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자의 감사기도
(마 14:13-21)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이십몇 년 전 어느 대통령 후보가 묻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이 물음에 사람들은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행복한가?’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등,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주 가끔 좋은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이 있는데 기특해 보입니다. 물론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도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돈이든, 건강이든, 명예든, 부족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복한 삶을 이유로 욕심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결코 채우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불편한 것, 부족한 것을 즐길 줄 알 때 행복하다’는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뙤약볕에서 뛰어놉니다.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왜 힘들게 뛰느냐고 걱정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그 힘듦을 놀이로 생각하고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할 때 불행을 느낀다면, 만족할 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빌 4:11)고 말씀하십니다. 풍족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함으로 인해 삶을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철들고 나서는 모든 것에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철드는 것은 자기를 살필 줄 아는 것입니다. 학교 가면 다른 친구들과 비교되고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나는 부족하다,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만족할 때가 있었습니다.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아이는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필요한 것은 엄마가 모두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엄마를 신뢰하면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아마 엄마 품에 있는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철이 들었고, 모든 것을 비교하고, 내 생각으로 만족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걱정과 염려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이 욕심 때문에 만족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요? 내게 있는 것과 주님이 주시는 것을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우리는 많은 것이 부족합니다. 건강이 부족하여 근심할 수도 있고, 가진 것이 없어서 염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감사보다도 불평과 원망이 많습니다. 부족한 것을 크게 여기기 때문에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도 감사하지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함을 느끼는 무리들을 맞이하십니다. 그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내게로 오라 내가 쉼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은 ‘연민, 사랑’을 느낍니다. ‘측은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냥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족함을 호소하는 사람을 보면, 불쌍하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의 말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한 마디 말이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11)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뿐만 아니라 건강의 부족을 호소하는 사람도 맞아주십니다. 병든 이들, 장애인들, 귀신들려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주십니다. 율법은 병이나 장애를 ‘죄’ 때문이라고 멀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인을 따지지 않고 그들에게 고통에서의 해방을 선사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먹을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먹는 것은 필수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사람들이 주님에게 와서 부족함을 채우고, 만족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사람의 욕심은 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부족한 것을 채웠을 때 잠시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곧 욕심이 생기면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들의 모습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행복한 사람이 되려고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족함을 채우려고 주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들과 같은 목적으로 주님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기도는 늘 부족함을 호소하며 채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살도록 복을 달라는 것이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욕심입니다. 왜 욕심이라고 하겠습니까?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이들이 주님을 따르면서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주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라며 계속 따라다닙니다. 저녁 때가 되었고, 사람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빈 들에서는 먹을 것도 없고,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청을 듣습니다. 사람들이 마을로 가서 사 먹고 오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지 말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계산을 합니다. 오천 명이 먹으려면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고, 돈이 있어도 음식이 마련될 수 있을지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터무니 없는 요구를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돈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데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사람, 혹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측은히 여겨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벽하게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큼 하면 됩니다. 제자들에게 무리를 풍족히 먹일 양식을 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를 내어놓으며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음식 전부라고 보고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전부를 내어놓았으니까요.
주님은 그 음식을 받으시고 무리를 앉히신 다음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은 ‘떡을 많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 명의 식사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족한 중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주라고 하셨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천 명이 풍족히 먹고도 열두 광주리의 부스러기가 남았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감사하였을까요?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감사드렸을까요? 아니면 기도할 때 음식이 불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그렇다면 기도는 주술이 되고 말 것입니다. 기도가 음식을 많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생각이라면 주님은 마땅히 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신앙은 비논리, 혹은 초월적 논리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무한 신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을 채우신다’고 믿고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족함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 받습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욕심을 부립니다. 욕심은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는 전쟁과 폭력, 갈등과 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채우면 채울수록 더 많은 사람이 고통 받습니다.
주님은 모자라는 가운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 감사의 기도는 모든 이를 만족하게 하고, 풍족히 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족한 자의 감사 기도, 그리고 부족한 중에도 드리는 감사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아서 고단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만족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날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사모하며 기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