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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혼재
사회: 박성웅 사무국장
식전행사
0 창혼재
◆ 식 전 ◆ 10:00-10:50분
○ 곧 행사가 시작되오니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서는 자리 에 착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원만한 행사 진행을 위하여 휴대폰은 꺼 주시고 박수나 함성은 삼가 하시어 경건하고 엄숙한 진행이 될 수 있 도록 당부말씀 드립니다.
○ 저는 오늘 행사 사회를 맡은 사근산성 순국선열 추모위 원회 사무국장 박성웅입니다.
○오늘행사는 식전행사“창혼재”를시작으로, 1부 제례,” 제2부 추모행사, 추모행사는“국민의례→내빈소개→주요 경과보고→추모사→폐회”순으로 진행 하겠습니다.
○ 지금부터 순의 제636주기 사근산성 추모제향에 앞서 순국선열들의 영혼들이 극락왕생 하시기를 기원하는 굿을 “국가무형문화재 127호 아랫녘수륙재보존회 의 “창혼재” 로 선열들의 영혼의 안식을 빌어 드리겠습니다.경건한 마음으로 관람 하시기바랍니다.
창혼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7호)
아래녁 수륙재 보존회
사근산성에서 전투에 참전한 9원수에 대한 기록
사절요),龍飛御天歌,荒山大捷(황산대첩)등
高麗(고려)말 14世紀(세기) 後半(후반)에 極甚(극심)하던 倭寇(왜구)의 擄掠(노략)질은 1376년 鴻山(홍산)에서 崔瑩(최영)將軍(장군)에게 크게 敗(패)한후 한동안 潛潛(잠잠)햇으나 1380년 8월에 500척의 大船團(대선단)으로 鎭浦口(진포구)에(지금 -舒川(서천)-금강)侵入(침입)하였다. 倭寇(왜구)가 타고온 船舶(선박)을 倭寇(왜구)들이 쇠사슬로 단단히 묶어놓고, 上陸(상륙)하여 忠淸道(충청도),全羅道(전라도),慶尙道(경상도) 3道(도) 海岸(해안)의 州(주),郡(군)을 放火(방화),掠奪(약탈),殺戮(살륙)하여 屍體(시체)가 山(산)과 野(들)을 덮을 정도로 倭寇(왜구)에게 당하고 있을때, 朝廷(조정)에서는 羅世(나세)를 上元帥(상원수)로,崔茂宣(최무선)을 副元帥(부원수)로,沈德符(심덕부)을 都元帥(도원수)로 하여 치도록 하였다. 倭賊(왜적)과 싸움에서 崔茂宣(최무선)이 민든 新武器(신무기)인 火砲(화포)를 처음 使用(사용)하여 묶어놓은 倭賊(왜적)의 船舶(선박)을 모두 불태우고 大勝(대승)을 거둠으로써 激烈(격렬)하던 倭賊(왜적)의 蠻行(만행)에 쐬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목숨을 求(구)한 360餘(여)名(명)의 倭賊(왜적)들은 沃州(옥주)(지금 沃川(옥천))으로 달아나 먼저 上陸(상륙)한 倭賊(왜적)들과 合流(합류)하였는데, 船舶(선박)이 燒失(소실)당하고 退路(퇴로)를 읽게되자. 상주,영동,옥천등지로 進出(진출)한 主力部隊(주력부대)는 다시 京山(경산)現성주)을 侵略(침략)하고 咸(陽(함양) 沙斤乃驛(사근내역)에 集結(집결) 그 當時(당시) 倭賊(왜적)을 反擊(반격)하여 戰鬪(전투)에 追擊(추격)한 9元帥(원수)는 裵克廉(배극렴)(朝鮮開國(조선개국)1等功臣(1등공신),領議政(영의정))元帥(원수), 金用輝(김용휘)元帥(원수), 池勇奇(지용기)원수-충주지씨,문하평장사-정몽주와 더불어 끝까지 고려에 忠誠(충성)을 다 하다가 이성계의 손에 류배후 죽음), 吳彦(오언)同福吳氏 밀직부사)元帥(원수), 鄭地(정지)元帥(원수)海軍始祖-하동 鄭(정)씨 政丞公派祖(정승공파조) 할머니가 裵(배)씨 선산이 대구 팔공산에 파조부터 묘가 10여기가 있음, 初名(초명)을 俊堤(준제)1349년)27세까지 부름, 전남 나주시 문평면 죽곡리 1347년출생) , 朴修敬(박수경)元帥(원수), 裵彦(배언)元帥(원수)-判書公(판서공)派祖(파조), 都興(도흥)元帥(원수)星州(성주).星山(성산)漆谷都(칠곡도)씨,密直副使(밀직부사)-전라도 도순찰사 재직중 왜구침입을 잘 막지못해 한때 파직 다시 起用(기용) 왜구방어에 功(공)이큼,1392년 정몽주가 이성계 일문에 의해 그일파로 몰려 유배, 河乙址(하을지)元帥(원수)진양,진주 河(하)씨,계림원수)등 9元帥(원수)들과 咸陽沙斤乃驛(함양 사근내역)-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산60번지, 沙斤山城(사근산산성)문화재 152호, 聯合軍(련합군)을 形成(형성)하여 倭賊(왜적)과 싸웠으나 안타웁게도 朴修敬(박수경경)元帥(원수)와 裵彦(배언)元帥(원수,상장군)와 軍士(군사)500名(명) 戰死(전사)하고 敗(패)하였다, 倭賊(왜적)들은 繼續(계속)하여 전북 南原山城(남원산성)을 攻擊(공격)하여 雲峰(운봉)懸(현)廳(청)을 불태우고, 장차 光州(광주),潭陽(담양)을 거쳐 北上(북상)한다고 하니 朝廷(조정)에서는 智異山(지리산)과 海州(해주)方面(방면)에서 倭賊(왜적)을 討伐(토벌)하여 勇猛(용맹)을 떨친 李成桂(이성계)將軍(장군)朝鮮太祖(조선태조))을 양광도,全羅道(전라도),慶尙道(경상도) 3道(도) 都巡察使(도순찰사)에 任命(임명)하고 大隱(대은) 卞安烈(변안렬)을 體察使(체찰사)에,寓仁烈(우인렬)元帥(원수),李元桂(이원계)(여진출신 이성계 의동생)元帥(원수),朴林烈(박임렬)元帥(원수),都吉敷(도길부)元帥(원수),洪仁桂(홍인계)元帥(원수),林成味(임성미)元帥(원수),등은 이성계를 도아 倭賊(왜적)의 大(대)討伐(토벌)作戰(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양측은 雲峰(운봉)을 넘어 荒山(황산)(해발695미터) 西北(서북)의 鼎山峯(정산봉)에서 熾烈(치열)한 戰鬪(전투)를 벌렸는데 倭賊(왜적)들은 山峽谷(산 협곡) 險地(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이성계장군은 自身(자신)이 정산봉 오른쪽길목을 담당하고 다른 元帥(원수)들은 平坦(평탄)한 길로 나가게하자 과연 倭賊(왜적)들은 定例(정례)部隊(부대)가 險峻(험준)한 길로 튀어 나왔다. 이성계장군이 대우전과 우뢰전을 써서 先鋒(선봉)의 倭賊(왜적)을 다 殺害(살해)하자 倭賊將(외적장) 阿只拔都(아지발도)는 투구와 갑옷으로 전신을 武裝(무장)하고 白馬(백마)를 타고 先鋒(선봉)에서 對抗(대항)하엿으나 이성계장군과 李豆蘭(이두란)元帥(원수)가 倭賊將(왜적장)을 쏘아 죽이니 戰死(전사)한 倭賊(왜적)들이 피로 江(강)물이 물들어 6.7日(일)間(간) 물을 먹을 수가 없엇다고 한다. 捕獲(포획)한 말이 1,600餘(여)匹(필)이고 兵器(병기)도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倭賊(왜적)이 我軍(아군)보다 10培(배)나 많았으나 겨우 70餘名(여명) 살아 남아 智異山(지리산)으로 逃亡(도망) 갔다.
荒山(황산)大捷(대첩)에서 戰勝(전승)한 後(후) 그이듬해 다시 찾은 荒山(황산)을 訪問(방문)한 李成桂(이성계)將軍(장군)은 自身(자신)과 麾下(휘하) 元帥(원수)들의 姓名(성명)을 巖壁(암벽)에 새겼스니 이것이 御諱刻(어휘각)이며 그 뒤에 宣祖(선조)10년(1577년) 全羅道(전라도) 觀察使(관찰사) 박광옥의 上訴(상소)에 의해 戶曹(호조)判書(판서) 김귀영이 王命(왕명)으로 碑文(비문)을 짓고 麗成君(려성군) 宋寅(송인)이 글씨 으며 따로 雲峰(운봉)縣監(현감) 박광옥이 具體的(구체적)으로 戰鬪(전투)經過(경과)를 記述(기술)하여 전북 南原市(남원시) 雲峰(운봉)읍 花水里(화수리)에 碑文(비문)을 세웠으나 그 後(후) 荒山(황산)大捷碑(대첩비)와 史蹟(사적)碑(비)를 세워 그날의 勝捷(승첩)를 기리워 왔으나 庚戌國恥(경술국치) 以後(이후) 日人(일인)들에 의해 破壞(파괴)되어 荒廢(황폐)되었던 것을 現在(현재) 亭閣(정각)안에 보관 되어있다. 다시 1973년 顯忠日(현충일)에 신석호 짓고 김기승 쓰고 전북 남원시가 國庫補助(국고보조)와 南原市(남원시)費(비)로 環境(환경)을 淨化(정화)하였으나 이는 황산기슭에 메아리친 救國(구국)의 戰勝(전승)을 널리 宣揚(선양)하고 우리 後孫(후손)들에게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自主國防(자주국방)情神(정신)을 길이 保存(보존)케 하고자 함이다.
제공자: 경주배씨대종회 지도위원, 달성배씨전국대종회 감사 ,
운암공(나주시 봉황면울곡 종손) 배인수 010-2345-6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