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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경전 명언
사람이 길(지평)을 넓힐 수 있지 길이 사람을 넓어지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종 시험에 시달린다. 대학에 오려면 수능을 치려야 하고, 취업을 하려면 토익 등 외국어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시험이 어려워도 수능이나 토익에서 만점자가 나오곤 한다. 시장은 만점자의 학습법 등을 재빨리 책으로 가공해낸다. 우리가 그 비법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공부를 해도 모두 만점을 받지 못한다. 그 길은 그들의 길이었지 나의 길이 아니다. 시험 공부에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 하지만 특정 목표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개개인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지 남의 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 없다. 아무리 비법을 말로 글로 표현한다고 해도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궁지나 한계에 몰리면 몇 가지 양상을 보인다. 나 몰라라 도망가는 도피형, 도와달라며 주위에 손 내미는 의존형,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이들의 사례를 찾는 경험 중시형, 자기 신뢰를 하면서 스스로 해결을 모색하는 창조적 판단형 등등이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널리 떠도는 말이 일류, 글로벌 기준, 경쟁력이다. 우리가 이 과제를 바람직하게 성취하려면 기도나 희망만으로 되지 않는다. 먼저 우리는 시키는 것을 마지못해 할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알아서 하려는 적극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 앉아서 손을 놓을 것이 아니라 벤치마킹(benchmarking)을 해야 한다.(한국에서 벤치마킹은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기보다는 모방, 도용에 가까운 뜻으로 남용되고 있다.) 어떤 도움은 자기 밖에서 더 잘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답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남이 100% 내가 될 수도 없다. 일류, 즉 스스로 하나의 흐름이 되려면 남에게 없는 것을 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길은 전통, 역사, 관행, 현실과 반대될 수도 있다. 이 대립에서는 고독한 자신감(self-confidence)을 가져야 한다. 일류란 자기가 나아갈 길의 기준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루쉰은 국민의 노예 정신을 질타하고 예교를 사람 잡아먹는 것으로 비판을 했다. 그런 그가 위 구절을 가장 잘 풀이했다. “OO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고향」 *OO이 무엇인지 맞추어보십시오.) 현빈이 TV 광고에서 파워스키를 타고 큰 배를 뛰어넘으며 “내가 가면 길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다보면 길이 나고 그러다 함께 가는 사람이 생기는 우리는 더 좋은 세상에 있게 될 것이다.
[能(능): 할 수 있다, 弘(홍): 넓히다, 道(도): 길(way, principle, ideal)] # 출전 : 『논어』「위령공」
과거의 잘못은 되돌릴 수 없지만, 미래에 잘못하려는 것은 아직도 쫓아가 말릴 수 있다
이 구절은 비록 논어에 있는 말이나 공자의 말씀이 아니고, 초나라의 광인(狂人) 접어(接輿)가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가면서 공자로 하여금 들어보도록 불렀던 노래 가사 중에 나오는 말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도 보인다. 봉이어! 봉이어! 너의 덕이 어찌 이리도 쇠해버렸느냐? 지난 일은 간할 수 없으나, 앞일은 추구??수 있으리라. 아서라! 아서라! 지금의 위정자는 위험천만인 것을. 이 노래를 듣고 공자는 바로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차리고) 나아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하였으나 그는 재빨리 몸을 피해버려, 그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말았다. 접여는 이인(異人)이고, 붕새는 공자를 가리킨다. 가사의 내용은 난세에 조용히 은거하지 못하고 그 위험한 정치판에 왜 나서느냐는 일종의 충고 내지는 비방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공자는 이때 자신이 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었지만 그는 말조차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피해 가버렸다. 현대감각으로는 관료가 되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것을 반드시 나쁜 일로만 보아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전원으로 물러나서 사회와 등지고 사는 것을 좋게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구태여 결신난윤(潔身亂倫)의 이론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현대인은 이웃과 더불어 사회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 중국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은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자신이 지난날 한동안 벼슬했던 일을 뉘우치면서 “이미 지나간 것은 간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미래에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다.(悟己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고 자기 나름대로의 출처(出處)의 철학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이 어떤 삶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자유에 속하고 그 자유를 아무도 말리거나 비판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공직에 임하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가짐은 반드시 청렴결백해야하고, 공명정대해야하며, 민중의 공복(公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에 있어서 출처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근거를 분명히 하는 올바른 정신이요 자세일 것이다.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혹 본의 아니게 잘못 저지른 일이나 또는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다면, 그때는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잘못을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過則勿憚改]”고 한 성현의 말씀을 지켜서 바로 개과선천해야 한다.
# 출전 : 『논어』, 「미자」
적음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않음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음을 근심한다
이 구절은 공자가 염유라는 제자에게 말한 것으로, 집안을 다스리는 가장이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 등 사회의 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 글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국민을 통치할 때에 외적인 성과주의의 추구보다 불균등한 정책의 시행으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 나타날 수 있는 상대적인 박탈감과 위화감 등 소외 현상의 치유가 더 중요함을 지적한 것이다. 즉 이 글은 국민의 수나 재산의 많고 적음이 정치의 방편은 될 수 있을지라도,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핵심적인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가난함을 추구하는 것??정치의 요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다수 국민들은 가난함보다 부유함을 선호한다. 이 때문에 부유함의 추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정당한 방법으로 형성된 부유함이 아닐 경우이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사회 구조와, 정당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가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국민들은 희망보다 절망에 친숙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는 경우가 증가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사회적 강자에 대한 혜택이 증가하는 것과 반비례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제한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는 약육강식의 동물적인 법칙이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여겨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사회에서는 균등한 인간 관계에 의한 평화로운 문화가 형성되기 어렵다. 공자는 이러한 사회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지도자란 국민이 균등한 의식을 공유하며 각자의 역량에 맞는 일을 하면서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 주제는 이와 같은 내용을 함유하고 있기에 역사적으로 균등하면서도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끊임없이 추구되었다. 따라서 이 주제는 무한한 경쟁력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으로 인해 경쟁력을 갖춘 유능한 소수와 경쟁의 대열에서 비켜설 수밖에 없는 다수의 소외층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 구조가 팽배한 오늘날의 문제를 치유하는 면에도 여전히 의미 있게 적용될 수 있다.
[患(환) : 근심. 寡(과) : 적음.] # 출전 :『논어』「계씨」
무릇 알려지는 사람은 겉으로는 참한 모습을 취하면서도 그 겉모습과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
자장과 스승 공자가 문답하였다. “선비가 어떻게 해야 달(達)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네가 말하는 바의 달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알리지는[聞]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알려지는 것이지 달한 것은 아니다. 무릇 달했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곧고 정의로우며, 남의 말이나 안색을 살펴서 이해하고, 언제나 양보하려는 마음을 가지니,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달하게 되는 것이다. 무릇 알려진다는 것은 겉모습은 참하게 꾸미되 그 겉모습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만, 그런 허위성을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으니,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공자는 제자 자장에게 허명(虛名)을 경계하고, 실질적이고 공손한 생활태도를 권장하고 ?獵? 그러니까 문(聞)은 헛되게 나는 명성을 뜻하고, 달(達)은 언행에 신의가 있고 겸손해서 어디서나 통(通)한다는 뜻이다. 마치 말에 충실함과 신의가 있고, 행실에 돈독함과 존경이 있으면 비록 미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도 통한다고 할 때의 통한다는 말과 상통하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알려진 명성만큼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 대다수가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또는 선량하게 치장을 하고 다니지만 그 행실은 정의롭지도 못하고, 상대방을 이해할 줄도 모르고, 남에게 베풀 줄도 모르고, 양보를 하거나 관용을 베풀 줄은 더더욱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누구보다도 더 높은 특별한 자리에 있고,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누구보다도 더 젊잖고, 어디서든지 대접을 받아야 하고, 지방에서는 유지의 행세를 해야 하고, 나아가 덕망 있는 지도자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이런 위선자를 논어에서는 향원(鄕愿)이라 하였다. 향원이 결코 살인 등의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공자가 그런 부류를 무척이나 증오하고 경계하였던 것은 그들이 바로 덕(德)을 어지럽히는 작용을 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못난 놈이 바로 약한 자에게 군림하려는 자이다. 약한 자를 구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자는 바로 달야자(達也者)이다. 향원이 덕을 해친다면 문야자(聞也者)는 곧 정의를 해친다. 그래서 중국 역사에서는 색인행위(色仁行違)하고 선덕후적(先德後賊)하는 왕망(王莽) 따위를 경계하고 있다.
[聞 : 듣다, 알려지다. 色 : 얼굴빛, 외모. 違(위) : 어기다, 거스리다.] # 출전 : 『논어』「안연」
진실로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가지 못할 먼 곳이 어디 있겠는가?
캐플릿가의 쥴리엣을 사랑하게 된 로미오는, 그 원수 집안의 높은 담장을 뛰어넘어 그녀를 만나러 간다. 그것은 자칫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는 감행이었다. 친구들은 사랑에 빠져 위험한 일을 감행하는 로미오를 비웃으며 놀리지만, 로미오는 오히려 그런 친구들을 안쓰러워하며 독백한다. “사랑의 상처를 입어본 적 없는 자가 쉽게 남의 상처를 비웃는 법이지.” 『논어』의 위 구절은 “아름다운 자두꽃이 봄바람에 휘날리는구나. 어찌 그대를 그리워하지 않겠냐만 그대의 집이 멀고도 멀구나.[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라는 지금은 일실된 시 구절에 대한 공자의 평이다. 공자도 사랑을 해보았을까? 근엄한 공자가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식의 현대 젊은이들과 같은 발랄한 사랑을 했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어찌 그에게도 봄바람에도 설레는 청춘의 떨림과 열정이 없었겠는가. 공자의 사랑은 ‘움직이는 사랑’이 아니라 가지 못할 곳이 없을 정도로 간절한 사랑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태도는 사랑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과 삶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을 가진 그였다.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知不可而爲之者與]”이라고 어느 문지기가 자로에게 공자를 조롱하듯 평했지만, 오히려 그 조롱 속에 공자의 진면목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불가능함을 안다면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처신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는, 혹은 하고자 하는 열정이 어리석음으로 폄하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를 물어야 하는지 모른다. 진정으로 간절히 원한다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을 리야 있겠는가. 혹 불가능하거나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모르거나 쉽게 비관하여 포기한 것은 아니었는가? 혹은 할 수 없거나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엄살 피우거나 해보지도 않고서 회피하고 싶은 나약함은 아니었는가? 공자를 조롱한 문지기에게 로미오의 독백을 빌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진정한 갈망을 가져보지 못한 자가 쉽게 남의 갈망을 헛되다고 비웃는 법이지.” 공자의 말 속에 담긴, 어떤 사람에 대한 간절함, 어떤 일에 대한 도저한 갈망, 그것을 이 현실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과 지혜, 그 투혼은 한물간 시대착오적 어리석음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혹 공자에게도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달려가고 싶은, 그리움에 사무치도록 사모한 사람이 있지는 않았을까? 소인과 여자는 다루기가 어렵다고 말한 공자도 사랑의 상처에 눈물 흘린 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思(사) : 생각, 遠(원) : 멀다.] # 출전 : 『논어』「자한」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있어서 정사에 베푼다는 것도 정치를 하는 것이다
최근까지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모습은 개인적 성향과 소양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같이 자기 주변의 인물들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가까운 인척의 관리 소홀로 빚어진 일련의 문제들은 제가(齊家)가 나라를 다스리고 경영하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정을 원만하게 이끄는 것도 정치라는 공자의 통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맞벌이부부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현재의 상황을 감안해 본다고 하더라도 자녀 교육은 어머니의 몫으로 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선현의 일화와 무관하지 않다. 과거 맹자의 어머니가 그러했고, 퇴계와 율곡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가정을 돌본다는 성역할은 부부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으로 자연스럽게 유비되었다. 하지만, 제가와 치국의 유기적인 결속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과거 유학자들이 단지 자녀교육을 어머니의 몫으로만 치부하였을까? 퇴계 이황과 서애 유성룡 같은 대학자들도 바쁜 일과를 제쳐두고 자녀와 후손들의 교육에 세심하게 힘썼는가 하면, 다산 정약용은 오랜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면서도 자녀들을 위해 학업진도표를 꼼꼼히 작성하면서 그 진행여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사실 유학의 취약점 가운데 하나는 전통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가부장문화의 보수적 측면을 연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학이 가지는 보수적 권위적 이미지의 정점에는 ‘아버지’가 존재한다. 그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아버지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고, 유행이 되어버린 양성주의적 시각으로 그 ‘아버지’를 애써 부인하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출발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어볼 때, 가정의 주체로서 부모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그리고 그 곳에 우리들의 아버지가 있다.
[于(우) : ~에게, 於와 같은 의미. 施(시) : 베풀다, 시행하다.] # 출전 : 『논어』「위정」
공자는 이익과 천명과 인(仁)을 드물게 말했다
『논어』에는 어느 하나로 단정지어 해석할 수 없는 난해한 구절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위의 문장은 보통 주자의 해석에 따라 “공자는 이익[利]와 천명[命]과 인(仁)을 드물게 말했다”로 풀이한다. 즉 ‘이익’을 자주 말하면 ‘의리[義]’를 잃게 되고, 천명을 자주 말하면 하늘을 모욕하는 결과가 되며, ‘인’을 자주 말하면 실천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되어 드물게 말했다고 설명하였다. 물론 어떻게 구두를 끊어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공자가 ‘이익’을 드물게 말했다는 점이다. 유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의리’와 ‘이익’을 크게 구별하여 왔다. 물론 처음부터 이익을 배척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유가경전의 하나인 『서경』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세 가지 일로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맹자』에서 의리와 이익을 상대적인 것으로 본 이래 이익은 부정적 개념으로 인식되었으며, 한대 동중서가 공리(功利)의 추구를 적극적으로 배척함으로써 부정적인 것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송대 도학자들은 이익을 천리(天理)의 상대적 개념인 인욕(人欲)으로 보아 대립구도를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관념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인욕의 추구를 죄악시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사회가 의욕과 활력을 잃고 침체하게 되는 역기능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분명 중세의 사상적 질곡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조선 후기에 이르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욕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대두되는데, 중세적 관념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경전에 대한 재해석과정에서 모색되어왔다. 성호 이익은 이익을 공리(公利)와 연결시켜 공리와 사리를 엄격히 구별하면서, 의리와 조화를 이루는 이익이야말로 공리이며,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곧 선(善)이 된다고 하였다. 즉 의리의 실현방법으로서의 공리의 추구를 말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경전은 같은 구절이라도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는 매력이 있다. 각박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오늘의 세태에서 이익의 맹목적 추구보다는 의리에 부합되는지 먼저 생각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罕(한) : 드물다, 與 : ~과(연결조사), 주다.] # 출전 : 『논어』「자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은 흔히 지조 있는 사람에 대한 예찬으로 사용됩니다. 지조(志操)란 올곧은 뜻을 굳게 잡아 흔들리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푸르름을 간직한 소나무를 통해 변치 않는 지조를 빗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의 이 말에는 조급증을 경계하는 말도 숨어 있습니다. 생명체 가운데 시들지 않는 것이란 없습니다. 소나무나 잣나무도 한겨울에는 시듭니다. 다만 다른 나무의 잎사귀들이 모두 낙엽이 되어 땅에 뒹구는 그때에도 여전히 덜 시들은 상태에서 버텨내고 있을 뿐입니다. 한겨울의 찬바람을 버텨내려면 얼마나 많은 인내와 고통이 따를지 상상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너무 조급해합니다. 불 같이 일어났다가 썰물 빠지듯 또 그렇게 식어버리기 일쑤입니다. 패스트푸드에 익숙해져 있듯이 모든 일에 있어 성급하게 처리하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정말 훌륭한 것은 더디게 만들어지고 또한 더디게 잊혀집니다.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잊혀지는 것들은 인내와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찬바람을 맞으며 푸르름을 간직하기 위해 소나무가 견뎌야 할 고통을 잊지 않아야 공자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이러한 인내야말로 진정한 지조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지조 있는 사람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은 크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약해지고 흔들리는 것은 인심(人心)의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지조는 과연 대나무가 휘다 못해 부러지는 것처럼 끝내 지키지 못하면 부러지고마는 그런 성질의 것일까요! 공자는 견리사의(見利思義)하고, 견위수명(見危授命)하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익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생각해야 하며, 위급한 ?鑽꼭?만났을 때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견리사의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겠지만 견위수명은 나는 모르겠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높은 경지의 도덕심만을 지조로 본다든가, 변치 않는 절개로 본다면, 존경해 마지않는 지조 높은 사람이 된다거나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평생 어려울 것입니다. 조금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 주변에는 참으로 많은 지조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회에는 지향해야 할 공동선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랑과 평화라고 해도 좋고,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도덕성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급해하거나 성급하지 않습니다. 멀리 보는 안목을 가지고, 늘 함께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꿋꿋하게 인내하고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조입니다.
[寒(한): 추움, 추위. 조(彫): 시듦] # 출전: 『논어』「자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
공자 서거후 여러 제자들에 의해 편찬된 논어에는 중복된 구절들도 있다. 예를 들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거나, 자기 자리가 아니면 나서지 말라는 등 반복된 어구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기록은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공자가 평소 즐겨 쓰거나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거듭 수록했을 것이다. 그 중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실제로 담당하고 있는 자리에 있지 않는다면 이러쿵 저러쿵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을 구제하려는 열망으로 가득찼던 공자와 같은 성인이 민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전국을 돌면서 도덕과 예의를 바탕으로 하는 덕치(德治)의 실현을 역설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한 공자였지만 위의 구절처럼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는다면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권고 또한 빠트리지 않았다. 그 정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혼선만을 불러오고, 쓸데없는 참견으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애정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칫 지나치면 자리에 연??構킬?자아도취에 빠지게 마련이다. 권력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점차 추한 모습으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상황에 익숙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더 넓히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물러서야 할 때 물러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공자를 성인으로 평가하는 맹자의 기준 역시 나설 때 나서고 물러설 때 물러서는 유연하면서도 단호한 결단에서 찾고 있다. 적실한 상황판단과 책임있는 역할수행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 힘을 실어주고 다같이 발전하는 계기를 가져온다. 사거리에 집 못짓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 사람 저사람 간섭을 듣다보면 오히려 일이 안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불필요한 참견을 자제하면서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 이것이 나아감과 물러남의 내공을 키워가는 한 방법일 것이다.
[位 : 위치, 지위. 謀(모) : 꾀하다, 논의하다.] # 출전 : 『논어』「태백」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바람에 따라 눕게 된다
노나라 대부인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공자에게 물었다. “세태가 혼란해져서 난폭한 사람이 많으니, 일벌백계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을 처벌하여 백성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백성을 교화하는 것은 임금의 바른 정치에 달려 있으니, 어찌 형벌만을 강조하는가? 그대가 선한 정치를 하면 백성들도 자연히 선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백성들은 풀과 같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바람에 따라 엎드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말에서 ‘부국’이 한 나라의 경제력을 가리킨다면, ‘강병’은 군사력을 가리킨다. 이러한 경?┠째?군사력의 조화를 이룸으로써 국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이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법과 힘에 의한 강압적인 방법이 아니라 설득과 이해를 통한 감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공자이다. 이것이 바로 소프트파워(Soft Power)인 것이다. 힘과 법이 하드파워(Hard Power)라고 전제했을 때, 소프트파워의 원천은 리더의 솔선수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침을 가진 수 만 마리의 꿀벌을 여왕벌 한 마리가 거느릴 수 있는 것은 여왕벌이 독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침이 강력한 힘을 상징한다면 그 힘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포용력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말레이시아 밀림에 서식하는 반딧불이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공중에 날아올라 장관을 이루는데, 놀라운 것은 처음에는 각기 자신의 리듬으로 반짝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모두 같은 리듬으로 반짝인다고 한다. 이것을 동조현상(同調現象)이라고 하는데, 공자는 바로 이러한 동조현상을 바람과 풀로 비유한 듯하다. 위정자의 솔선수범과 포용력, 바로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의 원천이 아닐까?
[偃(언)]: 쓰러지다. 넘어지다. 엎드리다. # 출전: 『논어』「안연」
오늘날 효는 물질적인 봉양만을 말한다. 개와 말도 먹여주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
제자 자유(子游)가 효에 대해서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기를,“오늘날 효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봉양만을 말하는데 개와 말과 같은 동물들도 모두 사람이 길러주고 있으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 우리민족은 ‘동방예의지국’이고 ‘백의민족’이며 효를 중시하는 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살면서 느끼는 것은 이러한 구호가 모두 우리의 희망사항을 담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만 든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점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갈수록 우리 사회가 혼란해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더구나 물질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가치는 물질로 환산되고 있으며, 심지어 사랑조차도 돈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부모에??용돈을 드리고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것만을 효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공자의 말처럼 물질적 봉양만을 효도라고 한다면 애완동물을 보살펴주고 먹이를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물질적 가치는 물질이 고갈되면 끝이 나지만 정신적 가치는 무궁하여 끝이 없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는 마땅히 무궁한 정신적 가치를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너무 가까운 나머지 자칫 소홀하기 쉬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인간의 마지막 사랑이 만나는 접점이다. 숭고하고 고귀한 사랑의 가치는 한 순간도 게으르지 않고 노력하는 가운데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랑은 물질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더욱 빛나는 법이다.
[游(유) : 놀다] # 출전 : 『논어』 「위정」
공자가 냇가에서 말했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주야로 그침이 없도다”
정원이 아버지에게 말한다. “먼저 전원을 켜고 스위치를 TV쪽으로 옮긴 다음 채널을 4에 맞추세요!” 아무리 설명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 결국 짜증이 난 정원은 방을 나가 숨을 고른 다음 백지를 꺼내 메모를 시작한다. ‘1. 먼저 전원을 켠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했다. 사람의 죽음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할 수도 있구나. 사람의 슬픔이 이처럼 편안히 받아들여질 수도 있네.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구나. 아마도 이런 감상 때문에 이 영화가 애호하는 영화 목록에 들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 전체를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특히 어린 시절엔 자기중심의 세상 안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보면서 살기가 십상이다. 지구는 나를 위해 자전과 공전을 하는 것이라는 허풍까지도 내심 품고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없으면 영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던 동아리와 조직, 심지어 가정에서 조차 나의 부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함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그래 세상은 흘러가게 되어 있는 거야. 스스로 위로하며 상황을 받아들이면 좀 더 성장한 것일까. 공자는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아주 작은 곳에서 발원한 물은 계곡을 흐르고 때론 폭포수로 떨어지기도 하며 평원이나 도시를 관통하기도 하면서 때와 장소에 맞는 흐름을 흐른다. 이런 물의 유연함이 바로 지혜로운 자의 핵심 덕목일 터이다. 나이를 더해 갈수록 한 해는 그만큼 더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그저 소비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쌓인다는 자각도 생긴다. 한?천?멈춤이 없는 흐름의 공간 안에서 멀미 내지 않고 잘 지내려면, 그 흐름에 맞는 나의 운동이 필요하다. 생각도 몸도 흘러가는 시간을 의식하면서 그에 어울릴 수 있도록 말이다.
[逝(서) : 가다. 지나가다. 죽다. 舍(사) : 머물다. 집.] # 출전: 『논어』 「자한편」
반드시 일을 하되 기필하지 말고, 마음속에 잊지도 말고, 조장(助長)하지도 말라
공손추가 물었다. “선생님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나는 말을 알며,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여기에서 ‘말을 안다(知言)’는 것은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안다는 뜻이요, 그 말의 시비득실(是非得失)을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공손추도 ‘말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했다. 그러나 ‘호연지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공손추가 물었다. “호연지기란 무엇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굳센 기운으로서 도(道)와 의(義)에 짝하는 기운이다. 이것은 의가 모여 생기는 기운이다. 행실이 하나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면 호연지기가 결핍된다.” 한편 맹자는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으로서 “반드시 일삼음이 있되 기필하지 말고, 마음속에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고 주장한다. ‘일삼음이 있다’는 것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과를 미리 기필(期必)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이번 시험에 반드시 합격하여, ○○이 되고 말겠어!” 그런데 이렇게 기필하면 집착이 생기게 되고, 집착은 결국 일을 그르치게 만든다. 그러나 “기필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그 일을 잊어버리고 방치하곤 한다. 따라서 맹자는 다시 “마음속에 잊지도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잊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조장’ 하는 경우가 많다. ‘조장’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자라남을 돕는다’는 말이지만, 이것은 ‘순리에 어긋나게 억지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농사꾼이 밭의 싹이 빨리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잘 자라나도록 돕고자 한 뼘씩 당겨 뽑았다고 한다. 맹자는 이것이 ‘조장’이라고 했다. 맹자는 “조장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롭다.”고 했다.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꾸준히 노력하되, 집착하지도 않고 망각하지도 않는 ‘중용’이 긴요하다는 것이 맹자 가르침의 핵심인 것이다.
〔事(사) : 일, 일삼다. 正(정) : 바르다, 기필하다.〕 # 출전 : 『맹자』 「공손추 상편」
정치술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형벌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은 없게 된다
정치술이란 법제나 금령 등 제도적인 장치를 말한다. 다스림은 형벌을 가하여 백성들의 행동을 통일시키는 것이다. 정치란 국가라고 하는 공동생활의 틀 속에서 단순히 개개인의 풍습이나 도덕 등의 자율적인 규범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질서에 대해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법제나 금령 등 제도적인 장치 등을 동원하여 유지시키는 작용이다. 또한 정치를 사회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항쟁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스스로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활동을 정치의 본질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정치를 함에 있어 오로지 제도적 장치와 형벌에만 의존하는 경우, 정치는 기만으로 흐르기 쉽다. 특히 정치와 관련된 비자금 사건, 각종 로비의혹, 탈세, 불법증여 등 심각한 사건들이 정치적 수법을 통한 해결방법으로 어물쩡 넘어가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수법으로 정치를 하게 되면 백성들 역시 정치에 대해 전혀 신뢰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를 따르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며, 결국은 자기 욕심을 차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면서도 형벌에서 벗어날 궁리만 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설사 법에 저촉되어 형벌을 받게 되더라도 그 형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고, 더 이상 스스로의 행위에 도덕적 기준을 세워 행동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성폭행 인사가 국정을 논의하고, 경제사범이 활개를 치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德으로 인도하고 禮로써 다스려 국민 모두가 염치를 알고 善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신명나는 정치의 구현이 절실한 때이다.
[政(정) : 법제, 금령, 정치술. 齊(제) : 인도해도 따르지 않는 자를 형벌을 가하여 통일시키는 것.] # 출전 : 『논어』「위정」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견자와 함께 하리라. 광자는 진취적이며,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
공자는 참된 인재상으로 중정(中正)한 도(道) 즉 대도(大道)를 실천하는 사람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런 인재와 함께 할 수 없다면, 그 차선책으로 반드시 광자(狂者)와 견자(狷者)와 더불어 함께하고자 하였다. 광자는 뜻이 원대하고 지향하는 바가 높아 거리낌이 없고 진취적이지만, 행동이 말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다소 빙퉁거리는 사람이다. 반면에 견자는 행동이 분명하고 절조가 있어서 매우 청렴한 사람으로 함부로 행동하거나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으나, 지혜롭지 못하고 고집이 세어 보수적인 면이 있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중도를 행하는 참된 선비란 공자가 제시한 가장 이상적인 인재상 즉 리더모델이다. 그런데 광자나 견자는 한쪽에 치우쳐 지나치고 모자남이 있어서 중도를 행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의미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광자나 견자는 수양과 교육을 통해 크고 지나침을 잘 격려하고 인도하여 강화하도록 하고, 모자라고 부족한 역량을 보완함으로써 리더로 변화 발전할 수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07년 벽두 사회의 여러 지도계층이 쏟아놓은 신년사를 살펴보면, 이미 예년의 경우처럼 의례적인 덕담이나 격려성 발언은 거의 없다. 이제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창조적 발상과 혁신’을 기치로 내거는 도전적이고 공격적이며 강도 높은 독려가 큰 흐름이 되고 있다. 지금의 리더는 중도(中道)의 핵심가치, 광(狂)과 같은 적극성과 높은 전망, 그리고 견(狷)과 같은 견고한 의지를 재조명하고, 조화와 절충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때이다. 중행리더십을 지향하는 리더라면 조직의 성과향상과 구성원간의 올바른 소통과 역량강화를 위해 ‘최적(optimal)의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狂(광) : 뜻이 원대하고 높다. 狷(견) : 고집스럽다. 지혜는 없으나 뜻이 굳다.] # 출전 : 『논어』 「자로」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보다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들의 화합보다 못하다
옛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제후국 간의 생존경쟁의 시대였다. 경쟁은 나라들 사이에 필연적인 전쟁을 유발했으며, 여기에서 이기는 방법은 통치자들의 큰 관심거리였다. 위의 문장은 맹자의 말로서 당시의 이러한 관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전쟁은 계속된다. 그리고 전쟁은 공격과 방어로 이루어진다. 맹자는 큰 성곽을 공격하는 것을 예로 들며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 했다. 하늘의 때를 얻고도 성을 점령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수비측의 성곽이 높고 무기와 장비, 보급이 좋지만 적에게 점령당하기??한다. 대개 이 경우는 내부 반란의 결과라고 했다. 우리는 고구려가 망할 때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그 아우들의 알력이 그 원인이 되었던 것에서 역사적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맹자는 제일 중요한 것이 인화(人和)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당연한 것 같지만, 맹자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점을 쳐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이 어떤지를 묻고, 언제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지 등을 물어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운명이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믿음에 바탕한 것이라서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날의 선거를 앞두고 선친의 묘소를 옮기는 일이 이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맹자는 운명보다 현실적인 환경, 즉 땅의 유리함을 강조했다. 전투장비, 보급 등과 같은 여건은 전쟁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인간들의 마음이었다. 이를 화합시키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결국 인간들의 노력 여부에 달려있다는 의미이다. 주어진 운명과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사람들의 단합된 노력이다. 사실 정치가 사람들을 이러저리 찢어놓으면, 그 나라가 제대로 갈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오늘날 국가간의 무한경쟁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진리가 아닐까!
[如(여) : 같음. 和(화) : 화합, 온화함.] # 출전 : 『맹자』「공손추 하」
비유하자면 산을 만드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 이루지 못하고 그치는 것도 내가 그치는 것이다
“한번쯤이야, 뭐.” “오늘 하루 하지 않는다고 무슨 대수냐?” 우리가 일상에서 게으름을 피울 때 쉽게 내뱉는 변명들이다. 그러나 그 한 마디들이 모여 끝내 인생의 향방을 가른다. 춤을 업으로 하는 이들 사이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연습을 하루 안 하면 자신이 알고, 이틀 안 하면 선생님이 알고, 사흘 안 하면 관객이 안다.” 춤꾼에게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말이다. 춤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빼어난 춤꾼의 몸은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을 뿜어낸다. 그 우아함은 보는 이의 넋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오죽했으면 다산 정약용조차 춤추는 미인에게 홀린 듯 시 한 편을 남기고 있을까. 우리나라에 젊고 뛰어난 춤꾼이 많다. 그 중에서도 금방 떠오르는 이가 김용걸과 김주원이다. 김용걸은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출?탔막?동양인으로선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 오페라발레단에 입성한 솔리스트다. 김주원은 2006년 제14회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무용수상을 받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다. 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그들은 배우고 익히되 한 번 배운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열 번 백 번, 아니 천 번에 걸쳐 익히고 또 익힌다. 논어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를 그들만큼 실천하는 이들도 드물다. 한마디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익히고 또 익힌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위력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도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실패와 좌절을 절대로 ‘네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무대에서 넘어지는 순간 자신들이 마지막 한 삼태기를 더 나르지 않았음을 겸허히 발견한다. 사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마지막’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결과적으로 그것이 마지막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왕 할 바엔 “오늘 한번쯤이야”라는 유혹을 물리치고, ‘한 번 더’를 외치자. 언제가 마지막일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譬(비) : 비유하다. 簣(궤) : 삼태기] # 출전: 『논어』「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