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달려가는 이유! (빌 3:12-14)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나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달려가는 경주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쉬지 말고 달려가야 합니다.
이렇게 뛰어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 때문” 입니다.
예수께로부터 부름 받은 그 부름의 목적입니다.
12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것은” 소명입니다.
이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의무와 은사, 그것이 이 소명입니다.
여러분, 지금 세계인구가 80억이라고 하는데 그 80억 인구 가운데 나 같은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습니다. 나처럼 생긴 생김새, 역할, 성격, 은사, 개성, 소명은 나 하나뿐입니다.
이것이 나의 가치입니다. 사람들이 이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누구처럼 되고 싶다고 뜯어고치려고 애씁니다. 그러면 내가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면 분명 나에게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소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값이고 목적이고 삶의 이유이고 소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살아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르니까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들이 그런 소명을 발견하고 그 신성한 소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개인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는 주어진 사역을 충실하게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소명의 삶입니다.
선교사의 보고에 따르면 참 아찔한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한 선교사가 테러를 당했습니다. 지하철을 타려는데 칼에 찔렸습니다. 몸에서 피가 흘렀고 쓰러졌습니다. 그때 마침 한국에서 여행 온 어느 모자에 의해서 간호를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한국의 모 교회 집사였습니다. 선교사와 집사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선교사를 간호하다 보니 아들이 너무 무서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간호하던 여집사는 선교사 보다 도망간 아들이 걱정되어 아들을 찾아 가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선교사는 지금 찾아보아도 아들을 찾지 못할 것이니 조금 기다리면 다시 올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조금 후에 그 아들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모자의 도움으로 이 선교사는 무사히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선교사의 사역의 길에는 언제나 이런 어려움이 기다립니다. 이런 어려움이 수반되기 때문에 이 사역의 길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손해 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합동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때 도망갔던 젊은이가 몇 년 후에 신학교에 갑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말입니다. 이 선교사가 당했던 테러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한 젊은이의 앞길을 새롭게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은 개인의 삶에 충실하고 사역자는 주어진 사역에 충실하는 것이 소명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인은 기업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이 끊임없이 전진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기업을 성장시키는 일 그것이 국가에 공헌하는 일이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고 소명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런데 엉뚱한 일에 관심 쓰니까 기업이 부진하고 좌초하고 무너지고 마침내 쓰러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예수께로부터 붙잡힘 때문에 이방 땅으로, 임금들 앞으로, 박해자들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갔습니다.
가서 자신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를 전했고 가르쳤고 설명했고 간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그 부름의 일을 위해서 오늘도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소명의 인생입니다.
두 번째는 “미래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보통 세 종류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과거에 매여살기 쉽습니다. 대화를 하면 언제나 과거를 말합니다. 지난날을 회고합니다. 늘 지난날의 회상에 잠겨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지난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에서 밝은 부분은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삶이 어둡습니다. 기쁨도 즐거움도 다 뺏기고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지극히 “오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깊이 파묻혀 골똘하게 세상에 집착해서 살아갑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오늘 현재에 너무 깊이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현재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돈과 즐기는 일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두 돈버는 일에 골똘해 살아갑니다. 그리고 살 빼는 일에 전쟁을 치룹니다.
보면 그만하면 괜찮은데도 모두 더 날씬해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오직 이 일에 매달려 다른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그래서 요즘 에어로빅 센터에 몸무게를 말해주는 전자저울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무게가 50kg인 사람이 저울에 올라가면 당신의 몸무게는 50kg 입니다 하고 말로 해 줍니다. 그런데 130kg인 사람이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저울이 “한사람은 내려주세요”하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오늘에 집착해 살면 내일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미래지향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 미래적인 사람이 내일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뭔가 성취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생관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피력한 인생이고 신앙관입니다.
13절을 보면 “나는 앞에 있는 것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지난날은 그렇게 소중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입니다.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모두 허무, 후회, 부끄러움, 실수, 고난스러웠던 일들만 생각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지난날의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만 생각났을 것입니다. 지난날 바울이 한 행동을 보면 오류가 많습니다. 모르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닌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대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심정으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경계하여야 할 것은 안주의식입니다.
사탄이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이 이 안주의식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라, 기도도 많이 하라, 헌금도 많이 하라, 그러나 내일부터 하라.” 이 안주의식에 매여 내일 내일 하다가 그냥 죽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좋아하고 안주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안주의식을 극복하려면 피나는 노력과 수고와 자기부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칼럼버스가 오늘도 우리는 서쪽으로 전진한다 하고 노를 저었습니다. 그 삶에는 모험이 들어있고 수고가 들어있었지만 그런 고난의 모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많은 섬을 발견했고 그 땅이 오늘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구상의 나라들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가 90세 때 기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이제는 쉬실 때가 되었는데 어떻게 세월을 보내실 것입니까.” 대답하기를 “이제 90개째 봉우리를 넘었으니 100번째 봉우리를 향해 가야지요.” 이렇게 멈추지 않고 마지막 까지 달려가려는 자세 때문에 모두 인류문명을 위해서 뭔가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보면 바울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세 번째는 “상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순교하는 것도 모두 이 상 때문입니다.
이 상 때문에 오늘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죽음도 불사합니다.
바울은 그 상 때문에 매일같이 분주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사명이 끝나갈 무렵 그는 의미심장한 말로 그 상을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자신 있는 기대요 소망이요 만족스러운 고백입니까.
마치 42.195 km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골인지점에 돌아와 손을 들고 나는 이제 완주했다 하고 만족스럽게 골인하여 마라톤을 끝내는 모습과 같습니다. 무슨 일이나 성공스럽게 마치고 끝내는 일는 아름답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은퇴를 생각하면서 그 은퇴의 지점에 가까이 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생각하면서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내게 주어진 소명, 목적, 삶의 이유,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도 다 이루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만족한 은퇴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신성한 부르심과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며 달려가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께로부터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