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고위층의 인물인가 은근히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아?…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사내는 뛰쳐 나간다. 그리하여 씩씩거리며 종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이 옷도 채 입기 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뛰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최인호,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이 인 성
모자를 쓴 자화상 1950 나무판에 유채
해당화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X146cm 호암미술관 소장
온일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72 x 90cm
정원 1930 캔버스에 유채 90.9x89.3cm
어촌 덕적도 풍경 캔버스에 유채 32x41cm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35.5x45cm
여름 실내에서 1934 캔버스위에 수채 71x89.5cm
경주 산곡에서 1935 130.5X195.6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가을 어느날 1934 96X161.4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책 읽는 소녀 1940 캔버스에 유채 40.9 x 31.5cm
백장미 1940 나무판에 유채 45.3X37.3cm
화가 이인성
이인성은 일제 치하인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열살이 되어서야 대구의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대구화단의 선구자 서동진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 15세 때의 일이었다. 2년뒤인 29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입선하며 화단에 입문했다.
주위의 후원으로 31년 도쿄 유학을 떠나, 낮에는 화랑직원을 하고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졸업장은 물론 없다. 유학시절 조선미전 수상뿐 아니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 등을 기록했다.
특히 그는 수채화에서 탁월한 예술성을 발휘했다. 강렬한 원색과 강한 대조, 그리고 불투명의 짧고 단속적인 붓터치로 유화의 수준에 비견될 만한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조선미전에서 데뷔한 후, 8년간 '카이유'(32년 가을) '가을 어느날'(34년)을 비롯,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35년) 등 무려 12점의 입선작과 6점의 특선작을 내는 대기록을 세웠다.
35년 귀국한 그는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 김옥순과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된다.
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됐으나, 이듬해 순경과 사소한 언쟁끝에 총기 오발사고가 일어나 아깝게 요절한다.
그에 대해서는 관전(官展)을 발판으로한 출세지향적 작가라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한 이인성에게는 관전이 활동무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여러 화집을 참조하면서 독학한 이인성은 서구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뤘다. 그가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는 까닭을 그의 그림들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인성은 조선미전에서 6회 연속 특선 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고, 37년엔 불과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초대작가가 되는 등, '조선의 지보(至寶)' '화단의 귀재'로 불리며 신화적인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그와 동시대의 작가인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이 50~60년대에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해 70~80년대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과 대비된다.
이인성의 대표작은 '경주의 산곡에서'(35년)으로, 98년 월간미술이 평론가 13명에게 의뢰해 선정한 '한국 근대유화 베스트10'에 김관호의 '해질녘'과 함께 공동 1위로 선정됐던 작품이다.
그외에도 '가을 어느날'(34년) '복숭아'(39년)' '해당화'(44년) '카이유'(32년) '아리랑고개'(34년) '여름 실내에서'(34년) 등이 있다.
첫댓글 미술에...전문 지식이 부족한 제게 귀한 글과 그림 곁들인 해설 정말 감사드립니다.. 허밍님께...감사드리며...^^
해설 지가 한거 아니거등요...ㅋㅋ~ 퍼온거예요..
나는 문외한이지만 감상하는 내내 고갱이 떠올랐는데.. 그랬군. 한국의 고갱.. 어촌 덕적도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저곳 어드메쯤 시인 장석남의 집이 있을 듯 나도 몰래 기웃거려지고..
언닌 프로야..절대 아마가 아녀...
눈이 즐겁답니다 ~~~~~~ 허밍님 좋은하루웅 ~~~^^*
들풀님도 존하루~~~~
한참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머물다 갑니다...음악도 좋구요~허밍님 쌩유^^*ㅎㅎ
이상하죠.. 제가 그 당시를 산것도 아닌데 해당화 그림을 보는순간 뭔가 가슴이 울컥해지는게....
젊은 나이에 단명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많은 작품을 남겨야 하는데요.. 허밍님이 그림에 관심이 많나봅니다.. ㅎㅎ
그림은 잘 모르는데...그림에서 이국적인 느낌이 나네요..허밍님 그림감상은 언제 할 수 있는교? ㅎㅎ
ㅎㅎㅎ어쩐지 고갱풍이 흐르더만 좋은 작품 감상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