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장군으로, 본관은 금주, 어릴 때 이름은 은천이다. 983년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서경을 침공하자, 강조가 30만 군사를 이끌고 싸웠으나 패배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 많은 신하들이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강감찬은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을 보내어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1018년에 거란은 고려의 강동 6주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왔다. 이에 강감찬은 서북면 행영 도통사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도처에서 거란군을 격파했다. 특히 고려군의 협공으로 도망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혀 10만 거란군 중에서 생존자는 수천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승리를 귀주대첩이라고 한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 야욕을 버리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인 국교가 성립되었다. 이와 같이, 문신이면서도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역할까지 훌륭히 해낸 강감찬은 그 후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후 은퇴하고,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