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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악산 연주암(冠岳山 戀主庵)을 찾아서 ③
-대웅전ㆍ삼층석탑ㆍ천수관음전 등 당우 및 이모저모 -
지난 3월 6일, 관악산 관음사를 두루 참배한 연후에 관악산 탐방로를 따라 올라 관악사 지를 둘러보고 연주암에 이른 다음, 연주대를 찾고 십이지탑을 참배하고 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연주암 전각을 둘러볼 차례입니다.
관악산 연주암 전각배치도
☞ 전각배치도 중 ③번 영산전과 ⑤번 좌불은 아직 건립되지 않은 예정지역입니다.
관악산 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5-1번지(자하동길 63) 관악산 연주봉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 말사입니다. 그런데 순례를 다녀온 후 지난 3월 17일 조계종 중앙종회 회의에서 직영사찰 전환지정 동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직영사찰로 전환될 예정입니다.
연주암은 신라 문무왕 17년인 677년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연주암중건기> 등의 자료에는 의상 스님이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하였으며,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유물이라든지 의상 관련 문헌 등에서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할 만한 어던 자료도 찾아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현존하는 3층석탑이 고려 후기에 속하는 양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 창건연도 가 꽤 오래된 고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연주암 사찰이름의 유래는 앞서 밝힌 바 있어 생략합니다.
조선 태조 1년인 1392년, 태조가 의상대를 중건하고, 그의 처남인 강득룡(姜得龍)이 연 주대(戀主臺)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태조 5년인 1396년, 연주암(戀主庵)을 신축하였 고, 태종 11년인 1411년,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사찰을 이전하여 지금의 자리에 건축 했다고 합니다.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불기 2518년(1974) 주지 송원(松園) 스님에 의해 신축되었습니다.
대웅전 법당의 모습
본존 석가모니불
여기에 작은 불상들은 연주암 내 작은 전각에 모셔졌던 불상인데 전각이 없어짐에 따라 모셔다 봉안한 것이랍니다.
지장보살상과 지장탱화
신중탱화(神衆幀畵)
대웅전 앞의 아름다운 석등 모습
석등의 복련부분과 옥개석부분, 상륜부 등의 우로 감돈 영기문(靈氣文)이 불법승 삼보 를 상징하는 듯 이채롭게 보입니다.
대웅전 중창 공덕비
이 공덕비는 대웅전 왼쪽 언덕에 세워져 있습니다. 대웅전 신축에 공덕을 지은 사람들 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공덕비입니다. 글씨는 철필로 글씨를 쓰듯 새겨져 있습니다.
「의상 스님이 살던 옛터에 낡은 집을 헐고 김영지, 라공묵, 권경수, 권선수행 등 천여 불자가 정성을 모아 큰 법당을 세우다.
불기 二五一八년 七월 二九일 연주암 주지 송원 이하 생략」
평화의 불 기념비
「해와 달이 다하고 선묵혜자 스님이 중생업이 다 해도 부처님 탄생성지 룸비니를 우리는 둘이 아닌 밝히던 평화의 불을 채화하여 不二의 진리 3만리 이운의 길을 통해 이 도량 밝게 비춘 평화의 불 한국으로 모셔와 오늘 남과 북이 하나 되길 서원하오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며 무명 번뇌 모두 태운 모든 중생들 연주암에 평화의 불을 밝힌다. 평화 열반이루도록 발원하나이다 불기 2559(2015)년 4월 9일」
연주암 3층석탑
연주암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보입니다. 이 3층석탑이 연주암의 유구한 역사 를 말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연주암 3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4호-
「이 탑은 높이 3.6m로, 한 장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기단은 단층의 4장의 판 석을 엇물려서 조성하였는데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우주(隅柱)]이 새겨져 있다.
탑신(塔身)과 지붕들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지붕돌 받침의 1층은 4단이지만 2층과 3층은 3단으로 만들어져 규율성을 잃고 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전각의 반전이 둔중하여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지붕돌 위에는 노반석(露盤石)과 앙화(仰花),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이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잘 맞고 제작수법도 정연 하여 고려 중기 이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에서 옮김-
옆에서 바라본 3층석탑
통일원종각(統一願鐘閣)
이 범종각은 대웅전 오른쪽 축대에 불기2528(1984)년에 지어졌는데 이 자리는 원래는 나한전 자리였다고 합니다. 통일원종각(統一願鐘閣)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아 통일을 염원하며 지어진 범종각입니다.
통일원종각(統一願鐘閣) 편액 -송원(松園) 스님 글씨-
통일원종각(統一願鐘閣)의 글씨는 연주암 주지로 계셨던 송원 스님의 글씨입니다.
종각 축대에 조성된 용왕각인데 유리때문에 잘 안 나오네요.
대웅전 뒤편의 금륜보전(金輪寶殿) 모습
금륜보전(金輪寶殿)
금륜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불기 2525(1981)년에 중건된 건물입 니다. 연주암 연혁을 보니 불기 2473(1929)년에 주지 재예(在藝) 스님이 금륜전 4칸을 건립했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모습을 보니 중건할 때 약간 축소된 듯합니다. 금륜보전은 치성광여래를 모신 전각의 이름입니다. 안에는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 습니다. 이와 같이 삼성을 모신 전각을 보통 삼성각(三聖閣)이라 하는데 연주암에서는 금륜보전이라 했네요.
금륜보전(金輪寶殿) 편액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선생 글씨-
평남 중화 출생으로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ㆍ만이천봉주 인(萬二千峰主人)ㆍ백운거사(白雲居士). 서예 각체에 두루 능한 명필임.
칠성탱화(七星幀畵)
독성탱화(獨聖幀畵) -불기 2470(1926)년 제작-
산신탱화(山神幀畵)
종각 뒷편 자리한 효령각(孝寧閣)
효령각(孝寧閣)
효령각은 정면, 측면 각 1칸인 맞배지붕건물로 불기 2540(1996)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여기에 주련이 있어 적어 봅니다.
出自王宮通佛域 출자왕궁통불역 스스로 왕궁 나와 불세계에 이르렀고 仰瞻天國上仙臺 앙첨천국상선대 천국을 우러르며 신선대에 올랐어라.
효령각(孝寧閣) 편액 -노천월하(老天月下) 종정의 글씨-
노천월하(老天月下) 종정스님
1915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신 스님께서는 1933년 7월 20일 18세에 강원도 유점사에 서 성환 화상을 계사로 득도하신 후 1940년 4월 8일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수계하신 뒤 오대산 방한암 스님 회상에서 하안거를 성만하신 이래 50안거를 성취하셨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통도사 전계화상, 중앙종회의원, 통도사 주지(1956), 조계종 총무부장, 감찰원장(1958), 중앙종회의장(1960), 동국학원 이사장(1975), 조계종 원로의원 및 제16대 총무원장(1979), 제9대 종정(1994) 등 종단의 주요 소임을 두루 역임하시고 원적에 드실 때까지 통도사 방장으로 주석하셨습니다.
효령대군 영정을 담으려 했으나...
효령대군의 영정
효령대군 영정(孝寧大君 影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소재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5-1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은 태종과 원경황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세종의 형이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하여 늘 태종을 따라 사냥터에 다녔다고 한다.
가로 74Cm, 세로 90Cm의 효령대군의 영정은 정면을 바라보며, 왕이 평상시에 쓰는 관인 익선관(翼善冠. 翼蟬冠) 형태의 황색관모(黃色冠帽)를 쓰고 깃과 소매에 녹색의 선을 댄 홍포(紅袍)를 입고서 용과 봉황으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의자와 발을 올려 놓는 족좌대(足坐臺)는 흔히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로 비록 여러 번 옮겨 그려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기 어려우나 원본의 형태를 전하고 있다.
얼굴은 정면을 보는 관계로 각 세부가 도식적이고 미숙하게 처리되었다. 하지만, 오른 손으로 물건을 잡고 있는 자세는 조선전기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것으로 이 그림이 갖는 특이한 표현이다. 이 작품은 비록 모사된 그림이지만, 조선 전기 초상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판에서 옮김-
천수관음전 모습
천수관음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인 공양간 윗층에 건립되어 있습니다. 불기 2540(1996)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천수관음전(千手觀音殿) -노천월하(老天月下) 종정의 글씨-
관음전 법당의 모습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관세음보살님에 대해서는 관음사를 순례하면서 다루었기에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천수천안(千手千眼)에 대하여 간략이 일찍이 우리가 공부한 바 있는 《천수경강설》의 말씀을 옮겨 봅니다.
「보살님이 중생들의 여러 근기에 맞추어 교화를 하려면 수많은 손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의 관점으로 중생들을 관찰하는 데는 많은 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수천안을 꼭 천 개의 손과 눈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보살님이 여러 가지 관점에서 그 사정을 낱낱이 관찰하는 것을 千眼이라 한 것이고,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방편을 쓰시는 것을 千手라 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보살상을 보면 관세음보살상 뒤로 광배처럼 보이는 것은 천수천안을 표현한 것이고 머리에는 십이면관세음보살을 표현한 것이며, 또 사십이수(四十二手)에 각 지물(持物)이나 수인(手印)을 통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대자대비의 관세음보살을 표 현한 것입니다.
관음전에 모셔진 삼존불과 16나한상 모습
오백나한상 모습 1
오백나한상 모습 2
처음엔 관음전에 전에 없던 웬 불상과 오백나한상이 모셔져 있나 했는데 이는 기존의 연주암 영산전을 허물고 개축하고자 함에 따라 임시로 이운해 모신 것임을 알 수 있었 습니다. 세월이 흘러 중건되면 멋진 영산전에 모실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동안은 여기 서 중생들을 제접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연주암 장독대 모습
관음전에서 바라본 요사채 모습
요사채의 툇마루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종무소 모습
연주암(戀主菴) 현판
무량수(無量壽) -완당 김정희(阮堂 金正喜) 선생 글씨-
사찰 순례를 하다보면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많이 보게 됩니다. 유독 무량수(無量 壽) 글자를 많이 보았습니다. 여기서 다시 추사 선생의 글씨를 감상하니 기분이 좋았습 니다. 선생은 말년에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시었으니 천하의 절경인 연주암 에도 자주 올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글씨가 직접 방문하셔서 쓰신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선생의 글자를 집자해서 모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낙관에 완당(阮堂)이란 호를 썼는데 어느 곳에서는 승련노인(勝蓮老人)이라 한 곳도 있 습니다. 김정희 선생은 잘 알려진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외에도 원춘(元春)ㆍ예당(禮 堂)ㆍ시암(詩庵)ㆍ노과(老果)ㆍ과파(果坡)ㆍ농장인(農丈人)ㆍ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ㆍ 병과(病果)ㆍ보담재(寶覃齋)ㆍ담연재(覃硏齋)ㆍ염옹(髥翁) 등 무려 343개의 별호를 가지 고 있다 합니다.
종무소와 요사채는 한집입니다.
이 요사채는 불기 2473(1929)년에 주지 재예(在藝) 스님이 요사 12칸을 신축했다고 하였 고, 불기 2525(1981)년에 개축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주련이 엄청 많아서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나중에 하나하나 소개해 볼까 합 니다.
이 글씨는 무슨 글자일까요?
제가 관음사에서 연주암에 가면 퀴즈를 낼 것이 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낙관에 오세창(吳世昌)이라 되어 있는데, 문제는 무슨 글자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요사채 끝부분에 걸려 있는 이 글을 보면서 나름대로 읽어 보려고 애를 쓰는 글자입니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알쏭달쏭합니다.
다섯 글자 중 두 번째와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글자를 알쏭달쏭하는 것 같습니다.
"산천(山川)인가? 산수(山水)인가?" "그리고 일월가(日月佳)인가 일월주(日月主)인가?"
그래서 한자를 좀 안다는 사람은 '산수일월가(山水日月佳)'라고 소개한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ㅎㅎㅎ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에 대한 담소 -염화님 사진-
많은 사람들이 '산수일월가(山水日月佳)'라고 오인하고 오해하는 명필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이 글자는 실은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입니다.
산기일월가(山氣日夕佳)는 산 경치는 해질 무렵 저녁놀에 한껏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이 글은 남북조시대 진(晋) 말, 송(宋) 초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음주(飮 酒)>란 시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연주암의 경치가 아름다워서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도연명 선생의 한 구 절을 빌어 쓴 것 같습니다. 오세창 선생은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서화(書畵)에 능했던 분입니다.
문제의 이 글, 원작을 소개해 봅니다.
음주(飮酒) -도연명(陶淵明)-
結廬在人境 결려재인경 초가 지어 마을에 살고 있으매 此中有眞意 차중유진의 이 속에 참다운 진리 있으니
이 시는 음주(飮酒) 12수 중 한 수(首)로 궁벽한 곳에서 살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한 가한 심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은 잠(潛), 자는 원량(元亮)이며, 연명(淵明)은 호입니다. 남북조시대 진(晋) 말, 송(宋) 초의 시인이며 문장가입니다.
그는 가난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리생활을 했으나, 41세 때 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마지막 관직인 팽택현령(彭澤縣令)직을 사임 하고 귀향하고 맙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전원생활을 즐기고 술과 국화를 사랑한 시인입니다.
연주암에 여러 번 갔지만 도연명의 글귀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것이 순례의 즐거움이 아닌가 합니다. ^^
요사채는 이런 축대위에 세워진 것인데 축대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도연명 선생의 山氣日夕佳를 감상하는 것을 끝으로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가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10분이었습니다.
연주암에서 과천향교까지는 2.6km입니다.
하산은 가장 짧고 무난한 과천향교로 잡았습니다. 하산길에 염화님께서 무릎에 약간의 통증이 있었는데 오랜만의 산행길에 무리가 있었는듯 합니다.
하산 길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내려오다가 잠깐의 탁족으로 피로를 덜기도 하면서 5시 40분경 즐거운 순례길 산행의 대단원을 마쳤습니다.
과천종합청사역 근처에서 식사를 하면서 다음 4월 순례엔 동국대를 기점으로 하여 남산 벚꽃길을 걸어 보자는 의견에 따라 4월 순례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산회하엿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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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기일석가" 아닌가요?
핸드폰으로 한자 바꾸려니 힘들어서 그냥 한글로 써요. 염화님 글을보고 알았어요.
순례하는 동안 즐거웠답니다.
안쓰러웠던것은 옆지기이신 염화님 무릎이 ㅠㅠ
백우님 순례후기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_()_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 맞아요.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_(())_
山氣는 산의 경치를 말하고 日夕은 저녁노을이라고도 하고 해질 무렵으로도 새깁니다.
저도 순례하는 동안
관음사에서 연주암에 이르는거운 시간이였으며, 정성이 담긴 순례글 감사합니다. _()_
이번에 관음사와 연주암을 두루 둘러보고 정리하게 되어 의미 있는 순례가 되었습니다. _()_ _(())_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함께 하지 못하여 아쉽습니다. 다음엔 기회가 되시려나 감사합니다. _()_ _(())_
마지막 까지 대미를 장식 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져 공부 하고 갑니다.
꽃피는 4월에 남산에서 뵈어요....나무묘법연화경()()()
함께 걷고,기고, 살피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피는 4월에 뵈어요. 감사합니다. _()_ _(())_
저도 연주암을 이렇게 자세히 살피기는 처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