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4주예배 / 점심식사
오늘 예배는 루가복음 12:49~51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나는 불이 이미 붙어 있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12:50 내 앞에는 무서운 세례가 가로놓여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어려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그러니 내 마음이 오죽 답답하겠느냐?
12: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 아느냐? 아니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려고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언자의 선포를 종종 불이라 표현했다. 예레미야 예언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불로 상징해서 일걸었다.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나이다.(예레 20,9)” 또 집회서에서는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불이라 불렀다. “예언자 엘리야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예언자는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횃불로 상징된 엘리야 예언자의 말은 곧 하느님 말씀이다.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이 표현은 구약성경이 그렇게 부른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과 의지를 알리는 기쁜 소식(복음)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불이 세상 가운데 사람들 속에 활활 팔팔하게 타오르게 되기를 열망하셨다. “이 불이 타오른다면야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저 불꽃처럼 온 세상에 울려 퍼지고 세상 사람들이 그 복음에 감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말씀이다.
니체는, 자신의 모습을 보려면 횃불을 손에 들고 자신을 불시에 습격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횃불을 손에 들고 자신을 불시에 습격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것에 대한 사항도 육체적인 것에 대한 사항과 같은 사정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추한 모습을 잊고 있다 : 화가에 의해 비로소 그는 추한 인상을 다시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 그림에도 익숙해져 두 번째로 자신의 추한 모습을 잊어버리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 중에서
5월 예배계획 첫주는 담임목사
둘째주는 김진영목사
세째주는 담임목사 솔성수도원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