설이라는 말도 있어요. 한 생각 우리가 생각하는 순간에 3천 세계가 거기 다 들어간다는 논리법이 있습니다. 일념삼천설이라는 게 있는데, 그런 건 여러분들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지니까 축소해서 한 생각 안에 공과 가와 중이라는 그 삼심을 같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를 했는데. 공은 여태까지 이야기를 해서 잘 아시고. 가라는 것은 한문으로는 (거짓 假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잠깐 있다 없어지는 아지랑이 같다 해서 (거짓 假가)를 빌려 쓴 거거든 표현이.
그러면은 그 가는 뭘 말하냐 하면은 색을 말하는 거요. 그렇죠. 형상을 말하는 것이거든. 그러면 형상이 그 공과 같다는 이야기거든. 그렇죠? 형상이 공과 같을려면은 어떻게 되야 됩니까? 그 형상과 공은 그것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뭔가 바탕이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 바탕을 마음이라는 바탕을 가지고 비유를 해 드렸고. 바다라는 물이라는 바탕을 가지고 이야기 해 드렸고.
또 공가중에서는 중도라는 거기에 서로 걸림이 없게끔 오고 가고 장애가 없게끔 하는 역할을 중도라는 중이라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준거에요. 더 쉽게 비유를 하자면은 물이라는 것이 인연을 만났을 때 그 물이 형상을 달리하는데 어떤 형상을 달리 하냐 하면은 구름으로 변했다 이 말이오. 그러면은 구름으로 형상은 변했지만은 그 구름이 뭐에요? 물이잖아.
또 그 구름이 다른 인연조건을 만나서 눈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 눈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본질은 뭐에요? 물이잖아요. 그러니까 물이라는 말을 금강경에서는 공에다 바탕을 둔거에요. 그리고 또 다른 말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도 이야기를 한 거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공이다 이 말이야. 그렇죠?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이해 시키기 위해서 저 번 시간에, 거 중요한 거에요. 공가중이라는 것이.
제가 아주 짧은 시간에 이해 하게끔 만들어 드렸는데. 여러분들은 그런 법문이 아이고 왜 저런 딱딱한 저런 법문을 하시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안 하시고. 생각하실 지는 몰라도. 공이 색과 공가가 같다 이 말이오. 같은 것은 서로가 항상 공 속에는 가와 중이 같이 들어가 있고. 가 속에는 공과 중이 항상 같이 있다는 거요. 이거를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되.
그래서 부처님의 불법의 내용을 볼 때 이런걸 또 생각해 봐 야되. 부처님이 처음에 출가하실 때는, 태자로서 출가하실 때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출가 하셨냐 하면은, 내가 태자로 있는 있는 이 자체는 생로병사가 있고,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되면은 생로병사를 초월하고. 여기에서 생로병사라고 할 때는 사람이 죽고 없어지는 생사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번뇌가 일어나는 것도 생이요. 번뇌가 멸하는 것도 죽는 거니까 사다 이 말이야. 그걸 생멸심이라 그러잖아요.
그 생멸심으로 인해서 고통은 이루어 지는 거니까. 이 생멸심을 벗어난 부처의 세계가 따라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시고 출가를 하셔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셔서 도를 이루고 보니까, 부처님이 성불하시고 보니까 그 마음 내 그 마음인데, 중생일 때는 정화가 안되고 세탁이 안 됬을 테고 부처가 되고 보니까, 그 마음이 세탁이 되고 정화가 되어서 그 마음이 그 마음이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성불 하시고 제일 처음에 설하신 것이 뭐냐 하면은 대방광불화엄경을 설한 거에요. 그 화엄경을 설하셨을 때 부처님이 첫 구절에 뭐라 하셨냐 하면은 여래출현품에 내가 성불을 하고 보니까, 부처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나 그 기능으로 볼 때는 그 마음의 공덕성을 볼 때는 똑같더라는 거에요. 똑 같더라는 거요.
다만 내가 깨달았다는 것은 중생이 본래 아무 문제가 없는데 집착과 욕심과 번뇌로 인해서 스스로 고통을 만들고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지, 중생 자체가 부처님의 지혜 공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부처님이 깨달은 거요. 그래서 깨닫는 다는 말은 중생이 본래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거에요. 아시겠어요? 그래서 그거를 그렇게 법문을 하니까 범천왕이 와서 뭐라 한 거에요.
뭐라뭐라 했냐 하면은 부처님은 자기가 깨달은 경지를 무슨 자랑거리나 하듯이, 당신 수승한것만 생각하고 당신 경계에서만 법문하지. 중생이 번뇌라든지 욕심으로 인해서 그 기능을 못 살려내고 있는 그 입장을 잘 이해를 못하고. 그 입장을 이해 해 줄려면은 그 입장을 밝혀 줘야 될 거 아니냐. 법을 낮춰야 될 거 아니냐? 그렇게 범천왕이 뭐라 한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의 욕심에 따라서 어두워지는 것이 연못의 연꽃이 물에 잠겨있는 것도 있고, 물에 걸쳐 있는 것도 있고, 물에 쑥 올라온 연꽃도 있고, 근기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거를 이해를 시키고, 설명을 해 줘야 되고, 충분히 알게끔 해 줘야지. 알도 못하는 소리를 왜 부처님이 하고 있습니까? 범천왕이 그런 거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아이고 그렇구나. 그래서 부처님이 법을 낮춘 거에요. 낮춰서 이야기를 쭉~ 하다 보니까, 아함경도 이야기를 하셨고, 방등경도 이야기를 했다고 저번시간에 다 이야기를 했죠? 방등경 내용을 보면은 성문연각을 질타하는 내용들이 많아요. 성문연각을 질타하는 내용은 뭐냐 하면은 성문이나 연각들은 공부를 하면서 그 열반을 최종 목표로 삼은 거에요. 목적으로 삼은 거에요.
열반은 뭡니까? 아주 고요한 적멸한 것이거든. 고요 적멸만 가지고 그것을 목표로 삼으면은 고요 적멸에 들어앉아서 어쩌자는 것이냐? 중생들은 모두가 다 그 번뇌와 고통 속에 헤매고 있는데 자기 고요적멸에만 들어앉아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러니까 세상에 나오너라. 나와서 중생을 교화해라. 그렇게 해서 한 것이 방등경이거든. 그래서 성문연각을 질타하고 뭐라 한 거에요.
그래서 그러면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금강경에 와서는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다.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좀 잘 해주세요. 무슨 설명을 해야 되느냐? 그래서 지금 이와 같이 단멸됬다든지 끊긴 생각을 가지지 말아라.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부처입장에서 볼 때는 스스로 착각으로 인해서 욕심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본래 그대나 나나 똑 같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지혜를 갖춘 것에는 똑같다.
이거를 부처님이 처음에 화엄경을 이야기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한 거에요. 여래의 지혜덕상을 너희들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한 것을 이해를 못하니까 8만가지 법이 벌어진 거라. 그 벌어진 이유가 뭐냐 하면은 알아 듣게끔 하기 위해서. 이해하게끔 하기 위해서. 그리고 충분히 알 수 있는 입장이 되게끔 만들어 주기 위해서 하다 보니까 이게 전부다 이해가 법문이 벌어졌다 이 말이야.
그래서 공가중이라는것도 그래서 그 중도 연기법도 그래서 나온 거에요. 사실은 여래의 진여덕성을 보고 나면은 공가중이라는 그런 중도연기법이란 자체도 필요가 없는 거에요.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밤길을 걸을 때는 캄캄하니까, 캄캄하고 안보이니까, 전등불을 빌려야 되고, 전등불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부처님이 진리가 이런 것이 다 필요하다고 우리가 배우는 거에요.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다 한 것은 반야바라밀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닌 거에요. 필요가 없는 거에요. 전체가 밝아 버리면은 밝다는 말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한 구석이 어둡기 때문에 어두운 곳이 대비돼서 밝다는 말이 필요하고, 진리가 필요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필요하고, 또 반야바라밀이라는 수행 법이 필요하지만은 그 세계 속에 들어가 버리면은 그 때가서는 반야바라밀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여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그렇고, 또는 32상 80종호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 세계에 가서는 그런 것들이, 그 세계에 가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해도 평등법이고, 중생이나 부처가 다르다 같다고 해도 그거는 다 통한다는 소리야.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게 안 통하죠. 그렇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모든 것이 다 이 우리 본 진성이, 여래의 공덕이, 있다는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 부정법을 쓴 것이지. 사구게를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지.
32상도 80종호도 그게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그게 여래의 지혜덕상속에 다 함께 갖추어져 있고, 관계성을 가지고 있고, 연기적으로 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볼 때는, 법을 볼 때는 극과 극으로 극적인 견해를 가지지 말아라. 항상 그것은 서로 다 이렇게 관계성으로서 통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에요. 오늘 법문을 이해를 시키려고 이것저것 많이 끌어다가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그나마 그래도 나름대로 이해가 조금 갈 겁니다. 다음에 또 자꾸 들어야 나중에는 완전히 이해가 가실 거에요.
출처 :진불선원 () 선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 법흥(法興)

첫댓글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_()_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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