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인 이야기/'선교사이며 신부로서 나환우와 생을 함께한 성인'- 성 다미아노 / 신부 설립자(축일:5.10.)
성인이름 : 다미안 드 베스테르
(Damien de Veuster)
축일 : 5월 10일
신분 :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 몰로카이(Molokai)
활동연도 : 1840-1889년
같은이름 : 다미아노 다미아누스
다미앵
♧♧♧♧ ☆ ♧♧♧♧ ☆ ♧♧♧♧ 성인 설명 :
1) 성인전
·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원명은 Joseph de Veuster)는 1840년 벨기에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 아버지 프랑스와 드 베스테르와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들처럼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으나 수도원에 들어간 큰형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깊어 기도와 고행을 실천하면서 성장하였다.
· 일찍이 영성에 눈을 뜬 그는 고향에서 초등 교육과정을 마치고 발론(Vallon) 지방의 르 콩(Brain le Comt)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중,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적 권고를 통해 완덕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1859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 일명 Picpus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수도회 회칙에 따라 의사로서 시칠리아 섬의 주민들을 헌신적으로 돕다가 4세기 초에 순교한 다미안으로 세례명을 바꾸었다.
수도회 입회 후 벨기에 루뱅과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였다.
· 해외선교를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던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는 1825년 이해 수차례에 걸쳐 하와이 군도의 샌드위치 섬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었다.
1863년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성 다미안은 형을 대신하여 하와이 선교를 자원하였다.
이듬해 하와이로 간 성 다미안은 호놀룰루 근교의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 간 공부하고,
그 해 5월 호놀룰루 대성전에서 메그레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푸노(Puno)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성 다미안 신부는 1865년에는 코할라(Kohala)로 옮겨 원주민들의 인습과 싸우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당을 짓고 용암으로 덮인 섬을 돌아다니면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 1865년 하와이 군도에 나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이 제정되었는데, 이에 따라 나환자들은 몰로카이(Molokai) 섬에 격리 수용되었다.
1873년 메그레 주교로부터 몰로카이 섬에 수용된 나환자들의 참상을 전해들은 성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건너가 700여 명이 넘는 나환자들의 집을 지어주고, 의사의 도움 없이 나환자들의 고름을 짜 주고 환부를 씻어 주며 붕대를 갈아주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매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고 무덤을 파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자 냉담하던 환자들도 신뢰와 존경심을 가지고 따르게 되었다.
1881년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카라카우아’ 훈장을 받았다.
· 성 다미안 신부는 1885년 자신이 나병에 감염된 것을 알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나환자들을 위하여 계속 일하였다.
요양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1889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성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1936년 몰로카이 섬에서 벨기에로 옮겨 안장되었다.
성 다미안 신부는 1992년 7월 시복 대상자로 확정되었고,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Brussel)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9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인의 축일은 교회의 관례대로 선종일인 4월 15일에 지냈으나, 이날이 종종 사순시기와 겹치는 관계로 미국 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5월 10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2) 다미안 신부 등 복자 5위 시성식 거행
자기 희생과 철저한 순명, 우리 삶에도
시성식이 거행된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성인화가 걸려있다.
· 몰로카이섬의 성자 다미안 신부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 수도회 창립자 쟌 쥬강 수녀 등 복자 5위가 성인품에 올랐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1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성식을 거행하고 다미안 신부, 쟌 쥬강 수녀, 지그문트 펠린스키 대주교,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 신부,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신부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 교황은 이날 미사 강론에서
"새로 시성된 성인들은 인간의 이해와 계산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기 희생과 하느님에 대한 소명을 보여준 이들이다"면서
새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라고 당부했다.
· 이날 성 베드로 대성전과 광장에는 성인 탄생의 영광을 축하하러 온 세계 각국 신자들로 넘쳐났다.
성인화는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걸렸으며 성인 유해는 미사 중 성 베드로 대성전 제대 위에 봉헌됐다.
· 특히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성인 전구로 기적적으로 암이 나은 안드레이 토구치(하와이, 81)씨와 담당의사, 하와이에서 온 한센병 환자가 봉헌해 눈길을 끌었다.
· 한편 전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와 평택대리구장 김화태 신부, 성라자로마을 원장 조욱현 신부, 라자로돕기회 봉두완(다윗) 상임고문이 이날 시성식에 참석했다.
다음은 시성된 성인 5위다. [바티칸시티=CNS]
ㅁ 성 다미안(St. Damien,1840~1889) / 신부
· 벨기에에서 태어난 다미안(예수와 마리아 성심회) 신부는 33살 때 하와이 몰로카이섬에 자원해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봤다. 그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사목자, 의사, 상담사, 가족이 돼주며 한센인 800여 명을 성심성의껏 돌봤다.
·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다미안 신부는 그토록 바라던 한센병에 전염돼 1889년 세상을 떠났다.
·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은 물론 에이즈와 같은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는 이들과 버려진 아기들, 억압받는 여성, 차별받는 소수공동체 등 위한 소외당한 모든 이들을 위한 성인으로 선포됐다.
ㅁ 성 쟌 쥬강(St. Jeanne Ju gan, 1792~1879)/ 수녀
· 쟌 쥬강 수녀는 47살이 되던 해에 앞을 못보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집에 모셔와 돌보는 것을 시작으로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어르신들을 돌보며 기도와 공동생활로 '가난한 이들의 자매들'이라는 새로운 수도 공동체를 만들었다.
· 쟌 쥬강 수녀는 천주의 성 요한과 성 요한 에우데스 영성을 바탕으로 수도회 규칙을 만들었지만 공동체 지도 신부에 의해 수도회 원장직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쟌은 침묵과 신뢰로 맞서며 어르신들을 위한 모금활동에 전념했다.
· 가난한 어르신들을 섬기는 것이 유일한 사도직인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 수도회'는 프랑스에 본원이 있으며 수도회원은 3000여 명이다.
ㅁ 성 지그문트 펠린스키(St. Zygmunt Felinski, 1822~1895)/ 대주교
· 볼리니아(현 우크라니아)에서 태어난 지그문트 펠린스키 대주교는 폴란드 바르샤바대교구장을 지냈다. 또한 마리아의 가족 프란치스코 수녀회 창립자이기도 하다.
· 펠린스키 대주교는 러시아 압제 하에 있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농부들을 위한 사목에 앞장섰으며 시골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ㅁ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St. Francisco Coll Guitart, 1812~1875)/신부
·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 신부는 스페인 도미니코수도회 출신 사제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도미니코 수녀회를 창설했다.
· 기타르트 신부는 신앙생활에 나태해진 가톨릭 신자들이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헌신했으며 명연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스페인에서 대대적인 묵주기도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ㅁ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St. Rafael Arnaiz Baron, 1911~1938)/ 수사
· 20세기 스페인 성인으로 트라피스트회 수사다. 27살 짧은 생애로 삶을 마감했지만 그 누구보다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 전도유망한 건축학도의 길을 걷고 있던 바론 수사는 어느 날 트라피스트회 산 이시도로 수도원을 방문하고난 뒤 거룩함에 이끌려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회에 입회했다. 수도회 입회 후 건강이 약화돼 수차례 입퇴회를 반복했다. 이때 바론 수사가 남긴 영적 수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평화신문, 2009년 10월 18일]
(출처: 굿뉴스 가토릭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