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박만한 돌부터 밤톨만한 돌까지
완도군과 해남군은 한때 ‘진짜 땅 끝’을 두고 한바탕 다툼을 벌였다. 완도군은 “완도가 섬이라지만, 일찌감치 다리가 놓여 육지와 다름없으니 육로로 갈 수 있는 한반도 최남단의 땅은 바로 완도군 완도읍 정도리 일대”라고 주장했다. 정도리의 일명 ‘넉구지’가 해남의 땅끝마을보다 1.8㎞ 더 남쪽으로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툼은 해남군의 ‘KO승’으로 결론났다. 완도의 정도리 일대를 아는 이들은 거의 없는 반면, 해남의 땅끝마을은 여전히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완도가 땅 끝으로 꼽았던 완도읍 정도리에는 둥근 갯돌들이 지천으로 깔린 해변 구계등이 있다. 갯돌들은 커다란 수박만한 것부터 참외만한 것, 사과만한 것, 밤톨만한 것으로 줄어들다가 ‘차그락 차그락’ 조약돌이 된 것까지 차례로 늘어서 있다. 돌의 크기에 따라서 밟는 소리도 다르다. 발걸음을 따라 수박만한 것들은 덜그럭거리고, 참외만한 것들은 자그락거리고, 조약돌은 차르르 무너진다.
구계등의 갯돌들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달빛 밝은 밤이다. 휘영청 밤바다에 내걸린 달빛에 수박만한 둥근 갯돌들이 반짝인다. 반사된 달빛이 너무도 선명해 갯가 가득 반딧불이가 떠있는 것같다. 활처럼 휘어진 해안 저쪽에서 잔 갯돌들이 파도에 구르며 내는 음악소리도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구계등 해안을 뒤덮은 갯돌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구계등에 갯돌들이 생겨난 것은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산자락까지 올라온 바다가 바위들을 쪼개고 굴리면서 이렇듯 둥글게 빚어냈다. 갯돌들은 한때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했다. 2004년 태풍 매미 때는 갯돌이 다 사라지고 해안은 모래로 뒤덮였다. 하루 아침에 갯돌이 다 사라져버리는 믿기지 않는 변고가 생긴 셈이었다. 그러나 바다는 꼭 열흘 만에 다시 구계등의 갯돌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2. 따뜻한 바다가 길러낸 진초록 상록수림
완도의 바다는 따뜻하다. 찰랑거리는 바닷물에 손을 담가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난류의 바다는 겨울에도 짙은 초록으로 빛나는 완도의 상록활엽수들을 키워낸다. 구계등 해안 뒤편의 방풍림도 그렇게 따뜻한 바다가 키워낸 것이다. 붉가시나무, 줄참나무, 굴참나무, 서어나무, 동백들이 빼곡한 방풍림에 들어 숲길을 걷는다. 햇빛이 진초록의 상록활엽수들의 이파리들을 투과해 숲은 온통 신비로운 초록색으로 가득하다.
숲길을 지키고 선 나무마다 나붙은 이름표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걷는다. 이름만 알고 있던 나무도 있고, 모양은 아는데 이름을 몰랐던 나무도 있으며 이름도 모양도 몰랐던 나무들도 있다. 1.5㎞ 남짓의 잘 다듬어진 폭신한 산책로를 타박타박 걷는다. 겨우내 무채색으로 무뎌진 마음에 초록색을 수혈받는 기분이다. 구계등의 숲도 좋지만 완도 난대상록수림의 진면목은 완도수목원에 있다. 국내 유일의 난대수목원인 완도수목원은 규모만으로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긴 능선을 거느리고 있는 오봉산 전체가 수목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은 다른 수목원과는 달리 겨울과 이른 봄에 입장객들이 가장 많다. 원시림에 가까운 수목원의 상록수림은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도, 멀찌감치서 녹음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부드러운 능선의 산책로를 따라 갓 피어난 동백꽃을 감상하면서 40분쯤 오르면 수목원의 정상 전망대다. 전망대에서는 수목원의 짙푸른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완도는 한때 ‘비워뒀던 섬’이다.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던 장보고가 사망한 뒤 청해진은 폐쇄됐고 완도 사람들은 모두 지금의 전북 김제 땅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렇게 500년이 지난 뒤 고려 공민왕 때가 돼서야 완도에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지금 완도의 상록수림은 500년 동안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은 채 저 홀로 울창했던 수목들의 후손인 셈이다.
3. 섬을 징검다리 삼아 강진 나가는 길
완도군은 완도의 본섬을 비롯해 일대의 섬들을 죄다 품고 있다. 해남군의 아래쪽 섬인 노화도와 보길도, 소안도를 비롯해 강진군 아래 떠있는 고금도와 조약도, 그리고 장흥군 아래자락인 금당도, 평일도, 생일도 등도 죄다 완도군에 속한다. 일대 바다의 섬들을 다 완도군에 몰아줬기 때문이다.
완도에서 최고의 섬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고산 윤선도의 자취가 남아 있는 보길도와 보리밭이 펼쳐진 청산도. 이곳들이야 여행명소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석처럼 숨어있는 곳이 완도와 연륙교로 이어진 신지도와 강진 앞바다에 떠있는 고금도와 조약도다. 완도에서 신지대교를 넘어 신지도로 들면 강진으로 나가는 코스를 따라 이들 섬을 다 돌아볼 수 있다.
완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가닿는 신지도에는 ‘명사십리(鳴沙十里)’가 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해수욕장 중에서 ‘명사십리(明沙十里)’란 이름을 갖고 있는 곳들이 많다. 함경도 원산의 송도원해수욕장이 그 원조 격이다. 완도의 신지도에도 명사십리는 밝을 명(明)자가 아니라 울 명(鳴)자를 쓴다.
신지도의 명사십리가 ‘우는 모래’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이렇다. 조선시대 왕족 사대부로 관료사회의 부정부패와 시국의 참상을 과감하게 비판했던 이세보. 그가 철종 때 외척 세도일가의 전횡을 논하다가 이곳 신지도로 유배를 오게 됐다. 그는 밤이면 해변에 나가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유배의 설움과 울분을 실어 손가락이 닳도록 모래톱에 시를 쓰고 읊었다고 전해진다. 그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았으며, 그가 돌아간 뒤에도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우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들렸다던가.
신지도에서 또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신지면 소재지에서 동고리로 가는 길목인 가인 마을 뒤편의 왜가리 서식지다. 봉긋한 동산의 소나무 숲에는 온통 흰 깃의 왜가리들이 빼곡하게 앉아있다.
4. 조약도에 숨겨진 가사해수욕장
신지도에서 고금도로 가려면 신지도 송곡항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고금도 상정항까지 철부선을 타고 가야 한다. 뱃길은 10분 남짓.
고금도에는 충무사가 있다. 이름에서 짐작되듯 이곳은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전지마다 충무공을 모신 사당이 있지만, 이곳 고금도의 충무사가 보다 각별한 것은 이곳이 바로 정유재란 때 수군본영을 설치한 곳이었던 데다, 노량해전에서 유탄을 맞고 전사한 이순신을 안장한 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유해는 충무사 앞 소나무 숲으로 이뤄진 봉긋한 언덕에 안장됐다가 80여일 뒤에 충남 아산의 선영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충무공의 시퍼런 기개와 기운으로 지금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가묘자리를 둘러봄 직하다. 고금도에는 또 집집마다 심어진 유자나무 가지에 남은 유자들이 향긋한 내음을 뿜고 있다.
고금도에서 조약도로 건너가는 길. 조약도(약산도)까지는 1999년 놓인 약산대교로 이어져 있다. 조약도는 섬 안에서 100가지 약초가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산이 깊어서 약초가 많다고 해서 약산도라고도 불린다. 조약도에는 섬 한가운데 솟은 삼문산의 위용이 자못 장대하다. 삼문산의 가파른 사면은 암봉들이 무너져내린 너덜겅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조약도는 흑염소방목지로 유명하다. 흑염소를 방목하는 마을에는 어찌나 바위가 많았던지 마을이름도 바위를 얻는다는 뜻의 득암리다.
조약도의 최고 절경은 단연 가사해수욕장. 해변의 길이가 300m도 채 안되지만 모래사장 뒤편에 울울창창한 상록활엽수들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낮은 동백나무들은 일제히 꽃을 피워 올렸고, 큰 나무들은 해변에 초록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아릿아릿한 봄에 호젓하게 산책하기에 그만인 곳이다.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산자락에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원시림을 이룬 동백나무들이 성성하다.
#완도 가는 길 = 완도의 섬들을 돌아보는 섬 일주 코스를 택한다면 해남에서 완도로 들어서 신지도, 고금도, 약산도를 돌아본 뒤 강진으로 빠져나오거나, 반대로 강진에서 고금도, 약산도, 신지도를 거쳐 완도로 나오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방향만 다를 뿐 똑같은 길이니 해남에서 돌든, 강진에서 돌든 소요시간은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완도까지 가려면 해남 쪽보다 강진 쪽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
#어디서 묵을까 = 완도읍내에는 씨월드관광호텔(061-554-0225) 등 장급여관들이 즐비하다. 이즈음은 관광객들이 그다지 몰리지 않아서 숙소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해변의 운치있는 숙소를 찾는다면 신지도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에는 펜션이며 민박집들이 즐비하다. 여름 시즌에는 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지만 요즘은 예약없이도 쉽게 숙소를 골라 들어갈 수 있다. 조약도의 가사해수욕장에는 시설은 좀 떨어지지만 운치있는 민박집들이 많다.
#무엇을 먹을까 = 완도는 전복양식이 성한 만큼 전복을 내오는 식당들이 많다. 완도항에서 바다를 끼고 신지대교 쪽으로 향하다 보면 음식특화거리가 있다. 이곳에 즐비한 횟집들은 회와 함께 전복을 내온다. 살짝 쪄내서 참기름을 뿌려 내오는 부드러운 전복 맛이 괜찮은 편. 전복정식(1만원)이란 이름으로 백반과 함께 자잘한 전복 서너마리를 쪄서 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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