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요시노리 白川義則(1869 ~ 1932)〕 "윤봉길장군 中일본군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폭살"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군사 참의관 등 일본의 여러 요직을 역임한 군인으로,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일본 국왕생일 축하 행사에서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1932년 5월, 사망하였다.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왕 생일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파견하여 훙커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를 지휘하였다.
시라카와는 1932년 4월 29일에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행해진 일본왕 생일 축하 행사 당시,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의 지휘로 윤봉길이 던진 물통 폭탄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 그 밖에 상하이의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제3함대 사령장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상하이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등도 큰 부상을 입었다.
특히 일본 항복 조인식에 외부상으로 서명했던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잃었고, 노무라는 외눈이 되었다. 중상을 입은 시라카와는 무려 12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1932년 5월 26일,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을 입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의 계기가 된 이 의거 직후 김구는 상하이를 빠져나가지 못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 비서 엄항섭, 김철과 함께 미국인 장로교회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2018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함)의 집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야 했다. 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의 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