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8호
나는 최첨단 인공지능 로봇개미이다. 겉모습은 진짜 개미와 비슷하다.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이곳에 왔다. 나는 나뭇가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더듬이를 나무에 꽂으려던 순간이었다.
“이게 뭐냐?”
내 얼굴에 물이 뿌려졌다. 전방 카메라가 흐릿해졌다. 나는 중심을 잃고 나무에서 떨어졌다.
“푸하하, 너도 첫 비행이라 서툴구나.”
개미 한 마리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일어서다가 다시 쓰러졌다.
“아까 그 물은 뭐지?”
“어머나! 개미산 맞은 거야?”
나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개미를 스캔했다. 가슴에 내장된 메모리 칩에서 개미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곰개미의 일종인 공주개미, 수개미와 결혼 비행으로 짝짓기가 끝나면 여왕개미가 된다. 할 일을 마친 수개미는 죽는다.’
공주개미가 더듬이로 내 등을 두드렸다.
“일본왕개미한테는 왜 간 거니?”
공주개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난 곰솔 나무한테…….”
“이거 곰솔 나무 아닌데.”
곰솔 나무가 아니라고? 지피에스의 위치대로 날아왔는데 이상했다.
“곰솔 나무 아닌 게 확실한가?”
“곰숲에서 곰솔 나무 모르는 동물도 있어? 육백 년도 넘게 저기 서 있었어.”
공주개미가 언덕 위를 가리켰다. 언덕에 큰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학이 날갯짓해서 날아갈 것 같은 모습이다. 나는 지피에스를 켰다. 작동이 되지 않았다. 렌즈에 개미산이 들어가면서 메모리 칩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언덕에 같이 가자.”
공주개미만 따라가면 곰솔 나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주개미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난 자유를 즐기고 싶어. 방해하지 마.”
공주개미가 파닥 날아올랐다. 풀줄기 끝에 앉는가 싶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앗, 공주 체면이 말이 아니네.”
공주개미가 뒤뚱거리며 일어났다. 나를 힐끗 보았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닌데, 곰솔 나무에 왜 가니?”
“임무가 있다.”
나는 불퉁하게 대답하고 렌즈를 점검했다.
“눈치를 챘겠지만 난 공주개미야, 그냥 공주라고 불러. 내가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같이 간다고 착각하지는 마. 따라 와!”
공주는 제 말만 하고 날았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공주를 뒤쫓았다. 하늘 위에서 곰숲을 내려다보았다. 온통 초록색이 펼쳐졌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고 기온도 적당하게 감지되었다.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프로그램에 없던 낯선 감정이다.
어디선가 공주개미와 수개미 떼들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공주가 쏜살같이 땅으로 내려갔다.
“무슨 일인가?”
“결혼 비행하는 개미들이야. 난 오늘 결혼비행으로 내일이면 여왕개미가 돼. 나의 소임이지. 하지만 오늘은 공주로 지내고 싶어.”
이미 알고 있던 정보였다. 그게 어쨌다는 건지.
“이름이 뭐야?”
“A8호. 난 너희 개미들하고는 달라.”
“그래, 너 곰개미 아닌 거 알아. 다른 수개미지?”
공주는 내가 로봇개미라는 것을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배고파서 더 이상 못 가겠어. 뭐라도 먹자.”
공주가 벌떡 일어나 풀밭으로 날았다. 노란색 꽃밭에 멈췄다. 초록색 줄기 끝에 노란색 꽃잎이 네 장 달린 꽃이 있었다.
“와, 있다 있어!”
공주가 바닥에 떨어진 새까만 씨앗을 집어 들고 소리쳤다.
“나 원래 이런 일은 안 해. 일개미들이 다 해줬거든.”
공주가 검은색 씨앗을 내밀었다.
“이런 거 안 먹는다.”
“애기똥풀 씨앗을 안 먹는다고? 엄청 쫀득하고 맛있는데.”
공주가 눈을 끔벅이며 쳐다보았다. 일개미들이 줄지어 왔다. 애기똥풀 씨앗을 하나씩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저 개미들은 왜 안 먹고 들고 가는 거지?”
“씨앗에 붙은 요 밥풀 같은 게 영양 덩어리거든. 이걸 떼어 버리면 금방 마르고 영양가도 없어져.”
공주는 하얀 젤리 같은 것만 똑 떼어먹고 씨는 바닥에 버렸다.
“바보 같은 짓이다. 혼자서 먹고 가면 되지 않나?”
“다른 식구들과 나눠 먹으려고 그러지. 그리고 개미들 때문에 애기똥풀 씨앗을 멀리 퍼트릴 수 있어. 서로 공생관계인 셈이지.”
공생관계? 뭔지는 몰라도 귀찮은 일 같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씨앗을 발로 툭툭 찼다. 공주가 애기똥풀 씨앗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곰솔 나무가 요즘 잎이 누렇게 되고 이상하다고 하던데. 초록색 조끼 입은 사람들이 와서 막 살피고.”
벌써 작전이 시작되었나? 빨리 곰솔 나무로 가야 하는데 공주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만 먹고 가는 게 어때?”
“이걸 어떻게 참아. 조금만 더.”
공주는 입을 오물거리며 엉덩이까지 흔들어 댔다.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언덕만 똑바로 보고 날아가면 찾을 수 있겠지. 나는 발을 내디뎠다.
“조심해!”
공주가 소리쳤다. 그 순간 발이 아래로 쑥 빠졌다. 발을 빼려고 할수록 점점 빨려들었다.
“명주잠자리 애벌레의 덫이야. 움직이지 마!”
모래가 위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밑에서 뭔가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점점 힘이 빠졌다. 모래가 머리까지 찼다. 가슴이 조이듯 답답해 왔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았다. 공주였다. 공주에게 얼핏 이상한 냄새가 났고, 곰개미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개미들이 모래를 파냈다. 줄처럼 하나로 이어진 개미들에게 이끌려 빠져나왔다.
“휴, 살았다.”
공주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다른 개미들은 사라졌다. 나는 입속에 들어간 모래를 뱉었다.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개미산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에도 이상이 생긴 것일까? 입속에 들어간 모래처럼 찜찜했다.
“큰일 날 뻔했어.”
공주가 더듬이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 혼자서도 나올 수 있었어.”
“그냥 고맙다고 하면 안 돼? 위험하지만 다들 도왔어.”
공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도움 필요 없어. 나도 너희를 도울 수 없고.”
“우린 아무 조건 없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 이 숲에 사는 생물들은 다 그래.”
“난, 약해 빠진 개미들과 달라!”
공주를 뒤로하고 씩씩대며 걸었다. 처음부터 제멋대로인 공주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었다. 나에겐 주어진 임무가 있다. 개미들 어떻게 되든지 신경 쓰지 말자.
무작정 걷다 보니 멀리 보이던 곰솔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지피에스를 켰다. 여전히 작동되지 않았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가슴에서 열이 났다. 발에 걸리는 돌을 힘껏 걷어찼다.
“아얏!”
나는 발을 움켜잡고 풀밭에 주저앉았다. 낯선 감정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혼란스러웠다. 바람결에 풀냄새, 흙냄새가 코로 밀고 들어왔다. 사방에 풀과 나무가 가득했다. 내 몸속의 모든 회로가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난 어떤 존재일까?”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이런 감정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내가 태어난 곳은 차갑고 컴컴한 창고였다. 겉모습은 개미지만 진짜 개미는 아닌 나. 곰숲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개미이다.
“나도 곰개미들처럼 살 수는 없는 걸까?”
곰개미들과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가슴이 찌릿했다. 한번쯤 함께 해도 괜찮지 않을까? 불쑥 용기가 났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뒤돌아서 날았다.
공주가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공주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정체도 말해야 하고. 공주가 알고 나면 실망하겠지.
“아직 안 갔어?”
공주가 입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실……난 로봇개미다.”
“장난칠 기분 아니야.”
공주가 타박타박 걸어갔다. 나는 공주 앞을 가로막았다. 내 가슴에 공주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진짜 개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로봇이라고.”
공주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뺐다. 나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우리랑 조금 다르다고만 생각했는데.”
공주가 신기해하며 다시 다가왔다. 내 얼굴과 더듬이를 만지작댔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쩐지, 이상한 게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내가 눈썰미가 좋아서 진즉에 눈치챘다니까.”
나는 공주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내가 여기 온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임무는 곰솔 나무를 없애는 거야.”
내 배 주머니에 곰솔 나무를 없앨 치명적인 독이 들어있다. 더듬이를 나무에 꽂고 독을 넣게 되어 있었다. 연구소에 이런 로봇개미가 수백 마리 있다.
“뭐어, 우리한테 곰솔 나무를 왜 빼앗으려는 건데?”
“여기에 최첨단 산업단지를 만들 계획이야. 하지만 곰솔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그럴 수 없었어.”
“곰숲이 없어진다는 거야?”
공주가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내 머리가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나도 너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말은 내뱉었지만 곰숲을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우리를 도와줘.”
공주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 손과는 다르게 따뜻했다. 개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배터리가 충전된 것처럼 힘이 솟았다. 우리는 곰솔 나무로 날았다.
휘이이잉. 날갯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로봇개미들이었다. 곰솔 나무 주변이 먹구름이 뒤덮인 듯 까맸다.
“개미들이 올 때가 됐는데?”
공주가 경보 페로몬을 바람으로 날려 보냈다. 개미들이 냄새를 맡고 올 것이라고 했다. 나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개미들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공주 턱이 덜덜 떨렸다. 나도 두려움이란 감정이 일었다. 곰솔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곰숲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나무 주변을 맴돌던 로봇개미들이 곰솔 나무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아직 개미들이 오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공주개미에게 조금만 더 빨리 알렸더라면. 후회되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공주가 더듬이로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봐.”
개미들이 몰려와 나무 위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었다. 나도 로봇개미들을 향해 날아올랐다. 개미들과 로봇개미들이 섞여 나무에 검은 옷을 입혀놓은 것 같았다. 로봇개미는 강한 턱으로 개미를 두 동강 냈다. 개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역시 로봇개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큰일이야, 독을 집어넣으려고 해.”
나무에 침을 꽂으려는 로봇개미가 보였다. 나는 로봇개미를 힘껏 들이박았다. 로봇개미와 함께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다시 일어서려고 하다가 쓰러졌다. 눈앞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몸도 점점 느려졌다. 카메라 전원이 꺼졌다.
“A8호, 정신 차려!”
공주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공주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곰솔 나무는 어떻게 되었어?”
“다 끝났어.”
개미 떼의 습격을 받은 로봇개미들은 달아났다고 했다. 곰솔 나무 주변에 죽은 개미 떼가 수북했다. 가슴이 개미산에 맞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로봇개미는 얼마든지 있으니 또 올 것이다.
멀리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풀잎 아래 숨었다.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가 말한 초록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 참, 이상하네. 곰솔 나무가 점점 시들고 있어.”
사람들은 곰솔 나무를 꼼꼼히 살폈다. 곰솔 나무를 지켜줄 사람들 같았다. 나는 남은 배터리를 끌어 모았다.
“어쩌려고?”
공주가 막아섰다.
“내 정체를 보여야 해. 그래야 곰솔 나무가 저렇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어.”
“그럼 넌…….”
“이제 알 것 같아. 내 진짜 임무는 이거였어. 내가 증거가 되는 거.”
공주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눈물을 터뜨렸다.
“너희 곰숲이 안전했으면 좋겠어.”
나는 공주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곰솔 나무를 향해 날아올랐다. 마지막 비행을 위해. (*)
첫댓글 개성있는 소재네요. 공생관계의 파손을 막기위한 로봇개미의 희생! 문득 '대립의 조화'라는 표현이 생각나네요. 자연과 첨단도 조화를 이룬다면 좋겠습니다. A8호 라는 제목은 계속 맴돌게 하네요~~^^. 아마 김은아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처럼 새겨지겠네요. 수상 축하합니다
글이 오밀조밀 사랑스럽네요.
지구로 치면 대단히 고마운 로봇.
근데 A8호는 자기 임무는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군요.^^
배주머니에 독소를 숨기고 생태계를 교란할 목적,
혹은 인간의 이기에 의한 산림 처치를 위해 만들어진 로봇.
난 어떤 존재일까, 하는 깨달음이 참 좋습니다.
결국 존재 증명을 해야할 순간에
모든 걸 내던지는 A8호.
멋진 주인공을 탄생시킨 김은아 작가님!
다시 만나니 더 반갑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