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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서 개요
사무엘서, 특히 사무엘상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대변화의 시기였습니다. 사사기의 표현대로 보자면 당시는 사사시대 말기로 왕이 없어 각자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을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의 틀(신 17:14-20) 속에 왕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왕이심을 부인하는 측면에서 왕을 구하였기에 어긋난 길로 접어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왕이심을 재확인하셨습니다.
본서가 사무엘서라고 책명이 불리워진 이유는 지배적인 인물이 사무엘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기도하여 낳은 아들로서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다가 임직을 받았습니다. 왕이 없는 시대에 사무엘은 사사, 선지자 겸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을 지도했으며, 다윗 왕조의 탄생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 왕권을 탄생시키시는 역사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왕이심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나님 자신이 왕이신 것을 확립해 나가시는지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일상적인 모든 생활 속에서 말입니다.
사무엘상 1장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레위지파 고핫가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대상 6:33-34). 그는 ‘한나’라는 아내를 얻었는데 아마도 불임이었기 때문에 ‘브닌나’라는 아내를 새로 들인 것 같습니다. 당시 사사시대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두웠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엘가나는 해마다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만군의 여호와’를 부르면서 예배했습니다( 절). 아내 한나의 불임으로 인해 새로 아내를 들인 것이 문제가 됩니다. 새로 들인 브닌나는 자녀들을 낳았고, 그녀는 교만해져서 한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부인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큰 수치거리였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야곱의 아내 라헬처럼 자식이 없었지만 남편 엘가나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엘가나는 실로에 올라가는 날에 한나에게는 제물을 갑절이나 주었는데 이것에 대해 질투하면서 한나를 더 괴롭힙니다. 이에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울자 엘가나는 그녀가 열 자녀보다 낫다고 위로합니다. 자녀가 없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한나가 위로를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나는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고 서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절). 자식을 주시면 그를 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입니다. 한나는 마음이 하도 괴로워서 말소리를 잘 내지도 못했습니다. 입술만 달싹거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본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 취한 줄 알고 나무랍니다. 한나는 자신의 원통함이 심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엘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로 은근슬쩍 넘어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적 타락의 조짐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던 여인을 분별할 줄 모르는 영적 우둔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나는 직분자가 한 말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확신하고는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는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띄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동침하여 임신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깊이 돌아보셨고,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사무엘’(하나님께 구하였다)이라고 이름짓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엘가나가 실로로 올라가려고 했을 때 한나는 사무엘의 젖을 떼고 나서 아들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리다”( 절). 한나는 아이의 젖을 뗀 후에 그 아들을 데리고 실로의 성소로 가서 하나님께 바칩니다. 오랜 불임끝에 겨우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지만 아깝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서원한대로 아들을 성소에서 살게 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칠흙같이 어두웠던 구약교회 전체에 한줄기 빛이 비춰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은 여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어두운 사사시대를 밝혀주기 시작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여인이 고통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도: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의 원통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원통함이 있을 때 사람에게 앙갚음 하지 않고 하나님께 고통을 토로할 때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통함을 가지고 부르짖는 이들을 돌아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연약하고, 가장 원통한 이들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들으십니다. 그 외마디 호소로 인해, 그 호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므로 그 가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한 줄기 빛이 비칩니다. 저희가 가장 크게 수치당할 때 가장 크게 소망이 넘친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무엘상 2장
하나님께서 한나의 원통함을 풀어주시고 아들을 주셨을 때 그녀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 찬송은 너무나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장차 다가올 왕권을 내다볼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왕권까지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찬송을 개인의 경험을 과장해서 말한 것이라고, 심지어 후대의 편집자가 사무엘을 통한 왕권수립이 이루어진 후에 끼워 넣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찬송은 한나가 성령님에 의해 감동을 받아 자기 아들 사무엘의 역할과 관련하여 장차 다가올 왕권을 내다보면서 노래한 것입니다. 한나의 이 기도는 그냥 공중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의 노래(신 32장)를 반영하고 있으며, 후대로 내려가면 엘리사벳의 노래(눅 1장)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이 기도가 깊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사무엘의 출생은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국 수립의 준비 역할을 감당합니다. 한나는 자기 개인의 경험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오실 왕을 고대하면서 힘껏 찬양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을 노래합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절). 그러면 하나님의 이런 주권적인 통치가 어떤 성격을 띨까요? 이 주권은 힘있는 자와 풍족한 자와 많은 자녀를 둔 자들을 낮추고, 넘어진 자와 주리는 자와 잉태치 못하던 이들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절). 하나님의 이런 주권을 깊이 신뢰하는 이야말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절).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의지하는 자를 세우시지만, 대적하는 자들을 깨어 부수시고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왕을 세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무엘서의 주제입니다.
엘가나 가정의 경건함과 대조적으로 엘리 가정의 불경건함이 드러납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들은 제사드릴 제물 중에 좋은 부분을 빼앗아 가는 죄를 저지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절). 엘리의 아들들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겁탈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 여인들을 가나안 족속들의 종교의식처럼 성전의 창녀로 취급한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가 이 사실을 알고 아들들을 책망하지만 말로만 그쳐 버립니다. 이렇게 좋지 못한 환경 속에서 사무엘은 성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엘가나와 한나가 성소에 종종 하나님을 예배하러 옵니다. 제사장 엘리가 사무엘을 드린 그들 부부를 위해 하나님께서 다른 자녀들을 허락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3남 2녀를 허락하십니다.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랍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점점 은총을 입습니다( 절).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보내셔서 예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제물과 예물을 짓밟은, 즉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의식을 짓밟은 죄를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예배를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엘리의 가문에 노인이 없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복을 받아도 엘리는 환란을 볼 것이며, 그의 두 아들들이 한 날에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 예언에 대한 확증으로 하나님께서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킬 것이고, 그 사람이 주의 뜻을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 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일으켜 세우는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제사장 엘리 가문이 멸망하고 사무엘이 높임받을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아브라함이 경험했듯이 앞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새로운 제사장 직분을 일으켜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제사직분이 필요합니다.
기도: 하나님은 뒤집어엎기를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역전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이 역전의 은혜는 원통함을 풀고 복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것을 끌어 내리시고, 낮은 것을 끌어 올리십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군림하고 착취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나도 한 방에 역전할 수 있다고 믿지 않게 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게 하소서.
사무엘상 3장
사무엘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영적으로 무지몽매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 제사장 엘리가 아들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가 영적으로 너무나 무감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에게 나타나십니다. 아침에 사무엘이 성소를 열 때까지 성소가 닫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성소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밤중에 성소에 있던 사무엘을 3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엘리에게 가서 자기를 불렀느냐고 말합니다. 이 일이 세번이나 벌어지자 엘리는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알 차립니다.
제사장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무엇인가 심상챦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엘리의 직감대로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일을 알려주십니다. 무서운 일을 알려 주십니다. 제사장 엘리가 아들들이 저주받을만한 일을 했을 때 그것을 금지시키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절). 이에 엘리 집의 죄악이 제물이나 예물로도 영원히 씻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사무엘은 덜덜 떨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더 겁이 났던 것은 제사장 엘리는 만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전처럼 아침에 성소 문을 열었지만 제사장 엘리에게 가서 아침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사무엘을 불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숨기지 말고 그대로 말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이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담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려고 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절). 자포자기한 것일까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면 되지 않습니까? 회개하기에 늦은 때는 없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희귀한 그 시대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계속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도: 저희는 알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니, 저희는 알면서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순종이 먼저이고, 순종하지 못했다면 회개하면 되는데 저희는 순종도 회개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은 저희의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이 아닌 저희의 회개를 통해 영광받으십니다.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주소서. 나는 돌이키고 회개했다고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가장 큰 은혜를 누렸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무엘상 4장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예배를 멸시하는 제사장 엘리와 그의 가문을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과 함께 하셔서 그의 말에 큰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3: 절). 사무엘이 점점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무엘은 심판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그 심판의 말씀이 전쟁을 통해 성취되는 모습을 봅시다. 당시는 사사시대 말기로 이스라엘이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같은 블레셋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에벤에셀 곁에 진을 쳤습니다. 실로가 이스라엘 경계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에 안심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믿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묘책을 냅니다. 법궤를 가져오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법궤가 진으로 들어오자 온 땅이 흔들거릴 정도로 환호성이 터집니다. 블레셋 군대는 낙담합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절). 블레셋 군사들은 이스라엘 진영에 전쟁의 신들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면서 잔뜩 겁에 질렸지만 서로 격려하면서 필사적으로 전쟁을 치릅니다. 어이없게도 법궤를 메고 나간 전투에서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고 법궤도 빼앗깁니다. 법궤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계적이고 미신적인 믿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제사장 엘리는 전쟁이 어떻게 되었는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전쟁터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무릅쓴 채 와서 전쟁의 소식을 전합니다. 엘리는 법궤가 전쟁터로 나갈 때부터 조마조마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두 아들이 죽고, 법궤마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놀라서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그는 눈이 멀고 비대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마침 해산하다가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습니다. 그녀는 비통한 마음으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고는 죽습니다( 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죽어가면서 이스라엘의 상태를 분명하게 외쳤습니다. 성소가 있고, 법궤가 있고, 제사가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부적과 다를 바가 아닙니다.
기도: 저희는 하나님을 묶어둘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저희 편이 되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함께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믿는 저희들이 부적을 더 많이 붙이고 다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자동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기에 그분께 간절히 구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무엘상 5장
블레셋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간 것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블레셋의 신 다곤에게 지고 말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블레셋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이 승리의 축배를 들면서 하나님의 궤를 자기들의 성읍 아스돗의 다곤 신상 곁에 두었습니다. 여호와가 다곤을 시중들라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놀랍게도 다곤 신상이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궤를 향해 절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리들이 다곤 신상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웁니다. 다음날에는 다곤의 머리와 두 손이 문지방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절). 이후로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들어가는 이들은 재수없다고 생각하면서 문지방을 밟지 않고 지나갑니다. 하나님은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십니다. 다곤에게 굴복한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다곤을 쳐 부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궤로 인해 다곤을 섬기는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재앙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아스돗의 수많은 사람들이 독한 종기가 나서 많은 이들이 죽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벌벌 떨면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절)라고 소리칩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블레셋 방백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묻습니다. 그 궤를 가드로 옮겨 보자고 합니다. 특정 장소를 벗어나면 그 궤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가드 사람들이 독한 종기로 죽임을 당합니다. 다시 시험하듯이 하나님의 궤를 또 다른 유명한 도시 에그론으로 보냅니다. 에그론 백성들은 그 궤로 인해 벌어지는 흉흉한 소문을 듣고는 우리를 죽이려고 궤를 보내느냐고 펄쩍 뜁니다. 하나님의 궤가 있을 곳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고, 이방신에게 굴복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궤와 함께 가는 곳곳마다 심판을 시행하십니다.
급기야 블레셋 모든 방백들이 모여서 의논합니다. 백가쟁명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밤새워 치열하게 치고 박고 싸웠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온 것은 자기들의 승리의 노략물인데 그것이 오히려 재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자존심 상하고 굴욕감을 느꼈겠지만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절). 블레셋 사람들의 코가 납작해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굴복시킨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땅에서 그들의 신들을 쳐 부수고 영광중에 이스라엘로 돌아오십니다.
기도: 저희가 하나님을 팝니다. 저희로 인해 하나님께서 굴욕을 당하십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께서 저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팔 때 하나님께서는 무능한 것처럼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변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스스로 당신의 주권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넘겨지신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다스림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연약해 보일 때 가장 강하십니다. 저희가 실패하고 넘어져도 하나님께서는 결포 실패하고 넘어지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게 하소서.
사무엘상 6장
블레셋 방백들은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법궤를 돌려보낼 방법을 묻습니다. 그들은 법궤와 더불어 속죄제를 위해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새 수레에 싣고 가게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사죄를 구하는 행동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시험적인 행동을 합니다.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워가게 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 암소들이 울거나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아론의 아들들이 받은 유업인 벧세메스 길로 바로 가면 자기들에게 내린 재앙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절).
젖이 퉁퉁 불어있는 암소 두 마리가 멍에를 매고 갑니다. 분명히 울면서 송아지들을 찾아 좌로나 우로 치우쳤을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암소들은 벧세메스 길로 곧장 갔습니다( 절). 이것도 신기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가 실려있는 수레가 오는 것을 보고 감사하면서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를 잡아 번제를 드렸습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이 이것을 보고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재앙을 내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기뻐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절). 무엇 때문에 법궤를 들여다 보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사실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청한 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에 그들은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사람을 보내어 법궤를 옮겨가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훼손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7장
벧세메스 사람들이 돌아온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보다가 큰 재앙을 당하였기에 그 궤를 떠나보내려고 합니다. 벧세메스에서 길로로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해 있던 기럇여아림(수 15:9)에 사람을 보내서 하나님의 궤가 돌아왔으니 옮겨 가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당한 재앙을 숨기면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사모했는지 궤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사람들을 보내어서 옮겨옵니다. 아비나답이 궤를 자기 집에서 모시겠다고 해서 그의 집에 20년동안 머무릅니다. 아비나답이 제사장 집안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경건한 그의 아들 엘리아살이 궤를 지킵니다. 누군가가 궤를 탈취하지 못하도록 지킵니다. 이렇게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가서 20년동안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궤는 잘 보관되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궤를 20년동안 방치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하나님을 찾고 사모하게 됩니다( 절).
이제 사무엘이 개혁을 주도합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우상으로부터 떼어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돌아와야 한다고 외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고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사무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모으면서 자기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즉, 이 모임은 회개와 헌신의 모임이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자는 결단의 모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마음을 쏟는다는 표시로 물을 붓고는 하루 종일 금식하면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절)라고 부르짖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치러 올라옵니다.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무장하지도 않은 채 한 곳에 모여 있으니 그들을 쳐서 전멸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겁이 났지만 흩어지지 않고 사무엘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러 왔는데 하나님께서 큰 우뢰를 발하여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예전에 그곳에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는데 이제는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큰 승리를 얻은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도움의 돌)’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절). 이에 블레셋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에 빼앗겼던 성읍도 다시 찾아옵니다. 적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니 평화가 깃듭니다. 사무엘은 해마다 벧엘, 길갈, 미스바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기도: 저희는 안전책들을 많이 만듭니다.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개를 만듭니다. 보험을 여러 개 들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안전책없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저희를 도우십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벼랑 끝에 세우는 것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이들을 도우십니다. 저희가 스스로 힘을 키우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소서.
사무엘상 8장
사무엘이 늙자 아들들을 사사를 삼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등 사사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찾아가 자기들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아들들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섭섭해합니다.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께 아뢰자 섭섭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요구는 사무엘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부터 인도하여 내시고 지금까지 지켜 보호하신 하나님을 버렸으니 사무엘 너에게도 동일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라고 허락하십니다. 적극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허용하십니다.
인간 왕을 구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신명기(17:14-20)와 사무엘상 초두에서 왕 제도가 등장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다른 이방나라의 왕들처럼 무력으로 통치하면서 강력하게 전쟁을 수행하는 왕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그 왕이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와 말을 끌고 그 병거와 말들 앞에서 보병으로 달리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아들들을 데려다가 왕궁에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해 부리고, 딸들을 데려다가 왕가를 꾸미고 식사준비하게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자손이 왕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나중에 그들이 왕으로 인해 고통 가운데 부르짖게 될 것이지만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절).
이스라엘 자손은 사무엘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에게 왕이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전쟁을 수행해 줄 왕이 필요하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절).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우리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위한 싸움을 원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고 왕이 백성을 하나로 만들어 잘 싸우는 조직력을 갖추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문제를 정치적인 동맹을 통해 해결해 나갈 것입니다. 조직력에 매료당하여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존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들어서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세력이나 조직력을 의지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 저희는 저희를 위해 대신 싸워줄 사람을 구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 싸워준다면 그 사람이 나를 지배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싸워준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효율적으로 나를 위해 싸워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세력이 있다면 언제든지 그 쪽으로 갈아탈 것입니다. 저희가 저희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싸움에 하나님을 들러리를 세우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사무엘상 9장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진 사울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사울은 기브아의 죄로 인해 거의 멸절될 위기에 이르렀지만 겨우 살아남을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삿 19-21장). 그는 베냐민 지파의 기스라는 유력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보기에 준수하고 키도 다른 사람의 어깨 하나가 더 컸습니다.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자 아들 사울에게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를 두루 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는 숩 땅까지 갔는데 너무 멀리 갔기 때문에 부친이 걱정할까봐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의 사환이 이 곳 근처에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있으니 가서 물어보자고 합니다.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아 응하나니 그리고 사하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절). 사울이 그 선견자에게 드린 예물이 없다고 하자 그 사환이 자신이 가진 은전을 내밉니다.
사울은 그 성읍을 향하는 비탈길을 올라가다가 물 깃는 소녀들을 만나자 선견자가 있는지 묻습니다. 그들은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거기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사를 드리고 나면 사무엘이 축사를 하고 나서 백성들이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지금 가면 바로 그 산당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오기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알리셨습니다.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이 올라올 것이니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절).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건져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는 네 가지 과정이 있는데 그 첫째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에 의해 왕이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십니다. 인간의 능력이 선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바로 이 사람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사무엘은 오늘 내가 너와 함께 식사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무엘은 사울의 부친이 사흘 전에 잃었던 암나귀들을 찾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바로 너라고 말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절). 사울은 자신의 지파와 가족이 가장 미약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겸손이 돋보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산당에서의 식탁에 초대하여 상석에 앉히고는 미리 준비한 음식을 사울 앞에 내놓게 하고는 같이 먹습니다. 사무엘은 식사 후 산당에서 함께 내려와 저녁에 지붕에서 단 둘이 대화를 나눕니다( 절). 사무엘은 장차 왕이 될 사울에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진지하게 들려 주었을 것입니다. 날이 밝자 사울을 돌려보내기 위해 함께 가다가 사환을 앞서가라고 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을 붓기 위함입니다.
기도: 하나님께서는 일할 이들을 선택하십니다. 자격을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 일을 하도록 힘주십니다. 선택하는 분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그 선택이 저희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기쁘신 뜻 가운데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없이 선택하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이 드러나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선택하셨으니 저희가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힘있게 살아가게 하소서.
사무엘상 10장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무엘은 사울을 돌려 보내기 위해 같이 길을 나섭니다. 성읍 끝에 이르러 사환을 앞서 보냅니다. 사울과 단 둘이 있을 때에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환은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에 사무엘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이것이 왕이 되는 두번째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웠다고 하면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부은 후 그의 입을 맞춘 후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말합니다.( 절). 이 기름부음은 공적(정치적인 것)으로 모든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서가 아니라, 사적(종교적인 것)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왕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선택을 확인하는 기준이 됩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그날 겪게 될 일이며 도중에 선지자의 무리를 만날 때 예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왕이 되는 세번째 과정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절). 성령을 받을때에 비로소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기름부음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 성령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함께하심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무엘이 한 말을 듣고 길을 가던 사울은 실제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 예언합니다. 그래서 속담이 생겼습니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라는 속담입니다. 사울이 돌아오자 그의 숙부가 어디를 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다가 선견자 사무엘을 만났던 것까지 말했지만 사무엘이 했던 말, 그를 기름부었다는 말을 발설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미스바로 모입니다. 사무엘은 재차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전합니다. 지난 번의 미스바 대성회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인도하셨지만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절). 그것이 바로 왕을 세워달라고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왕을 세우라고 하셨으니 지파별로, 가족별로 나와서 제비를 뽑게 합니다. 베냐민 지파가 뽑히고, 마드리 가족이 뽑히고, 기스의 집이 뽑히고, 사울이 뽑혔습니다. 뽑힌 사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짐보따리 사이에 숨어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사람들이 가서 찾아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준수함과 큰 키를 보고 놀랍니다. 사무엘이 ‘이 사람이 당신들이 원하는 사람이다’라고 소리치고 백성들은 ‘왕이여, 만세’를 외칩니다. 모임이 파하고 다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면서 돌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불량배들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사울을 조롱합니다. “저런 사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웃기지 말라고 그래”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세워졌습니다.
기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는 저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아시기에 성령께서 임하셔야만 저희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없이 일하면 저희 수완과 저희 뜻대로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간절히 구하게 하여 주소서. 가장 작고, 연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저희가 성령의 역사로 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말로는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고 하고는 으스대는 저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사무엘상 11장
이스라엘 자손은 이스라엘 옆구리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던 블레셋의 침략을 당했습니다. 한편, 요단강 동쪽에 자리잡고 있던 이스라엘 지파들은 암몬족속의 공격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암몬의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에 쳐들어 옵니다. 야베스 거민들은 암몬과 화평조약을 체결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를 공격하지 않기만 하면 당신들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암몬의 나하스는 거만을 떨어대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을 빼어 버리겠다고 소리칩니다. 7일만 기회를 달라고 하고는 이스라엘 전역에 전령을 보내어 도와 달라고 필사적으로 청합니다. 이 소식이 기름부음받은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까지 이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게 굴욕을 당하게 된 것을 듣고 기브아의 주민들이 자기들이 당한 것처럼 소리 높여 통곡합니다( 절).
사울이 밭에서 일하다가 오후 늦게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 소식을 듣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감동하셔서 크게 분노합니다. 이에 그는 소 한 겨리(두 마리)를 잡아 각을 뜨고는 나누어서 이스라엘 전역에 보냅니다. 사사기(20-21장)에 기록하고 있듯이 한 레위인이 기브아 사람들과 그들을 옹호한 베냐민 지파의 죄악을 벌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서 자기 첩의 시신을 토막내어 이스라엘 전역에 보낸 것과는 정반대 모습입니다. 사울은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절)고 거룩한 분노를 터뜨립니다. 사울은 이전에 자기 지파 베냐민이 멸절될 위기에 길르앗 야베스 처녀들로 인해 다시 소성하게 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었을 것입니다. 각 뜬 소를 본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의 두려움이 임하여 암몬과 싸우기 위해 모여듭니다.
사울이 베섹에서 군대를 세어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30만명, 유다 사람이 3만명이 모였습니다. 여기서도 유다가 따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길르앗 야베스의 전령들에게 그들 성읍으로 달려가서 내일 낮에 그 성읍이 구출받을 것이라고 말해 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전쟁하기 전에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전령들이 돌아가서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암몬 자손에게 거짓말로 내일 항복하겠으니 당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갑니다. 그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새벽에 사방으로 적진으로 치고 들어가 날이 더울 때까지 전투를 계속해 암몬군대를 완전히 도륙합니다. 암몬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두 사람이 함께 도망하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절). 여기서 우리는 왕이 되는 넷째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받은 이가 공적으로 능력을 증명하는 과정입니다. 직분자들은 그 능력을 공적으로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사울이 진두지휘하여 암몬을 크게 무찌릅니다. 이렇게 사울이 놀라운 승리를 거두자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몰려갑니다. 그들은 흥분하여 ‘사울이 도대체 뭐라고 우리를 다스리겠냐고 했던 이들을 끌어내어 죽입시다’라고 합니다. 사울은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극구 말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구원을 베풀어 주셨는데 이 날에 어떻게 동족을 죽이겠냐’고 말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길갈로 모읍니다.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절). 왜 길갈입니까? 길갈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강에서 주워온 12돌을 세운 곳, 할례를 행한 곳, 이후에 정복 전쟁시 이스라엘의 본진이 머무른 곳입니다(수 5장). 바로 그 길갈에서 이스라엘은 새롭게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공식적으로 왕으로 삼습니다. 누구도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고는 언약을 새롭게 갱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바라던 왕이 세워졌습니다. 그 왕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잘 나타내고, 하나님의 백성을 잘 이끌고 나아간다면 세상 어떤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나라, 제사장 나라, 온 세상에 복을 나누어 주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주의 백성은 그들의 욕망으로 왕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왕으로 인해 하나님을 다스림을 잘 받고, 나아가 온 세상에 복을 나누어 주는 복된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도: 모든 분노와 두려움이 다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거룩한 분노, 거룩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형제들이 조롱당할 때 저희가 ‘그럴 수도 있지’하면서 지나가지 않고 분노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영광이 짓밟힐 때 저희가 대수롭잖게 생각하지 않고 벌벌 떨게 하여 주소서. 세상 사람들이 저희를 향해 '너무나 착한 사람처럼 보이더니 분노할 줄 아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게 하소서. '너무나 당당하더니 저렇게 겁낼 줄도 알구나'라는 소리를 듣게 하여 주소서. 저희의 이런 분노와 겁냄이 오히려 믿음직하게 보이게 하여 주소서.
사무엘상 12장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에 사무엘은 고별사와 같은 말을 합니다. 역사적 장소인 길갈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했기 때문에 사무엘은 이제 물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나온 구속의 역사를 회고하는 긴 설교를 합니다. 먼저, 사무엘은 자기가 어떻게 사사로 일했는지 너희들이 알고 있지 않냐고 묻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속이거나, 뇌물을 받거나, 그들의 것을 빼앗거나 압제한 적이 있는지 묻습니다. 백성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사무엘은 백성을 향해 ‘너희와 기름부어 세운 왕이 내 손에서 아무 잘못도 찾아낸 것이 없다고 증언했다’고 확인합니다( 절). 백성들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이제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신 구속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말합니다. 출애굽의 역사와 사사시대의 역사를 회상합니다. 야곱이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간 일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이 압제를 당하여 고통중에 부르짖을 때에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그들을 건져내어 주신 일이며, 광야여정을 거쳐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이르러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쳐 주신 일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쉽게 주님을 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위 왕들에게 넘기십니다.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셔서 건져주십니다. 그런데도 가장 최근에 암몬 왕 나하스가 쳐들어오자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귀찮아졌는지 왕을 세워달라고 구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거역하는 마음으로 왕을 세워달라고 했지만 그 왕과 함께 하나님을 따른다면 형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절). 하나님을 거역하면 속히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한 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즉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눈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건기 때인 밀 베는 당시에 하늘에서 천둥 벼락이 치고, 비가 쏟아져 내리게 하십니다( 절). 온 백성이 벌벌 떨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칩니다. 사무엘은 겁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주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무척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 주님의 그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겠다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가르치겠다고 말합니다. 백성을 향해서는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절)고 권면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택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기도: 저희의 기억력이 문제입니다. 금방 잊습니다. 깜박깜박합니다. 자신이 한 일을 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습니다. 이 두가지 잊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한 일을 잊는 것은 건망증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는 것은 완악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가 자신이 한 일은 쉽게 잊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은 잊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사무엘상 13장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가 30세입니다. 그는 42년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군대를 모아 쳐들어 온 암몬 족속과 싸워 물리쳤습니다. 이후로 그는 블레셋 족속과의 일전을 벌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블레셋 족속의 압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군대를 돌려보내고 겨우 3천명의 친위대만 남겨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부대를 나누어 2천명은 막마스와 벧엘 산지에 두고, 1천명은 아들 요나단에 붙여 기브아에 주둔하게 했습니다. 요나단이 게바에 진치고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칩니다.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입니까? 아닙니다. 의로운 분노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블레셋의 대반격이 예상되기에 왕 사울은 나팔을 불어 전국에 군인 소집령을 내립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마움을 샀다는 말을 들은 이들로 길갈로 모여듭니다( 절).
엄청난 블레셋 군대가 몰려와 믹마스에 진을 칩니다. 전차가 3만대, 기마병이 6천명,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군대의 어마어마한 숫자에,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을 포위하여 압살하려는 것을 보고는 굴이나 숲, 바위틈이나 웅덩이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요단강을 건너 갓과 길르앗 지역으로 도망쳤습니다. 왕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렸습니다. 7일후에 와서 기도해주고, 제사를 드려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이 나라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쟁은 거룩한 일로써 이스라엘은 전쟁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참조, 시 20편). 군인들을 술렁거리면서 도망치기에 바쁜데 사무엘이 약속한 날자에 오지 않습니다. 안전부절해 하다가 사울은 제물을 가져오라고 하고는 직접 번제를 드립니다( 절).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한 용도로 사용합니다. 당시 이방의 왕들은 제사장 역할까지도 맡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러면 안되었습니다. 제사는 제사장이 주관해야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했습니다.
번제를 드리자마다 사무엘이 도착하여 뭘 하고 있냐고 호통을 칩니다. 왕 사울은 ‘약속한 시간이 되었는데도 당신이 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제사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약속한 시간 내로 오지 않은 것이 문제이지 내가 하나님께 열심을 내어 제사한 것이 뭐가 문제냐?’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왕이 명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절)라고 쏘아 붙입니다.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더라면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이’를 왕으로 세우실 것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이것이 그렇게 심각한 죄라는 말입니까?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제사했는데 그것이 죄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왕 사울은 다급한 마음에 자기 마음대로 제사했습니다. 그는 기다리지도 못했고,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는 전쟁을 지켜보지도 않고 휑하니 길갈을 거쳐 베냐민지파의 땅 기브아로 올라가 버립니다. 사울은 당황하고, 군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6백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특공대를 셋으로 나누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안에는 대장간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블레셋 사람들이 대장간을 다 허물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사철이 되면 블레셋으로 가서 돈을 주고 보습이나 곡괭이, 도끼나 낫을 벼려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군대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습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만 무기를 갖추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군인과 무기로 보자면 이 전쟁은 하나 마나입니다. 이런 비교가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작금의 이스라엘 군대와 가자지구의 하마스간의 싸움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기도: 저희는 마음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예배할 때가 많습니다. 다급한 상황이기에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라면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예배하는 것,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기 위해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희의 예배, 기도, 헌신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튀어나오게 하는 자판기 버튼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소서. 기도하기만 하면, 예배하기만 하면, 헌신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만큼 큰 미신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기다릴 수 있게 하시고, 순종하면서 기다리게 하여 주소서.
사무엘상 14장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요나단을 통해 승리를 주셨습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병기 든 소년과 함께 단신으로 블레셋의 전초부대를 향해 뛰어듭니다. 아버지인 왕 사울에게 알리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절)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무기 든 소년은 요나단의 믿음에 호응합니다. 그를 따르겠다고 합니다. 요나단은 내기와 같은 것을 겁니다. 블레셋의 전초부대에 가까이 가면 그들이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에게로 올라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신 표시라고 말하면서 가까이 갑니다. 블레셋 전초부대는 두더지같이 숨어있는 이스라엘 사람이 구멍에서 나왔다고 조롱하면서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한번 맞짱뜨자고 합니다. 요나단은 용기백배하여 언덕을 기어 올라가 블레셋 부대를 칩니다. 블레셋 전초부대가 이리 픽, 저리 픽하고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블레셋 군대는 겁에 질립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왕 사울은 자기가 속한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서 진치고 있었는데 저 멀리 언덕 위 블레셋 전초부대가 이러 저리 흩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사울에게 보고하고 사울은 누가 블레셋 군대를 향해 나갔는지 점호해 보라고 합니다. 요나단과 호위하는 무기 든 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그제서야 왕 사울은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제사장에게 손을 거두라고 합니다( 절).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겠다는 것이지만 가로 늦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확보하겠다고 나섭니다. 블레셋 진영은 소란이 더 커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까이 가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블레셋 군인들이 칼로 서로를 치고 있습니다. 블레셋 군인들에게 항복하여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을 치기 시작하고. 도망치고 숨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진영으로 되돌아와 전투에 동참합니다. 그들은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블레셋 군대를 치고, 도망가는 블레셋 군사들을 뒤쫓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어마 어마했기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적을 쳐도 쳐도 끝이 없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을 완전히 작살을 내겠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그날에 어떤 음식이라도 입에 대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솔한 명령을 합니다( 절). 이스라엘 군대가 도망치는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면서 기진맥진합니다. 수풀을 헤치고 가면서 땅에 흐르는 꿀을 발견하고도 감히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왕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왕의 그 명령을 못 들었기 때문에 도중에 꿀을 발견하고는 찍어 먹고 힘을 얻어 멀리까지 추격합니다. 이후에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명령한 것을 듣고는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은 저주를 했냐고 안타까워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지쳐서 블레셋 군대를 쫓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믹마스에서 아얄론까지 20킬로미터나 추격하던 이스라엘 군대는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탈취한 짐승들을 잡아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를 허겁지겁 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째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말입니다. 사울은 아차 싶어 큰 돌을 굴려 오게 하고는 그 바위 위에서 짐승을 잡아 먹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나님께서 저주하시는 것을 막아보려는 것입니다.
사울은 한밤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틀 때까지 블레셋을 추격하도록 명령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자기들 손에 넘겨주시겠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시니까 이스라엘 가운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제비를 뽑습니다. 그러면서 죄를 지은 사람이 누구든지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아들 요나단도 예외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요나단이 덜컥 뽑힙니다. 왕 사울이 깜짝 놀라면서 전쟁 와중에 죄를 지은 일이 있냐고 묻습니다. 요나단은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숲을 지나면서 꿀을 뜨서 먹었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기에 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의 경솔한 모습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한 형식주의적인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는 욕심에서 내뱉은 저주를 형식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다 보니 꿀을 찍어 먹은 요나단을 죽이려고 하는 형식성을 보입니다. 이때 백성들이 막아섭니다. 요나단이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서가서 하나님의 싸움을 싸워 우리를 구원했는데 그를 죽이는 것이 말이 되냐고 말합니다( 절). 왕보다 백성들이 더 현명합니다. 이처럼 사울이 경솔하고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대적으로부터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통해 주위 대적들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기도: 저희는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합니다. 믿는 저희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어쨌든 하나님이 저희 편이 되어 싸워주시려는 마음을 먹게 해야 합니다. 저희가 화끈하게 맹세하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함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저희가 맹목적인 맹세를 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허약한 자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맹세도 탐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을 내어 맡기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말렉(참고, 신 25:17-19)이 광야여정시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을 기억하여 완전히 멸절시키라고 하십니다( 절). 아말렉은 피곤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미를 쳤습니다. 아주 야비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 아말렉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처럼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짐승도 다 죽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 아말렉을 멸절시키라는 말씀을 왕 사울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 가운데 거주하던 겐 사람들(모세의 장인족속)을 아말렉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잘 대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울은 하월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을 칩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짐승들을 남깁니다. 사람이 아닌데 그런 짐승까지 굳이 죽일 필요가 있냐고 생각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아간처럼 제일 좋은 것들을 남기고 훔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자기의 명성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기 욕심과 백성들의 민원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고 밝힙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무엘은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사울을 찾아갑니다. 그는 사울이 자기를 위해 기념비마저 세웠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예방을 받고는 기분 좋아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자기 귀에 들리는 짐승들의 소리는 뭐냐고 하니까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좋은 것들을 남겼다고 둘러댑니다. 사무엘은 왕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탈취하기에만 급급했다고 책망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셨는데 이제는 너무 커져서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유명한 말인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절)고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과 완고한 것이 점치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자신이 백성의 소리를 더 크게 들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왕을 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도 사울을 버려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다급하게 사무엘을 붙잡습니다. 자기와 함께 돌아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달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자기 옆에 서 주는 연출만 해 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신뢰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떠나가지 못하도록 그의 옷을 꽉 붙잡자 사무엘이 뿌리치면서 옷이 찢어집니다. 사무엘은 자기 옷을 찢어진 것을 가지고 실물교육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찢어 내어서 사울보다 나은 이웃에게 넘겨 주겠다고 말합니다( 절). 사울은 이런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위신을 세워달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위신만 서면 다른 것은 무엇이든지 괜찮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가지만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살려서 사울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끌고 온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아각은 사울과 사무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면서 자기를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뻐합니다. 사무엘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절). 하나님께서는 아각의 잔인함 그대로 갚으십니다. 사무엘은 칼로 아각을 찌르고 난도질합니다. 사무엘은 라마로 돌아갔고, 사울도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이후로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의 얼굴을 보지 않습ㅈ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가슴아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밝혀 주셨듯이 사울보다 더 나은 왕이 세워질 것입니다. 메시아의 왕권을 준비하고 예표하는 새로운 왕이 이스라엘에 세워질 것입니다.
기도: 저희는 저희 위신과 명예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모욕을 당하거나 굴욕을 당하면 반드시 갚아주려고 합니다. 반대로, 저희는 자신의 위신과 명예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저희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회개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도 그것이 저희의 위신과 명예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저희 위신과 명예를 세우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둘러대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게 하소서.
사무엘상 16장
하나님께서는 슬픔에 잠겨있는 사무엘에게 새로운 왕을 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뿔에 기름을 채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의 아들들 중에서 하나를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사무엘이 두려워합니다. 왕 사울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를 죽이려고 들지 않겠습니까? 이미 사울에게 다른 이를 왕으로 세우겠다고 말한 바가 있으니 말입니다(13:14, 15:28).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면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흉내를 내라고 하십니다. 이새를 그 제사에 부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십니다( 절). 거짓말하고, 거짓을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사하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 왕을 세우는 것과 다릅니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그 성읍의 장로들이 두려워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떨었는데(14:15) 이번에는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방문을 받은 장로들이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하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제사하자고 하면서 이새의 그의 아들들도 함께 청합니다.
자, 그럼 새로운 왕을 세우는 네 과정을 살펴봅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왕을 택하기로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절)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무엘은 여덟 아들 중 막내 다윗에게 가지고 갔던 기름을 붓습니다. 처음에 사무엘은 첫째 아들 엘리압의 준수한 용모를 보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키와 용모를 보지 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을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절). 둘째 아비나답이 사무엘 앞에 섰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갔는데 다 아니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다른 아들이 있냐고 물었더니 막내가 양을 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새는 막내아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 막내를 불러오라고 말합니다. 그가 오기 전에는 식사자리에 앉지 않겠다고 합니다. 막내 다윗이 왔습니다. ‘그의 얼굴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용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겠다고 하셨는데 뭐가 다릅니까?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니까 즉시로 성령께서 임합니다( 절). 이것이 셋째 과정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선택과 기름부음은 사무엘 자신도 깨닫지 못했듯이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미가 5:2에서 베들레헴이 선택된 것도 보십시오).
기름부음을 받자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습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는 즉시로 사울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한 신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합니다( 절). 이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자녀에서 제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이 다윗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이 악한 신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니까 신하들이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왕의 심신을 안정시키면 어떻냐고 제안합니다. 사울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구해오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다윗을 추천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수금을 잘 타고, 힘이 세고, 전쟁을 잘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부릅니다. 이새는 왕에게 바칠 예물과 함께 아들 다윗을 보냅니다. 사울은 다윗을 만나보고는 그를 아낍니다. 바로 옆에 두고는 자기를 위해 무기드는 자로 삼습니다. 자기의 안전을 다윗에게 맡겼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수금을 타서 왕 사울을 괴롭히는 악한 신을 물리칩니다( 절). 이것이 넷째 과정입니다. 기름부음받은 다윗의 능력이 사울의 왕궁에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악을 통해 우리 심신에 안정을 주십니다. 물론, 음악이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음악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기도: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어떻게 어울립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을 갖춘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그것에 근거하여 선택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내다보고 선택하신다면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후승인에 불과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시는 것도 아님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만들어가시는데, 우리의 중심도 만드신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무엘상 17장
다윗의 직분수행능력이 이제 온 이스라엘 앞에서 증명되는 날이 왔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합니다. 블레셋은 유다지파의 땅 에베스담밈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군대는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칩니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이 두 산에 진을 쳤습니다. 블레셋에서 가드출신의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나와서 싸움을 돋웁니다. 그는 키가 3미터나 되었고, 갑옷무게도 57kg, 창은 7kg이나 됩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독하면서 싸울 사람을 내보내라고 합니다. 그와 싸워 자기가 죽으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그가 죽으면 너희가 우리 종이 되어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절). 사울의 군사 중에서는 한 사람도 감히 나가서 싸울 용기를 내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사울의 왕궁과 부친의 집을 왕래하던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명령으로 형들을 위해 전쟁터를 방문합니다. 형들 셋이 소집되어 이 전쟁터에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에게 형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보냈습니다. 형들의 안부를 묻고 있는 와중에 골리앗이 다시 나와서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어느 구두도 나서지는 못하고 자기들끼리 말합니다. 왕이 저 골리앗을 쳐서 죽이면 많은 재물을 주고, 왕의 사위로 삼고, 모든 세금도 면제해 주겠다고 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런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골리앗의 방자함을 보고는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고 소리칩니다. 다윗의 큰 형 엘리압이 다윗의 말을 듣고는 크게 화를 냅니다. 조그만 아이가 자기들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군사 하나가 왕 사울에게 가서 알립니다. 사울이 다윗을 불러 나가서 골리앗과 싸울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양을 칠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양떼를 치면서 사자와 곰이 양떼를 공격할 때에 자기가 쳐 죽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골리앗도 충분히 죽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군복을 입혀 주었더니 맞지 않아서 벗어버리고는 물매와 매끄러운 돌 다섯개만 가지고 나갑니다.
골리앗이 방패든 사람을 앞세우고 이스라엘 진영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를 향해 나갑니다. 웃기지도 않습니다. 골리앗을 나를 개로 생각하고 개를 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왔냐고 하면서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다윗은 비웃으면서 다가오는 골리앗을 향해 그가 모욕한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절). 다윗이 다시금 말합니다. 블레셋과의 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전쟁이라고 선언합니다( 절). 이렇게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물매돌을 날려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힙니다. 골리앗은 한 번에 꽈당하고 넘어가 버렸습니다. 다윗은 자기 손에 칼이 없었기에 골리앗의 칼을 빼어 그의 목을 칩니다. 이 광경을 본 블레셋은 혼비백산하여 도망하고 이스라엘은 와 소리를 지르면서 뒤쫓아가 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블레셋의 유명도시인 에그론 성문까지 뒤쫓아 가면서 쳤습니다. 왕 사울은 골리앗의 머리를 베어서 들고 온 다윗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이미 왕궁에 불러 그를 섬기게 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출처를 묻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제 다윗이 공적으로 그의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아니,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지가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세상과 죄와 사탄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참조, 롬 8:37-39).
기도: 저희는 저희 인격이 모욕당하면 참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은 쉽게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니 그분을 모독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인격이 모독당하는 것은 묵묵히 견디게 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은 참지 않도록 하소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절제된 분노를 터뜨리면 됩니다. 아니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면 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저희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게 하소서.
사무엘상 18장
다윗이 점차 미래의 왕으로서 인정되어 가는 과정을 18장부터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신임하여 그를 왕궁에 둡니다. 다윗이 사울의 무기를 들고 다녔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대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둡니다. 왕의 신임이 더 두터워집니다. 이상하게도 사울의 왕위를 이을 요나단도 다윗을 사랑합니다. 왕위를 놓고 경쟁대상자가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요나단은 아직은 모르고 있겠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기름부어 세우셨습니다. 요나단은 그런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언약을 맺습니다( 절). 요나단은 자기 옷을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동성애기질을 가진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단순히 친구간의 우정도 아닙니다. 요나단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을 생명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요나단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온 백성과 사울의 신하들도 다윗이 군대장관이 된 것을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절).
어느 순간부터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맞는 부녀자들이 춤추고 소고와 경쇠를 치면서 노래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고 노래합니다. 사울이 그 소리를 듣고는 심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다윗이 자기의 왕 자리를 노릴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왕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여 죽일 기회를 엿봅니다. 다윗이 그를 위해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창을 던져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합니다. 다윗이 겨우 피합니다. 그런 일이 또 다시 일어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고 그를 두려워합니다( 절). 사울은 다윗을 왕궁에서 내쫓아 천부장으로 삼아 백성들 가운데 행하게 합니다. 좌천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윗을 더 신뢰합니다. 왕 사울은 점점 더 다윗을 두려워합니다.
사울은 안되겠다 싶어 다시금 다윗을 부릅니다. 자기 옆에 붙잡아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큰 딸 메랍의 사위로 삼겠으니 나가서 블레셋과 싸우라고 합니다.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 블레셋 군대에 의해 죽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 블레셋과 싸우는데, 사울은 자기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립니다. 사울은 자기 다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다윗에게 보내서 올무에 걸리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신하들을 보내서 왕의 부마가 되라고 하는데 다윗은 다시금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절). 사울이 이 말을 전해듣고는 다시금 신하들을 보내서 왕이 원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목숨뿐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나가서 다시금 블레셋과 싸우고 사울이 요구한 것의 두 배의 목숨을 빼앗아 가져다 줍니다. 사울은 어쩔 수 없이 딸 미갈을 다윗에게 시집보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고 더더욱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미워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절). 다윗은 블레셋과 싸울 때마다 항상 앞장서 나갑니다. 다윗의 이름이 점점 더 칭송받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왕됨은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입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사람이 눈멀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크게 눈 머는 것은 질투심 때문입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히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질투심은 저희 눈을 멀게 만들고, 모든 것을 왜곡해서 보게 만듭니다. 저희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저희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을 저희 경쟁자로 생각합니다. 인생살이를 제로섬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도우는 것만큼 저희가 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을 도우시는 것을 보면서 저희를 도우신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무엘상 19장
사울이 아들 요나단과 군인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요나단은 왕을 피해서 숨어 있던 다윗에게 가서 자기 아버지인 왕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고 알려줍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숨어 있는 곳 가까이에서 자기 아버지 사울이 하는 말을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칭찬합니다. 다윗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블레셋과 싸웠고, 이스라엘에 큰 구원을 안겨 주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왕에 대해 역심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절). 왕 사울은 아들 요나단의 말을 듣고는 마음이 찔려서 뉘우칩니다. 그리고는 맹세합니다. 다윗이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요나단이 숨어 있던 다윗을 불러 왕 앞으로 인도합니다.
다윗은 또 다시 전쟁터에 나가서 블레셋을 쳐 부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왕궁에서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사울이 또 다시 악한 신에게 사로잡혀 다윗을 향해 단창을 던집니다. 가까스로 피한 다윗은 바로 집으로 도피합니다. 사울의 군사들이 다윗의 집을 밤새 포위하고는 아침에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이 창문으로 다윗을 달아 내려주어 피하게 해 줍니다.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절). 그녀는 다윗이 잠자고 있는 것처럼 속이기 위해 침대에 우상을 눕힙니다. 염소털로 그 머리에 씌우고 옷도 입혀서 사람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에게 합니다. 군인들이 집안으로 쳐들어오자 자기 남편이 병들어 누워 있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침상채 들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침실에 들어가 보니 사람이 아닙니다. 사울이 자기 딸 미갈에게 왜 내 원수인데 그렇게 했냐고 힐난하니 남편이 자기를 위협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거짓말합니다. 사울의 아들과 딸조차 다윗 편을 듭니다.
사울이 끈질깁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내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친 다윗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말씀있는 곳)에게 갑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다 고합니다. 다윗이 사무엘과 함께 라마 나욧에 있다는 말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끌고 오기 위해 군대를 보냅니다. 사울이 보낸 군대가 사울과 선지자 무리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순간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무장해제시키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거듭 군대를 보냅니다. 두 번, 세 번까지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할 수 없어 사울이 친히 무장하고 쫓아옵니다. 사울이 사무엘과 다윗에게 가까이 가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사울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의미로 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억제하여 다윗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임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루 종일 밤 늦게까지 벌거벗은 채 누워서 꼼짝하지도 못했습니다( 절). 사울이 기름부음받았을 때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예언했었는데, 이제 다윗을 죽이려고 왔는데 성령께서 임하셔서 예언합니다. 성령께서 사울을 제어하기 위해, 그를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임하셨습니다. 다윗이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름부음받은 당신의 왕을 지키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핍박받는 교회를 보호하시기 위해 큰 열심으로 일하십니다.
기도: 저희는 성령께서 능력을 주시기 위해 임하신다고만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주의 백성에게만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악한 이들에게도 임하십니다. 그들을 억누르기 위해 임하십니다. 그들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임하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힘을 빼내기 위해 임하실 때도 있습니다. 저희에게도 악한 기운을 빼내기 위해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시기 질투심으로 싸우고 죽이려는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레슬링에서 하듯이 저희 악한 마음을 꺾고 누르고 졸라 주시고, 반대로 순종할 힘을 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무엘상 20장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도망한 다윗은 자기를 만나러 온 요나단에게 말합니다. “도대체 내가 뭘 했길래,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네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고 하냐?”고 묻습니다. 몰라서 묻습니까? 아닙니다. 알지만 너무나 답답해서 묻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숨기는 것이 없으니 너를 죽이려고 한다면 나에게 알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 아들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기는 죽음 문턱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요나단에게 내일이 초하루인데 자신이 왕을 모시고 식탁에 앉아야 하는데 자기가 없는 것에 대해 왕이 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베들레헴 아버지 집에 가서 해마다 드리는 매년제사를 드리러 가야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해서 갔다고 말해 달라고 합니다. 왕이 알겠다고 하면 괜찮겠지만 화를 내면 자기를 해치려고 결심한 줄 알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가 있으면 여기서 자기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절).
요나단은 다윗과 함께 들판으로 나가서 말합니다. 다시 한번 더 다윗의 결백을 인정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 주겠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다윗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기에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말합니다. 웃기는 말이 아닙니까? 지금 다윗이 죽을 위기에 있는데 요나단은 도리어 자기를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윗과 언약을 맺고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절).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그는 왕의 아들이기에 차기 왕권을 주장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신 것을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예상한 대로 월삭이 되어 왕궁에서 식사할 때 왕이 다윗에 대해 물을 것을 예상합니다. 그래서 다윗을 숨어 있게 하고는 왕의 반응을 보고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서로 신호를 맞추어 놓습니다. 다윗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본 사울이 첫날에는 그냥 지나갔는데 다음 날에도 다윗이 자리를 비우자 묻습니다. 요나단은 월삭이 되어 다윗이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감싸는 요나단에게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다윗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고 폭언을 합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절). 요나단이 다시금 다윗을 변호하자 사울은 요나단도 죽이려고 창을 던집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을 보고는 약속한 대로 다윗이 숨어 있는 들로 나가서 서로 맞추어 놓았던 신호를 내보냅니다. 한 소년을 데리고 가서 활을 멀리 쏘고는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라고 외칩니다. ‘빨리 달려가서 화살을 주워 오라’고 외칩니다. 그 소년이 화살을 주워 왔지만 그것이 신호라는 것을 모릅니다. 요나단은 그 소년에게 자기 무기를 주고는 성읍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요나단이 바위에 숨어 있는 다윗에게로 갑니다. 다윗은 세 번이나 절합니다. 둘은 서로 입을 맞추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고 서로 언약한 것을 확인시킵니다( 절). 요나단은 성으로 돌아가고, 다윗은 드디어 방랑의 길을 떠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세우신 다윗을 인정하고, 그를 지키고, 그 앞에 굴복합니다.
기도: 나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위대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저희와 경쟁관계에 있는 이들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 그 직분의 권위를 인정하게 복종할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서로 복종하는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세우십니다. 시기 질투, 투쟁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세웁니다. 기득권을 내려놓게 하시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의 겸손한 섬김과 서로 복종하는 것과 상호간에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을 통해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하여 주소서.
사무엘상 21장, 시편 34,56편
다윗의 방황, 아니 망명이 시작됩니다. 다윗은 놉(사울이 머물던 기브아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갑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홀로 온 것을 보고 다급한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하면서 영접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명령을 받아서 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면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다고 거짓말합니다. 그리고는 먹을 것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자기 부하들을 어느 장소로 오라고 했는데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히멜렉은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최근에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그 진설병을 주겠다고 합니다( 절). 이 진설병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날마다 여호와 앞에 만들어 드리는 떡입니다. 떡상에 매일마다 차려놓는 이 떡은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에게 광야에서 하늘음식을 내려주셨던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했습니다.
떡을 받은 다윗은 자기에게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제사장에게 칼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왕의 명령이 급하게 내려져서 자기가 무기를 갖추지 못하고 떠나왔다고 거짓말합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당신이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골리앗의 칼이 보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절). 다윗은 그와 같은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그 칼을 얻어 떠납니다. 도망가던 다윗은 위협을 느껴 칼을 구했지만 그는 그 칼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가 골리앗을 죽일 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 갔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골리앗의 그 칼은 칼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표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그 칼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그 칼이 주는 교훈, 즉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교훈을 늘 받아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내에 머물러 있다가는 죽겠다 싶어서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갑니다. 자기 손에 들린 칼이 바로 이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인데 그가 죽은 골리앗의 땅으로 망명을 갑니다. 아마도 다윗은 자기가 블레셋에 망명신청을 하면 사울의 미움을 받았고, 그래서 이제는 블레셋 편이 되었다고 생각해줄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예상대로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는 말합니다.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칭송을 듣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의 원수이니 당장 쳐 죽이자고 말합니다. 다윗은 혼비백산하여 미친 척 합니다. 그는 성문짝에 알아보지도 못한 글자를 긁적거리고, 침을 질질 흘립니다( 절). 아기스는 왠 미치광이를 나에게 데려왔냐고 하면서 다윗을 쫓아냅니다. 다윗이 겨우 목숨을 부지합니다. 그는 아기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난 다음에 하나님의 건져주심을 찬양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던 자신을 젊은 사자(시 34: )에 비유하고, 생명의 빛(시 56: )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어쩔 수없이 이스라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이방 땅에서 목숨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기 가운데서 다윗을 연단하고 계십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 자기 백성을 버리고 떠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과 달리 우리 주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 입장이 되어 주시고, 그들 자리에 서셔서 우리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기도: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필요를 아십니다. 저희가 배고플 때 떡을 주시고, 저희가 스스로 방어하도록 칼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저희가 저희의 판단실수로 저희가 스스로 판 구덩이에 빠질 때에도 하나님께서 저희를 지켜 보호하십니다. 저희가 저희 뼈아픈 실수로 심히 큰 모욕과 수치를 경험하도록 하시면서 저희를 연단하십니다. 저희가 저희 수완과 능력으로 무언가를 할 때보다 저희가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더 잘 지키시고 놓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무엘상 22장, 시편 52,57편
블레셋 가드로 망명가서 겨우 목숨을 건진 다윗은 아둘람 굴로 도망을 갑니다. 아둘람은 이스라엘 서남쪽인 쉐펠라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석회암 동굴이 많은 곳입니다. 아마도 블레셋과 유다지파가 받은 땅 접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변경이기는 하지만 장래의 왕이 그의 백성 가까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다윗에게 몰려듭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입니다( 절). 다윗은 그들의 장관이 됩니다. 400명이나 몰려 왔습니다. 이제 다윗은 칼로서 살아가는 일종의 비합법적인 통치자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은 그가 모든 연약한 자들의 위로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가서 혼이 난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해 동쪽에 위치한 모압땅 미스베로 도망갑니다. 다윗은 모압 왕과 동맹을 맺고 자기의 부모를 모압에 피신시키고자 왔으니 머물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선지자 갓(삼하 24:11; 대상 29:29; 대하 29:25)이 다윗과 동행합니다. 부모를 피신시킨 후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아둘람 굴을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절). 다윗은 무리를 이끌고 헤렛 숲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고난이 심해도 자기 백성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왕 사울은 자기가 속한 베냐민 기브아에 머물러 있었는데 베냐민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립니다. 자기 아들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맺고 숨어서 자기를 치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나의 지파 사람인 너희가 다윗이 숨어 있는 것을 알리지 않았느냐고 다그칩니다. 이제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그러자 에돔 사람 도엑이 일어나 다윗을 피신시킨 제사장 아히멜렉을 사울에게 고발합니다. 에돔인은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불행을 기뻐한 자들입니다(시 52편; 오바댜). 다윗은 이런 간사한 자가 그물을 준비하였다고 말하면서(시 57: ), 자신을 푸른 감람나무에 비유합니다(시 52: ). 오늘날도 교회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을 때에 우리가 어디에 속하여 있는지를 명확히 알게 됩니다.
왕 사울이 제사장 아히멜렉을 잡아오라고 명령합니다. 왕 사울은 왜 다윗과 공모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매복했다가 자기를 치게 했냐고 추궁합니다. 아히멜렉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다윗을 편듭니다. 다윗은 충실한 사람이요, 왕의 사위요, 왕의 호위대장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절). 자신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물은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왕은 자기 좌우에 있는 호위병들에게 제사장을 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들이 제사장 치기를 주저하고 있으니 왕에게 빌붙은 도엑이 제사장 85명과 성읍 놉의 사람들과 짐승들도 칼도 다 죽입니다. 겨우 살아남은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도망갑니다. 다윗은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자기 곁에 둡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절). 제사장 엘리멜렉은 제사장 엘리의 손자인데, 엘리멜렉과 그의 자손이 전멸한 것은 하나님을 멸시한 제사장 엘리가문을 하나님께서 제거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삼상 2:27-33).
기도: 간사한 혀를 놀려서 이간질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거짓말로 상황을 호도하면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힘있는 자들 편에 빌붙어서 남을 해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혀를 자랑하고, 자기 재물을 자랑하고, 자기 계략을 자랑하는 이들을 반드시 무너뜨립니다. 이와 달리 아무 힘이 없는 이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소망을 둡니다. 저희가 악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무성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집에 옮겨심은 청청한 나무가 되도록 도와 주소서. 그리하여 계절마다 남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과일을 맺는 나무가 되게 도와 주소서.
사무엘상 23장, 시편 54편
다윗은 쫓겨 다니는 상황에서도 유다지파의 땅 그일라가 블레셋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타작마당까지 탈취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고자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가서 싸워도 되겠는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지금 도망다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자청해서 하느냐고 말립니다.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것이리이까”( 절). 다윗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다윗이 무리의 반대가 크기에 다시금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블레셋을 다윗 손에 붙이겠다고 하십니다. 다윗이 블레셋 군대를 쳐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고 옵니다. 다윗은 자기 백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내려옵니다. 사울은 다윗을 그일라 성읍에 가두고는 그를 치려고 합니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는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묻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달라고 합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울에게 넘겨줄지를 물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일라 주민들이 다윗을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절).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이방인들에게 구원받을 때는 좋아해 놓고 구원받고 나니까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는 왕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요 1:11).
다윗은 다시 황무지를 방황합니다. 사울이 온 군대를 풀어 들쑤시면서 다윗을 찾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십니다( 절). 다윗이 십 광야 숲에 들어갔을 때에 요나단이 몰래 다윗을 만나러 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임을 다시 한번 더 확증시켜 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절). 다윗의 헤브론 남쪽 십 광야에 숨어있을 때에 그곳 사람들이 사울에게 찾아가서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줍니다. 사울이 그들을 축복합니다. 더 자세히 살펴서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말합니다. 다시금 다윗이 십광야 남쪽 8킬로쯤 떨어져 있는 마온 광야 아라바로 도망가고 사울이 급습합니다. 산으로 뒤쫓아오자 다윗이 급하게 피하려 했는데 독 안에 든 쥐처럼 에워싸일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전령이 와서 블레셋 사람이 쳐들어 왔다고 알립니다. 사울은 어쩔 수 없이 황급히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셀라하마느곳’(분리하는 바위)라고 이름짓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분리시키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남쪽 변경에서 올라가서 사해와 딱 붙은 엔게디 요새로 숨어들어 갑니다. 이런 경험 후 다윗은 낙헌제로 주께 감사합니다(시 54: ). 하나님은 택하신 종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기도: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문제도 아닌데 괜히 쓸데없이 관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앞가림도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그냥 있지 못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오지랖이 넓은 사람입니다. 혼자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이들의 문제가 곧 자기 문제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결되기 위해서 이 땅으로 오셨듯이 저희가 거룩한 연결고리가 되도록 도와 주소서.
사무엘상 24장, 시편 63,142편
사울은 다윗을 쫓아 포위해 들어가 딱 치려고 하는 순간에 블레셋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황급히 돌아갑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끝나고 한숨을 돌리자마자 다시 3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쫓습니다. 정말 끈질깁니다. 사울은 다윗이 도망간 엔게디 황무지까지 쫓아가서 ‘들염소 바위’라는 곳까지 쫓아갑니다. 그 길 옆에 양 우리가 많은 곳에 굴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 굴에 들어갑니다. 그 굴 속 깊숙한 곳에 다윗과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것도 모르고 그 굴 입구에 보초를 세워놓고 굴 속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속삭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셨던 말씀이라고 하면서 속삭입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그러나 다윗은 보복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절).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조금 벨 뿐이었습니다.
사울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 것도 모른 채 쉬고 나서는 굴에서 나갑니다. 사울의 옷자락을 살짝 벤 다윗도 그 굴에서 나갑니다. 사울이 저 멀리 가고 있는 것을 본 다윗은 왕 사울을 부릅니다. 다윗은 사울을 향해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왜 자신이 왕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리에 넘어갔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굴에서 왕을 넘겨 주셨는데 자신은 왕을 해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벤 사울의 겉옷자락을 흔들어 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왕 사이에 판단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보복하시겠지만 자신은 왕을 해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죽은 개 같은, 그리고 벼룩 같은 자기를 쫓아다닌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마지막 고백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절). 이렇게 다윗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피난처로 삼았으며(시 142: ),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같이 그의 영혼이 만족함을 얻었습니다(시 63: ). 하나님께서 택하신 핍박받는 왕의 손에는 불의의 피가 묻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사울의 피에 대해서 깨끗했습니다.
다윗의 말을 들은 왕 사울이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내가 무엇에 홀려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소리 높여서 웁니다. 다윗을 향해 ‘내 아들아’라고 소리칩니다. 자신은 다윗을 학대했지만 다윗은 그것에 대해 앙갚음하지 않고 자기를 살려주었으니 다윗이 의롭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불의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이 다윗의 원수였는데 자기를 살려주었으니 하나님께서 그 선에 대해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는 알면서도 시기 질투심에 지금까지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실토합니다. 이어 사울은 다윗에게 간청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면 자기 후손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절). 다윗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왕을 대적하지 않고 영접하고 그분에게 무릎 꿇는 것이 영원한 복락과 희락의 길입니다.
기도: 다윗은 자기 손으로 악한 사울을 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종을 자기 손으로 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주의 종을 해치려고 하면 벌 받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처리하시지 사람이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 자체가 위협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직분자가 어떤 잘못을 하고 죄를 지어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까? 저희는 부모를 포함하여 직분자의 '약점과 부족에 대해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저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직분자를 몰아내기 위해 세를 키워서 혁명을 일으키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를 기다리게 하여 주소서.
사무엘상 25장
다윗이 광야로 도망 다닐 때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합니다. 온 이스라엘 자손이 슬피 웁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듭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바란(마온?) 광야로 도망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계속해서 이곳 저곳 도망다니고 있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온 출신 나발이라고 하는 거부(양 3천, 염소 1천)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도망다니는 와중이었지만 그 사람의 가축떼를 보호해 주고 약탈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윗이 나발이 주로 목축하던 갈멜로 자기 소년 10명을 보내어서 먹을 것을 좀 구했습니다.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절). 그 말을 듣자 거만한 나발은 무슨 작자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왜 자기가 먹을 것을 주느냐고 대꾸합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절). 나발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될 다윗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후원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소년들을 통해 나발의 말을 들은 다윗은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나발을 죽이려고 친히 400명을 이끌고 달려갑니다. 다윗은 자기가 나발의 소유물을 지켜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해 준 것이 허사였다고 말합니다( 절). 나발은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다윗은 나발의 소유와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멸하기로 작정합니다. 다윗이 자제력을 잃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다윗이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왕이 백성의 피를 흘려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사태를 전해 들은 아비가일이 급히 먹을 것(떡 200덩이, 포도주 2부대, 요리한 양 5마리, 볶은 곡식 35리터, 건포도 1백송이, 무화과 2백뭉치 등)을 준비해 가지고 칼을 쳐들고 오는 다윗을 맞습니다. 아비가일이 지혜롭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불의한 피를 흘렸다는 불명예를 받으면 되겠냐고 말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예언적인 말로 이스라엘의 왕이 무죄한 피를 흘렸다는 말 들을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겸손하게 아룁니다( 절).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는 물리쳐 주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텐데 그때 보복했다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냐고 말합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직분자는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자제력을 잃지 않고 복수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이기도 합니다(사 53:7).
다윗은 지혜로운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는 분노를 누그러뜨립니다. 그녀가 복수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와서 자기를 맞이하지 않았다면 나발에 속한 모든 남자들이 다 죽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을 다 받고는 돌아갑니다. 다윗을 겨우 설득하여 돌려보내고 와서 집에 와 보니 남편 나발이 잔치를 벌이고는 흥청망청거리고 있습니다. 다윗을 막으려 갈 때에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갔는데 그날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에 자초지종을 알립니다. 나발이 사색이 됩니다. 하마터면 자기 가족과 식솔이 몰살당할 뻔했거든요. 벌벌 떨다가 10일 후에 나발이 죽습니다.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당한 모욕을 갚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합니다. 아비가일은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절)라고 하면서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왕 사울은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내 주었는데 다윗이 도망 다닐 때 다른 남자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이에 다윗은 아히노암이라는 아내를 맞았는데 이제 두번째 아내를 맞았습니다. 이후에 다윗은 더 많은 아내를 거느리는데 이것이 왕조시대의 모습입니다. 이후에 이것이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기도: 저희는 보복하고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집니다. 내가 당한 것이 있는데 그냥 있으면 나를 더 우습게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데 그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힘이 없어 복수하지 못하지 힘만 있으면 언제라도 보복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의 복수심을 막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일으키셔서 저희의 앞을 막아서시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복수하려는 이들을 막아설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복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저희에게 복 비셨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무엘상 26장
다윗이 십 황무지에 있을 때에 그 곳 사람들이 다시금 사울이 있는 기브아로 가서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알려줍니다. 십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시금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쫓아갑니다. 이때에도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몰래 사울과 그의 군대가 진친 곳에 가 보니 모두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비새는 지금이 원수를 갚을 때라고 말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윗의 손에 넘겨 주셨다고 말합니다( 절). 자기가 단번에 창으로 사울을 땅에 꽂아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다윗이 갈등했을까요? 그는 이미 굳게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혹 그를 치실 것이면 치실 것이지 자기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서 망하리라”( 절). 이렇게 나발 사건을 전후해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을 기록하는 것은 다윗 자신의 자제력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된 것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진영으로 잠입하여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진영에 있던 모두를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사울의 머리 곁에 있던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서 산꼭대기에 도착해서 지난 번처럼 사울을 부릅니다. 그는 먼저 왕을 호위하고 있는 군대장관 아브넬을 부릅니다. 한 사람이 왕 사울을 죽이려고 그 진영으로 잠입해 들어갔는데 그것도 모르고 쿨쿨 잠만 잤냐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마땅히 죽을 죄라고 말하면서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고 합니다. 왕 사울은 다윗의 목소리를 듣고는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고 소리칩니다. 다윗은 다시 한번 더 자신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말하면서 자기에서 무슨 악이 있어서 왕이 그렇게 쫓아 다니냐고 묻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해하기를 원하신다면 자신이 제물로 드려지기를 원하지만( 절) 자기를 쫓아내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다시 한번 더 자신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겼으니 자신이 결코 해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한 소년을 보내면 왕의 물품을 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공의와 신실함을 갚아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절). 자기 생명을 귀하게 보는 이는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환란에서 자기를 건지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결정적으로 다윗이 복을 받을 것이며, 반드시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절). 진심으로 한 말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의 나라이며, 선악간에 모든 심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 저희는 같은 일이 반복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일이 우연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 번 반복되면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상황과 감정이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저희가 상황에 쉬 휩쓸리지 않게 하시고 끝까지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악을 행하고 욕 듣는다면 당연한 것이고, 선을 행하고 고난당한다면 기꺼이 감내하게 하소서. 저희가 당한 것만큼 갚아주려고 하지 않게 하시고 악을 선으로 갚는 저희가 되게 도와 주소서.
사무엘상 27장
왕 사울이 자신의 죄를 고백했지만 그것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다윗을 뒤쫓아올 것입니다. 다른 것을 다 고쳐 쓸 수 있지만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런 것일까요? 아무리 도망다녀도 이스라엘 땅 안에서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습니다. 다윗은 원수의 땅이었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또 다시 들어갑니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절). 다윗이 블레셋 가드로 도망하자 사울이 다윗을 뒤쫓는 것을 포기합니다. 또 다시 한번 더 이스라엘의 왕이 이스라엘에 머무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다윗은 지난 번처럼 다시금 가드 왕 아기스에게 자신을 의탁하면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구합니다. 자신이 거느리던 600명의 사람들과 함께 블레셋 왕에게 도피처를 구하여 상황이 진전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윗을 믿어보기로 한 것일까요? 이에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청원합니다. 왕도인 가드에 자신이 어떻게 머물겠냐고 하면서 남쪽 외곽 성읍 하나를 내어 주신다면 자기 무리가 거기에 머물겠다고 말합니다. 아기스는 시글락을 내어줍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유다지파에게 주신 땅이지만 지금껏 블레셋에 속해 있었습니다(수 15:31). 다윗은 그곳에서 1년 4개월정도 머무릅니다. 다윗은 피난생활 중에도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합니다. 다윗은 시글락에 머물면서 더 남쪽에 있는 그술, 기르스, 아말렉 사람을 칩니다( 절). 아말렉은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을 향해 갈 때에 이스라엘 후미를 친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앞두고는 그들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신 25:19). 다윗은 왕 사울이 실행하지 못했던(삼상 15:1-3) 아말렉 진멸을 주도했습니다.
다윗이 약탈한 것을 가지고 오자 가드 왕 아기스가 누구를 쳤느냐고 묻습니다. 다윗은 유다의 남쪽 지역(여라무엘- 대상 2:9)과 모세 장인 족속인 겐 사람을 쳤다고 속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쳤다고 속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친 족속의 남녀를 하나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살려 두었다가는 자신이 한 일이 발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말을 듣고는 이제는 다윗이 자기 편이 되었고, 자기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 절). 28장(1-3절)에 보면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합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이 군대와 함께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에둘러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뭘 할지를 왕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할 때 블레셋 편에 서서 전쟁해야 하는 위기에 처합니다. 다윗은 망명 중에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향한 충성을 다하지만 자기 백성을 쳐야 하는 상황에 놓였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피할 수 있는 길이 있겠습니까?
기도: 저희는 저희가 내린 결정이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하는지,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정확하게 알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밝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앞 길이 너무나 어두울 때 저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 분명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믿음으로 한걸음씩 나아가게 하시고, 저희의 잘못된 결정으로 위기와 낭패를 당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게 하여 주소서.
사무엘상 28장
다윗의 선택과 더불어 사울의 버림받음이 본문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사무엘이 죽은 것을 25장에서 이미 말했지만 다시 한번 더 사울이 죽었다는 것과 왕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들(남자무당)을 다 쫓아내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블레셋의 침입에 당황한 사울이 겁을 냅니다.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사울에게 응답하시지 않았습니다( 절). 사울은 할 수 없이 부하들에게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는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에게 물으러 갑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가나안의 이방 무당에게 물으러 갔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변장을 하고는 그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갑니다. 신접한 여인을 만난 곳은 아마 방이 두 개 딸려 있는 동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은 따로 분리된 방에 있었으며, 사울은 다른 방에서 벽에 있는 구멍을 통해 말하였던 것 같습니다. 사울은 그 이방 무당에게 술법으로 죽은 어떤 영을 불러 올려달라고 말합니다. 그 여인은 왕 사울이 신접한 사람들을 다 죽였는데 어떻게 그런 요청을 하냐고 말합니다. 사울은 당신이 그런 술법을 부려도 결코 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불러 올리면 되냐고 하자 선지자 사무엘을 불러올려 달라고 말합니다. 그 여인은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이 왕 사울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 여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쇼를 부립니다. 사울이 그 모양이 어떠하냐고 물어본 결과 생전에 살았던 사무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사울이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합니다( 절). 정말로 사무엘이 올라온 것일까요? 사탄이 속임수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러가신 인생은 누구든지 다시 세상에 돌아올 수 없습니다. 접신술은 순전히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의 영이 실제로 나타났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접한 여인이 불러올린 사무엘 모양을 한 그 영이 말합니다. 왜 자기를 불러 올렸냐고 말합니다. 다급해서 당신을 불러 올렸다고 말하니 하나님이 너를 떠나 너의 대적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울은 자신의 죽음을 듣게 됩니다. 또한 그 영은 다윗이 왕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절). 그 영은 사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아멜렉에게 쏟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진노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기절합니다. 그는 하루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심판의 말씀을 들었기에 기력이 다 빠졌습니다. 그 신접한 여인이 먹을 것을 대접합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신하들과 그 여인이 강권하자 앉아서 먹습니다. 음식 자체가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사울은 신접한 여인이 주는 음식, 우상숭배를 위한 제물을 먹습니다. 이것이 육체의 기력을 회복시켜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점점 더 깊은 우상숭배로 빠져 들어갑니다.
기도: 저희가 하나님께 물어도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는 것은 들을 귀가 없어서 그러신 것도, 귀찮아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는 것은 저희로 하여금 묻지 말고 먼저 회개하라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형편에만 집중하고 그 상황에 매몰되어서 계속해서 답을 달라고 구하는 것만 하지 자신의 모습을 볼 줄은 모릅니다. 하나님이 잠잠하실 때 저희 자신을 보게 하시고, 주님께 엎드려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여 주소서.
사무엘상 29장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군대를 북쪽 아벡에 집결시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이스르엘 샘가에 진을 쳤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가 블레셋 연합군대를 이끌었는데 여러 지역 지휘관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들이 아기스에게 따집니다. 왜 이 히브리 사람들이 여기 있냐고 따집니다. 아기스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 사울의 미움을 받아 자기에게로 망명왔는데 지금까지 지켜보니까 우리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잘못한 일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번 기회에 다윗이 이끄는 무리가 우리와 함께 이스라엘을 치면 좋지 않냐고 말합니다. 그 지휘관들은 펄쩍 뜁니다. 다윗의 무리가 돌변하여서 전쟁터에서 칼을 자기들에게로 겨누면 어떻게 하냐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꼼짝없이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우리에게 칼을 겨누어서 이스라엘 왕 사울과 화해할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블레셋의 장관들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환호하면서 춤추고 노래한 다윗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절)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아기스는 방백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자신은 다윗이 선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절). 블레셋 왕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다윗을 인정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렇게 자기는 다윗을 신뢰하지만 다른 장관들이 못 마땅해 하니 돌아가 평안히 쉬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속으로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아기스를 향해 내가 잘못한 것이 뭐냐고 묻습니다. 왜 나를 믿지 못하고 전쟁터에 같이 가게 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러 가려는 것을 말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실, 다윗이 말한 ‘내 주 왕’은 사울이고, ‘내 주 왕의 원수’는 블레셋입니다. 그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아서 말했습니다. 다윗은 이방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도 블레셋을 원수로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을 타일러서 새벽같이 떠나서 이전에 머물던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돌아가고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기 위해 이스르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방백들의 마음을 사용하셔서 다윗이 자기 백성을 치는 위기를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어쩔 수 없이 자기 백성을 쳐야 하는 위기에서 가까스로 모면합니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기도: 저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원수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살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려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합리화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주께서 피할 길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시하거나 그들과 싸우는 일이 없도록 도와 주소서. 저희가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는 선한 증거를 얻게 하시고, 믿는 이들에게는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그들을 보호하고 함께 고난받도록 도와 주소서.
사무엘상 30장
다윗이 전쟁터에서 겨우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아말렉(27:8)이 다윗이 없는 틈을 타 다윗의 무리들의 가족과 자녀들이 거하고 있었던 시글락을 쳐서 그들을 다 잡아가 버렸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크게 슬퍼하며 다윗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못할 바가 아닙니다. 얼마나 낙담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 자신은 이런 순간에도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었습니다( 절).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청하고는 하나님께 물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쫓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절). 다윗은 도중에 아말렉 사람들이 버린 애굽 종 하나를 만나 대적들이 있는 곳을 인도하게 합니다. 다윗은 먹고 마시고 춤추다가 잠든 대적들을 새벽녘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쳐서 완전히 진멸시킵니다. 다윗은 빼앗겼던 모든 물품과 사람들을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탈취물을 빼앗아 돌아온 어떤 악한 자와 비류들이 탈취한 물품들을 자기들만 취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보호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전쟁에 내려가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분배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르 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절).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왕국은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이 지배하는 왕국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은혜를 나누는 공동체원리가 지배하는 왕국입니다. 다윗은 이 원리를 갖도록 그의 무리를 영적으로 훈련시켰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게 모두 지체입니다(고전 12:12-27).
사무엘상 31장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한판 싸움을 벌입니다. 블레셋 군대의 이동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북쪽 접경지인 아벡에 집결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쳐들어와 므깃도를 거쳐 수넴에 진을 칩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길보아산에 진쳤다가 이스르엘 샘가로 옮겨 맞붙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대패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혼비백산하여 도망하고 길보아 산으로 몰리고 그 산에서 더 크게 죽임을 당합니다. 사울의 아들들이 다 죽임을 당합니다. 왕 사울도 궁수가 우연히 쏜 활에 맞아 중상을 당합니다. 중상을 당한 사울은 자기 병기든 호위무사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마지막 위엄을 보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절). 병기든 자가 왕을 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자를 자기 손으로 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칼 위에 스스로 엎드러져 죽습니다. 사울의 죽음은 거룩한 죽음이 아니라 자살과 같은 형태를 취합니다. 사울의 왕직을 이어받을 아들 요나단도 이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참패하자 길보아산 인근지역과 심지어 요단강 동쪽에 살던 이들도 자기 성읍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마저 벌어집니다.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이 그 곳에 밀고 들어와 살기 시작합니다( 절). 이 전투가 얼마나 큰 참패였는지, 이스라엘 사람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전투가 끝나고 다음 날 블레셋 사람들이 시신 확인작업에 들어갑니다. 사울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그들이 쾌재를 부르면서 시신의 머리를 베고 갑옷을 벗기고 그 벌거벗긴 시신을 블레셋 사방에 보내어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갑옷은 자기들의 신당, 아스다롯 신당에 걸어놓습니다. 당시 전쟁을 신들의 전쟁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시신을 사방으로 보내 모욕한 후에 그 시신을 길보아산 인근의 벧산 성벽에 못 박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모욕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요단강 동쪽 갓 지파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일어섭니다. 그들은 밤새 20킬로미터를 걸어와 사울과 아들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가 화장하고 유해를 묻어주었습니다( 절). 그들은 장사 후에 7일 동안 애통하며 금식합니다. 왕 사울이 암몬의 손에서 자기들을 구해준 것(11장)에 대한 보답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직분자의 비참한 죽음을 애통해합니다. 후에 다윗은 이를 듣고 특사를 보내어 그들의 희생적인 봉사에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기도: 요즘 존엄사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존엄사를 주장하면서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그가 하는 일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더라도, 기억과 의식조차 없더라도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저희의 죽음이 세상적인 방식의 존엄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존엄하게 죽게 하여 주소서. 죽는 순간의 모습을 극적으로 꾸미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자신의 죽음을 겁내지 않게 하시고, 직분자의 죽음을 귀하게 보게 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