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황순하(자동차 칼럼니스트)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SUV(Sports Utility Vehicle)의 판매가 줄어들고 있다. 작년 총 내수시장에서 SUV가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그쳐 지난 2001년 18%에서 2004년에는 31%까지 수직 상승하던 SUV의 판매가 급감하는 추세를 보인 것이다. 특히 7인승 이상 모델들의 부진이 두드러진 걸 보면 고유가와 세제 변경으로 인한 자동차세 인상의 영향이 예상 외로 상당한 것 같기도 하다. 그 사이에 중대형 승용차의 판매는 대폭 늘었으니, 그렇다면 뭐든지 빨리 변하는 특성을 지닌 우리나라에서 이제 SUV로 대표되는 RV의 시대는 끝나고 다시 세단 승용차의 부활이 시작된 걸까? 미니밴도 잘 안 팔린다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RV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런 흐름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RV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편의상 레저용 차량(Recreational Vehicle)이라고 번역하는 RV가 원시적 형태의 특수용도 차량에서 전세계 자동차시장의 주요 트렌드로 본격 등장하게 된 지는 이제 겨우 20여 년에 불과하다(80년대 초 아이아코카가 개발하여 망해 가던 크라이슬러를 회생시키고 전세계적으로 RV의 붐을 일으킨 최초의 미니밴 캐러밴(Caravan)을 기억하시는지?). 그래서 아직 세계 자동차업계에서도 정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아 주요 시장별로 RV에 포함시키는 자동차의 범주가 약간씩 다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우리가 흔히 봉고차라고 부르는 원박스차(One-box Vehicle), 카니발이나 카렌스 같은 미니밴(Mini Van), 세단 승용차의 변형 모델인 왜건(Wagon), 그리고 렉스턴이나 스포티지 같은 SUV의 네 가지 형태의 차종이 포함된 것으로 보면 대체적으로 무난하다. 물론 미국이나 태국의 픽업(Pick-up)같은 특수한 예외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 초 넓은 공간을 활용한 다기능과 다인승이라는 메리트로 ‘봉고신화’를 낳으며 화려하게 국내 RV시장의 첫 장을 열었던 원박스차는 이미 시장에서 사라져 가고 있고, 앞 쪽을 약간 튀어나오게 일부 변형한 1.3박스 형태의 스타렉스만이 외롭게 원박스 RV로서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역시 97년 외환위기 이후 폭발적인 RV붐을 일으켰던 카니발, 카렌스, 레조 같은 미니밴도 실용성보다 쿨하고 다이나믹한 생활을 추구하는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10인승 이하 자동차를 승용차로 규정한 새로운 세법의 영향으로 최근 들어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고유가의 영향으로 LPG엔진에 대한 수요가 남아 있어 소량 팔리거나, 아예 로디우스, 뉴 카니발 같이 11인승 대형 승합차로 변신하여 일부 특수수요를 만족시키는 데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유럽시장에서는 RV중에 가장 수요가 많은 왜건이 우리나라에서는 품위를 중시하는 세단 수요자와 높은 차체로 인한 ‘자세 나옴’을 RV의 주요 덕목으로 생각하는 RV수요자들의 사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나오는 모델 족족 실패하는 걸 보면, 처음부터 왜건은 우리나라 RV의 범주에는 넣을 수 없는 차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면 SUV쪽은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우리나라 SUV시장은 90년대 들어 현대정공(지금의 현대모비스)에서 일본 미쓰비시(Mitsubishi)의 인기 모델 파제로(Pajero)를 그대로 들여 와 갤로퍼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후 기아의 구형 스포티지와 쌍용의 무쏘가 등장하였고 소득 상승에 따른 레저문화의 발달과 그 당시 휘발유 가격이 3분의 1정도에 불과했던 저렴한 유류비 덕분에 디젤엔진 SUV가 점차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RV시장의 초기 시절이라 화물트럭 차체를 베이스로 강철 프레임 위에 차체를 얹는 보디 온 프레임(Body-on-Frame)의 대형 차체에 각진 외형 스타일로 우람하게 보이는 근육질의 마초맨 모델들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런 시기에 너무 일찍 등장한 승용형 SUV 스포티지(구형)가 곱상한 외모로 인해 국내에서 고전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 당시 더 터프하게 보이기 위해 흔히들 기능 상 필요하지도 않은 스텐레스 국기봉을 달거나, 강철파이프 가드를 범퍼에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 위에 금빛으로 칠해진 코뿔소나 말의 강철 모형을 달고 다녔다. 자동차라는 게 어른들, 특히 남성들의 장난감이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라 모양은 어색해도 자신을 더 한층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청난 무게의 대형 SUV가 고속으로 달리다가 동물모형이 창처럼 튀어 나온 강철파이프 가드를 붙인 채 다른 차량이나 보행자에 충돌했을 경우 어떤 결과가 발생할 것인지, 아니 발생했을지 정말 상상하기도 두렵다.
대개 어느 나라든지 RV시장은 초기에 SUV든, 미니밴이든 관계없이 고배기량 엔진을 단 대형차종들로 시작된다. RV는 정의상 다목적, 다기능이고 험로(Off Road)주행도 가능해야 하니 차체가 커지고 다양한 옵션들을 붙이게 되어 당연히 베이스가 된 트럭이나 세단보다 가격이 비싸진다. 또한 연비도 좋지 않을뿐더러 주차도 힘들고 도심주행이나 출퇴근 용도에는 불편하다. 따라서 초기에는 여유있는 사람들의 주말용 내지는 과시용 컨셉에 맞게 만들어지게 된다. 이런 게 길거리에 굴러다니면 그 위압적인 자세와 덩치에 눌려 일반 승용차들은 겁먹고 피하게 된다. 또 차체가 높아 주위 차들을 눈 밑으로 내려다 보는 기분도 괜찮다. 대신 옆에서 이런 대형 RV를 우러러(?)보아야 하는 승용차 운전자들은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이런 차들은 유해 배기가스도 많이 나오면서 소음도 심하고 무거운 차체로 인해 도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쉽다. 한마디로 주위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이다. 허나 입으로는 대의명분을 부르짖어도 실제 행동은 이기적으로 하는 게 人之常情이다 보니, 일반 사람들이 ‘나도 저런 폼 나는 차를 타 보았으면,’하고 부러워하는 심리를 갖게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80년대 초에서 90년대 중반까지 RV시장 대중화를 위한 기반 분위기가 조성이 되었고, 그 당시 각 자동차 메이커들은 새로이 창출되는 RV시장에 주목하게 되어(요새 말로 블루오션이 되겠다) 기술과 자원을 집약시켜 새로운 모델들을 경쟁적으로 개발해 내게 된다. 가격을 낮추어 보다 많은 소비자들에게 폼과 실용성의 두 가지 측면에서 어필해야 하니, 차체와 엔진배기량이 작아지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무거운 프레임을 빼고 승용차처럼 모노코크 보디(Monocoque Body)를 쓰는 것이 새로운 추세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동일한 추세를 따라간다 해도 나라 별로 좋아하는 차종이나 시장의 발달 속도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 자신들 주력시장의 RV 트렌드에 맞추어 적절하게 제품들을 개발한 메이커들은 계속 성장한 반면, 그렇지 못한 메이커들은 결국 경영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니 실로 RV시장의 힘은 거대하다 하겠다. 일본에서 90년대 중반 이후 RV에 올인한 혼다와 스즈키, 적절히 따라간 토요타는 살아 남았고, RV붐은 일시적이라고 판단하고 안일하게 대처했던 초기의 선두주자 미쓰비시와 닛산, 마쓰다는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미국에서도 저유가 시대가 지속될 것으로 믿고 수익성 좋은 대형 SUV개발에만 몰두했던 GM과 Ford가 현재 경영위기에 처한 것도 좋은 예가 되겠다. 현재 우리나라 SUV시장도 급격히 소형화, 경량화하고 있어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의 기술 밖에 가지지 못한 쌍용차는 초기 SUV시장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점차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앞서 우리나라 SUV시장이 침체되고 있다고 하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렉스턴, 테라칸 같은 대형 SUV, 쏘렌토 같은 중형 SUV의 판매가 대폭 줄었을 뿐이다. 작고 연비 좋고 패셔너블하기까지 한 스포티지, 투싼 같은 소형 SUV, 그리고 중형SUV이긴 하나 모노코크 방식이라 가볍고 상대적으로 Ride & Handling이 좋은 7인승 싼타페는 오히려 판매대수가 대폭 늘었다. 7인승 RV에 대한 세금이 올랐다고 해도 제품이 시대의 요구에 맞으면 수요는 오히려 늘어남을 보여 준다. 시장이 무섭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제 RV시장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 보았으니, 다음에는 RV의 특성에 대해 좀 더 살펴 보고 과거에 전세계적으로 어떠한 사회적 변화가 있었기에 RV시장이 대폭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향후 RV시장은 어떻게 변화하며 세단을 포함한 전체 시장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쳐 갈지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 약력
황순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미 미시간대학 경영학 석사 취득 네델란드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경영대학원 수학 기아자동차 수출, 비서실, 동경주재원,상품기획, 그룹기획조정실, 독일 판매 법인 근무 기아그룹 구조조정 업무 및 매각입찰 실무팀장 아더앤더슨 자동차산업 구조조정 및 매각업무 담당 대우자동차 판매 기획실 –캐딜락&사브 판매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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