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2
이하석
그들은 녹슨 몸속에도 여전히 쇠꼬챙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깃들인 어느 곳에서든 부스럭거리며
그들은 긁고 찌른다. 흙 속, 헐어버린 건물 안,
이전해버린 공장의 빈터, 폐쇄해버린 술집의
판자 틈, 버려진 구석 어디에서나
그들은 내팽개쳐진 채, 나무든 흙이든 풀이든
바람이든 강철이든 지나가는 쥐의 발목이든 찌른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 속에 빠지면서
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
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
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
그는 침을 숨긴 채 물 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
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
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 시집 『투명한 속』
* 이하석 시인
1948년 경북 고령 출생
1971년 『현대시학』지 추천으로 등단
시집 :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우리 낯선 사람들』 『측백나무 울타리』
『금요일엔 먼데를 본다』 『녹』 『고령을 그리다』 『것들』 등.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K 시인님!
이 시는 1980년에 출판된 이하석 시인의 시집 『투명한 속』에 수록된 시입니다.
못이란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못을 통해 시대적 상처와 패배한 시민들의 고통을 내면화 시킵니다.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여 건물을 완성시키는 빛나는 금속 못이 아니라, 헐어버린 건물 안의 못, 공장의 빈터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못이지요.
근대화의 이면, 더 나아가 군사정권의 압제 아래서 시퍼렇게 멍든 자유에 대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 못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폐기물의 이미지와 미군 담배 때문에 시인은 대구 중부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일화도 있다고 김용락 시인이 이하석의 연보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에 있어서 시대적 배경과 상황이 중요한 이유는 이런 데에서 연유할 것입니다. 이 시가 단순히 문명의 개발 뒤에 오는 황폐함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며 생태주의의 시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위의 시는 1980년대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같은 시대적 아픔과 함께 생각해볼 때, 그 의미가 더 선연하게 드러나지요.
평론가 염무웅은 이하석 시인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논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하석 시인의 45년 창작생활을 관통하는 핵심적 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이성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과학도의 명징성에 준하는 관찰자의 냉정함을 나는 그의 서정시에서 보곤 한다. 강과 들, 나무와 벌레 같은 존재들과의 생태적 교감을 표현하는 작품에서도 그는 감정과잉을 억제한다. 그의 시가 구현하는 이미지의 견고성과 투명성이 때로 감성의 메마름처럼 보였던 것은 이런 자기절제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집 『천둥의 뿌리』에서는 수십 년의 인고 끝에 마침내 터뜨린 ‘거대한 울음’이자 가장 냉정하게 기록된 ‘치열한 고발’로 읽힌다. 작년 이맘때 나온 시집 『연애 間』의 몇몇 작품들, 가령 「밥」 「가창댐」 「사람들」 등이 이미 오늘의 폭발을 예고하고 있거니와, 시집 전체가 이번 『천둥의 뿌리』에서처럼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화엄적(華嚴的) 대오’를 형성하고 있는 예는 우리 시의 역사에도 드물 것이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릅니다./ 대답하면 나는 너무 명백하게 드러나버립니다./ 가창골, 송현동, 상인동, 본리동, 앞산 빨래터 계곡, 경산 코발트 광산, 칠곡 신동재와 돌고개에서/ 모든 나는/ 그렇게 죽음 앞에 세워지지요.”(「호명 1」)라고 노래한 그대로, 시인은 수많은 억울한 주검들로부터 호명 받고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몸이 되어 죽음 앞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향토사의 비극이자 민족사의 비극일 수밖에 없는 ‘현존하는 과거’와의 시적 대면이다.”
추석 명절의 유래 없는 긴 연휴도 끝나는 이 밤이 깊어갑니다.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맑은 한밤중에 홀로 언덕에 서 있노라면, 동쪽으로 도는 지구의 자전을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별들이 지구의 사물들 위로 광활한 활주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몇 분 동안의 정적 속에서 그런 생생한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언덕이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보다 멋진 전망, 혹은 바람, 혹은 고독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든, 지구와 함께 돌고 있다는 느낌만은 생생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운행의 시’라는 표현은 대단히 많이 사용되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그 희열의 서사시적 형식을 즐기기 위해서는 한밤중에 언덕에 서 있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 순간 잠에 빠져 그 모든 운행에 무관심한 대다수 문명인들과의 차이를 자각하며 가슴을 활짝 펴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별 사이를 누비며 나아가는 자신의 장중한 모습을 홀로 조용히 지켜보기도 하겠지요.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에 따르면, 한없이 넓은 하늘은 지구를 중심으로 달, 해, 기타 크고 작은 별들이 고착된 층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합니다. 각 층의 간격이 조화음정의 비례로 되어있기 때문에 천체의 운행은 신이나 육체를 벗어난 영혼에게만 들리는 미묘한 음악을 낳는다고 합니다. 토마스 하디는 이러한 설을 염두에 둔 채 ‘운행의 시’ 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운행의 시’, 참 의미 있고 아름다운 표현이지요.
이 밤, ‘운행의 시’를 보듬고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되십시오.
건승 건필 하시기를 빕니다.
牧 雲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