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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두 편이 한 달 간격으로 개봉한다. 일본의 전통 인형극인 분라쿠를 스크린에 재현한 <돌스>와 사무라이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액션영화 <자토이치>가 그것이다.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현대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확실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한 기타노 다케시의 현재를 <돌스>와 <자토이치>를 통해 짚어본다.
감독, 배우, 프로듀서, 코미디언, 저널리스트, 시인, 화가 등 경계를 불문하고 장르를 왕래하는 혈기방장한 그 재능만큼이나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종잡을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변화한다. 그는 최근 2년간 완전히 다른 색깔의 영화로 다시 한번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일본의 전통 인형극 분라쿠를 스크린에 옮겨놓으려는 대담한 실험작 <돌스>와 전설적인 사무라이 시리즈에 기초한 액션 활극 <자토이치>는 기타노 다케시 영화 미학의 극점에 서 있는 영화들이다. 1년의 간극을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하기에 둘은 완벽하게 달라 보인다. 자신이 연출한 다른 영화에서처럼 기타노는 <돌스>에서 각본, 연출, 편집을 손수 도맡았고 <자토이치>에서는 주인공 자토이치 역까지 스스로 연기하고 있다. 크레딧 타이틀에서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을 지워 버린다면 두 영화가 한 감독에게서 나온 소산임을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로 인형극을 재현하다
<돌스>는 데뷔 이래 기타노 다케시가 행한 가장 야심찬 미학적 도전이라 할 만하다. 기타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예외적인 작품에 속하는 이 영화는 피로 스크린을 흥건하게 적신 포악한 전력의 그에게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 에로틱한 탐미주의의 극단을 달린다. <돌스>의 오프닝 신은 일본 겐로쿠 시대의 저명한 분라쿠 작가인 치카마츠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1711년 작품인 ‘메이도노 히캬쿠(지옥으로 향하는 급사 給仕)’를 상연한다. 무대 뒤의 어둠 사이로 빛이 새어 들면서 인형극이 시작되고 그때부터 영화도 시작이다. 비탄스러운 분위기로 흘러가는 '메이도노 히캬쿠'의 내용은 기녀(妓女)를 흠모한 급사가 사랑하는 여인을 유곽에서 빼내기 위해 가게 돈을 훔쳐낸 후 쫓기다 연인과 함께 동반 자살로 치닫는 이야기다. 애절하게 토해내는 다유(무성영화의 ‘변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인형극의 내레이터이자 스토리텔러)의 사설과 삼현 악기 샤미센의 청아한 선율, 살아 있는 듯 미려한 인형의 움직임을 쫓아가는 퍼포먼스는 이 영화의 기조를 함축한 ‘결정적 장면’이다.
인형극이 상연된 직후, 기타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치카마츠의 원작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죽음도 불사하는 궁극의 사랑이라는 '메이도노 히캬쿠'의 모티프를 취한다. 출세를 위해 정략 결혼을 택한 남자가 실연의 상처로 실성한 애인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플롯 위에 성공을 위해 사랑을 버린 야쿠자 보스가 수십 년이 지난 후 연인과의 약속을 지키는 에피소드, 그리고 교통사고로 재기 불능이 된 아이돌 스타를 흠모한 남자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스스로 장님이 되는 에피소드가 느슨하게 얹어져 있다. 이웃 하는 세 에피소드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인형극이다. 여기에는 기타노 개인의 경험도 상당 부분 투영돼 있다. 야쿠자 보스 히로의 에피소드에는 대학 시절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애인과 헤어졌던 자신의 경험이, 아이돌 스타 하루나의 에피소드에는 1994년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자신의 굳어버린(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후 그는 얼굴 반쪽의 감각을 잃었다 - 편집자 주) 얼굴이 겹쳐진다. 붉은 끈으로 서로의 몸을 결박한 채 유랑하는 커플은 대학을 중퇴하고 아사쿠사에서 엘리베이터 보이로 일하던 시절 기타노가 실제로 보았던 ‘빨간끈 거지’ 커플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돌스>가 발표된 후 기타노 다케시를 아는 사람들의 관심은 그가 비열한 거리의 야쿠자들에게서 벗어나 ‘사랑’을 화두로 삼은 이유였다. 거기에는 나름의 내력이 있었다. 분라쿠의 이야기꾼인 다유 출신이었던 친할머니 다케모토 야에코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기타노는 “예전부터 머리 한구석에 항상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시끄럽다고만 생각한 분라쿠에 끌린 이유는 인형극에 담긴 비극의 정서와 남다른 표현 스타일 때문이었다. '메이도노 히캬쿠'에서 <돌스>까지 이어지는 동반 자살의 모티프는 일본 사회에 면면히 이어지는 전통의 미학이다. <돌스>는 인형극의 대단원처럼 파국의 결말을 예비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로맨스가 비극적으로 끝나기를 기대한다. ‘그후로 영원히 행복했다네’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의 어휘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마다 거기에는 불가피하게 자기 희생의 요소가 존재한다.” 기타노의 설명이다. <돌스>는 일본적인 미학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의 정서를 러브 스토리 속에 담아낸다. <돌스>의 테마는 ‘비극적 로맨스’가 아니라 ‘로맨스의 비극성’인 셈이다. 분라쿠는 그 비극적 세계관을 총화한 예술이었다. <돌스>에서 기타노는 이 슬픔과 비탄의 예술 형식을 스크린에 ‘통째로’ 옮겨오는 야심만만한 도전을 감행한다.
다케시는 왜 총을 버리고 검을 들게 되었나?
<돌스>를 발표한 지 불과 1년이 되지 않아 기타노 다케시의 프로덕션인 ‘오피스 기타노’에서는 깜짝 놀랄만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60년대에 시작돼 27년간 장수를 누린 사무라이 시리즈 <자토이치>의 리메이크 버전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연출과 주연을 겸한다는 소식이었다. 발표가 있자마자 세인들의 비상한 관심이 쏟아졌지만 정작 기타노는 <자토이치>의 영화화에 시큰둥했다. 리메이크를 꿈꾸는 여느 감독들처럼 기타노는 26편이나 만들어진 이 유서 깊은 시리즈의 열렬한 팬도 아니었다. 기타노가 이 프로젝트를 수락한 진짜 이유는 스트립 클럽 체인의 소유자이자 전직 누드 댄서였던 거물 치에코 사이토 때문이다. 4년 전, 기타노의 TV 코미디 쇼에 댄서들을 공급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치에코는 그해 기타노의 친모가 사망한 후 그와 양자 결연을 맺었다. 그때부터 기타노는 치에코를 ‘어머니’라 불렀다. 치에코는 또한 오리지널 <자토이치> 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가츠 신타로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가츠가 제작자로 나섰던 가츠 프로덕션이 재정난에 처했을 때 치에코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990년 하와이에서 가츠가 마약 밀수 혐의로 체포됐을 때도 헌신적으로 그를 도왔다. 1997년 가츠가 사망하자 치에코는 <자토이치>를 리메이크할 계획을 세웠고 그걸 맡을 사람은 기타노 다케시밖에 없다고 믿었다. 기타노는 이런 제안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치에코의 말에 <자토이치>의 영화화를 수락했다.
기타노 다케시는 사람들이 오리저널 주인공인 가츠 신타로와 그간 자신의 이미지였던 '비트 다케시'를 잊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는 “자토이치와 가츠는 한 쌍이다. 다른 배우가 그를 연기한다면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가츠를 모방하려 했을 때 실망할 팬들의 반응을 예상한 기타노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궁리했다. 타락한 집단에 대항하는 낭인들의 투쟁이라는 사무라이 장르의 플롯을 취했지만 <자토이치>에서는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특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 영화는 흡사 ‘<하나비>의 사무라이 버전’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비>의 형사 니시의 아내처럼 떠돌이 무사의 아내는 시름시름 앓고 낙오된 인생들(기녀를 가장해 복수를 꿈꾸는 남매, 무능한 도박꾼, 소리를 지르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실성한 남자 등)은 외딴 공간에 모여 기이한 동거를 한다. 기타노는 노랗게 머리를 물들이는 것으로 <자토이치>를 시작했다. 금발의 자토이치를 앞세워 게다 짝 리듬의 탭 댄스, 일본의 전통 무용, 기타노 특유의 눙치는 개그를 스피디하고 예리한 액션 장면 속에 녹여냈다. 이 영화에서 ‘기타노류의 액션’으로 일컬어진 난투 장면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검들은 섬광처럼 교차하고 싸움은 일어나자마자 끝난다. <자토이치>의 놀랄 만한 속도감은 <7인의 사무라이> 같은 전통 사무라이극이나 오리지널 <자토이치>의 액션과는 궤를 달리한다. 기타노는 가츠 신타로의 <자토이치>를 완전히 지워 버리지 않고 거기에 전혀 다른 ‘비트(beat)’를 첨가함으로써 기타노 스타일의 <자토이치>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분류를 거부하는 해체주의자
<돌스>와 <자토이치>의 눈에 띄는 차이점은 정(靜)과 동(動)의 선명한 대비다. 장중하고 느린 <돌스>에 비하면 <자토이치>의 속도감은 압도적이다. 미동도 없이 시체처럼 걷기만 하는 <돌스>의 주인공들에 비해 <자토이치>의 칼잡이들은 비호 같은 동작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돌스>의 인물들에 비해 <자토이치>는 활기와 신명이 넘쳐난다. 외견상 뚜렷하게 갈리는 두 영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타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기타노의 다른 영화들처럼 <돌스>와 <자토이치>에서 정과 동은 겹쳐 있으며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한다. 이 같은 정중동의 미학은 기타노 영화에 빈번하게 나오는 ‘바다’와 같다(<돌스>에서 유랑하는 연인들은 바다를 지나며 <자토이치>에서 자토이치와 떠돌이 무사의 최후 결투가 벌어지는 곳 또한 바다다). 잔잔하고 평온한 수면 아래 거대한 회오리를 숨기고 있는 바다처럼 기타노는 고요한 정적과 감정의 격랑을 한 그릇에 담는다. <돌스>의 인물들은 말하지 않지만 스크린을 물들이는 원색의 이미지처럼 그들의 내면은 격렬히 요동친다. 오지 않는 애인을 기다리며 40년 동안 도시락을 싼 과거의 여자와 해후했을 때의 회한,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대인 기피증에 걸린 자신을 위해 멀쩡한 눈을 도려낸 남자의 순정에는 강렬한 정서의 울림이 있다.
이처럼 기타노가 판이한 영화를 만드는 데는 어떤 의도가 있다. 그는 “나는 되도록 남들에 의해 분류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 난 기타노 다케시이자, 비트 다케시다. 사람들은 내가 다음에 뭘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이유로 <돌스>는 ‘기타노 다케시 최초의 러브 스토리’가 아니다. 여기서 기타노는 전혀 다른 사랑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다. “'메이도노 히캬쿠'처럼 <돌스>는 사랑의 환상에 대한 영화다. 아무 말도 없이 도시락 싸들고 40년을 같은 장소에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애정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상당히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거 아닌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찔러버리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게 협박이 아니면 뭔가? 원래 사랑이란 이기적인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기타노의 러브 스토리는 행복하게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로맨스는 오늘날처럼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할까 싶은 지나치게 순수한 이야기다. 잔인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이렇게 순수한 사랑은 ‘죽음’으로서만 완성될 수 있다. 그것이 일본적이고, 동시에 기타노적인 세계관이다.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는 예술가로서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라는 형식 자체를 파괴하는 과격한 도전을 자주 보여준다. 그는 영화 이미지를 사진처럼 찍어내기로 유명한 감독이다. 마치 영화가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기타노의 영화는 끊임없이 사진에 가까이 간다. “내 영화에서 사진책처럼 끝나는 이미지들은 오래된 나의 욕구다. 그걸 감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내가 만든 영화에서 그런 이미지는 대단히 본질적이고 중요하다.” <자토이치>에서 검이 부딪히는 충돌의 찰나, 돌연 화면은 정지하고 대결자들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자신의 심정을 읊어댄다. 스틸 사진을 보는 듯 갑자기 얼어버리는 이미지는 데뷔작 이래 그의 영화에 자주 출몰한다. <돌스>는 여기서 한술 더 뜬다. 영화의 사각 프레임을 분라쿠가 상연되는 극장처럼 꾸미려 했던 기타노는 군데군데 스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삽입했다. 움직이는 이미지로 구성된 ‘영화’를 사진 이미지로 되돌리려는 실험은 부질없어 보이지만 기타노의 예술관이 응집된 낙인과 같다.
잔혹성의 패러독스
기타노 다케시에 의하면 <자토이치>는 “마을에 들어와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홀연히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다. 악당들을 물리친 자토이치가 한껏 폼을 재고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고꾸라지면서 끝나는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은 기타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유머러스한 독설이다. 기타노는 거듭 가면을 벗어가며 정체성을 바꾸는 멀티플레이어지만 영화 속에서 그의 페르소나는 일관성이 있다. 기타노는 늘 가학의 충동에 사로잡힌 사디스트다. 연예인으로 활동할 때의 별칭인 '비트(beat)'처럼 그는 TV 코미디 쇼에서 사정없이 출연자들을 후려치면서 낄낄거리고 영화에서도 ‘때리는(beat) 다케시’의 면모를 십분 발휘한다. <자토이치>에서도 악의적인 그의 페르소나는 가일층 빛을 발한다. 이 영화에서 자토이치의 상대역인 떠돌이 낭인 후쿠베를 연기하는 배우는 아사노 타다노부다. 일본 최고의 스타인 아사노 타다노부는 감독 기타노 다케시-영화 속 캐릭터인 자토이치에 의해 처절하게 망가져간다. 후쿠베는 웬만한 칼잡이는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수준급 사무라이지만 맹인 검객 자토이치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감독 기타노는 과거 회상 장면을 통해 그에게 모진 매질을 가하고, 최후의 결투에서 자토이치는 단칼에 그를 베어 버린다. <자토이치>에서 최고의 스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기타노의 심술은 관객의 기대 심리를 난폭하게 희롱한다.
<돌스> 역시 거대한 패러독스로 끝난다. 기타노는 “나는 폭력 없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돌스>를 시작했지만 이 영화는 내 작품 중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끝난다”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폭력은 끔찍하지 않지만 그 속에 내재한 비극성에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영화에서 모든 인물들을 덮치는 돌연한 죽음은 가장 잔혹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기타노의 다른 영화에서처럼 그들은 늘 죽음과 가까이 있는 야쿠자나 형사가 아니다. 죽음의 기운이 서려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음과 대면하는 것이다. “풍경은 잔혹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테면 과일은 썩기 직전에 가장 맛있고 꽃은 지기 직전에 가장 아름답다. 아름다운 벚꽃 나무 아래에는 구경 나온 회사원들이나 행복한 연인보다 군복 입은 일본 군인이 검을 들고 앉아 있는 풍경이 훨씬 더 어울리지 않는가. 아름다운 바다 앞에는 단란한 가족보다 당장이라도 자살할 것 같은 중년 남성이 더 어울린다.”
존재론적으로 기타노 다케시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예술가다.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지만 영화에서는 늘 위험천만하고 심각한 사건만을 다룬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코미디언의 임무는 대중을 웃게 만드는 것이지만 <돌스>는 전혀 웃기지 않는다. 이러한 삶의 패러독스가 더욱 극명히 보여지는 것은 <돌스>에서의 연기 연출을 통해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배우들이 분라쿠의 인형처럼 보이기를 원했던 기타노는 배우들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연기’를 주문했다.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배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연기’하려고 노력한다. 배우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다. 고로 그들은 연기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독설가로서 기타노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또 하나 있다. 베니스영화제에서의 감독상 수상과 자국에서의 흥행으로 <자토이치>가 성공을 거두자 세간에는 이 영화가 과거처럼 시리즈로 제작될 것인지가 화제에 올랐다. 사람들이 속편에 대한 기대를 내비치자 기타노는 “이미 후속편의 제목까지 지어놨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해 둔 속편의 제목은 '자토이치 vs. 터미네이터'. 물론, 이건 농담이다. 농담이지만 <자토이치>에 대한 뼈 있는 자평(自評)이기도 하다.
경계를 무너뜨리는 실험과 도전
영국의 영화 비평지 ‘사이트 앤 사운드’는 최근 기타노 다케시와의 장문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인터뷰에서 기타노는 “난 지금까지 코미디언이자 아티스트로서 넘버 원이 되기를 원했다. 지금은 오히려 '최고의 2등’이 되고 싶다. 일본의 영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최고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노린다. 최고의 2등이 되는 것은 더욱 계획적이고 목적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난 세상을 지배하려는 어떤 무의식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나의 의식적인 열망은 최고의 2등을 추구하는 예술가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기타노 다케시가 감독으로서 지닌 욕망을 엿보게 한다. 같은 맥락에서 <돌스>는 예술가로서 기타노의 욕망의 크기를 증거하는 작품이다.
<돌스>는 ‘각색 영화’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분라쿠를 충실히 옮겨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돌스>에 나오는 모든 요소들은 원본의 스타일과 미학, 효과들을 온전히 옮겨오려는 의지의 결과다. 기타노는 훌륭한 각색이 원본의 내용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스타일과 미의식을 옮겨오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스타일의 모방, 곧 각색에서의 충실성이란 한편으로 고도의 창조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더구나 분라쿠는 영화와는 다른 무대 공연이며, 그 언어 또한 고유하므로 영화의 효과와 그것이 동격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힘들다. 여기서 인형극은 ‘묘사해야만 할 대상’이다. 하지만 기타노는 영화를 위해 대상(인형극)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 안에는 분라쿠를 구성하는 요소들인 스토리텔러(기타노 다케시 자신)와 거의 인형의 수준으로 떨어진 배우들, 그리고 관객(인물들의 행위를 구경하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존재한다. 기타노는 거의 완벽하게 인형극을 스크린 위에 재현한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의식적으로 스크린이 인형극의 무대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애썼다. 이 영화에서 기타노는 인형을 손에 쥐고 움직이는 조종자와 같다. 숨쉬는 인형들 - 영화 속에서 자동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움직이는 배우들 - 을 등장시킴으로써 그는 필름이라는 무대 위에서 인형극을 상연한다.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이 인형으로 변하고 마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인형극 그 자체가 된다. 분라쿠 미학의 오묘한 이치, 기타노 다케시가 인형극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따위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보다 본질적인 질문 하나가 남는다. 대체 한 편의 인형극-영화를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운동하는 영화 이미지를 사진처럼 찍어대는 그의 무모함(?)처럼 장르의 경계를 불문하는 자유로운 예술가 기타노 다케시에게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다. 상이한 예술 장르의 미적 체험을 교류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는 전례가 드문 것이다. 영화와 분라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 그래서 영화를 한 편의 인형극으로 만드는 것, <돌스>에서 기타노가 노리는 바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의 개봉 직후 한 기자가 “왜 제목을 '돌스'라고 지었나”라고 물었을 때 그는 “그 제목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난 그 영화의 제목을 달리 부른다. 그러니까… 난 그 영화를 ‘기타노 다케시의 열번째 영화’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기타노는 자신의 영화를 모두 그렇게 부른다. 그러니까 <돌스>는 ‘기타노 다케시의 열번째 영화’, <자토이치>는 ‘기타노 다케시의 열한번째 영화’인 셈이다. 제목에 숫자를 붙이는 이유는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의미가 생기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기왕의 분류법으로 나누려 들고 고정된 틀 속에 가두려 한다. 스크린 안에서 심중을 헤아릴 수 없는 표정으로 일관하듯 기타노가 지은 제목에서도 어떤 표정을 찾기란 어렵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인형극을 충실히 각색하려는 의지로 뭉친 <돌스>는 무척 단순한 영화다. 그것은 의미가 사라진 영화, 해석이 없는 영화, 그리고 마침내는 예술의 형식(인형극) 그 자체가 순수하게 추출되는 신기한 영화가 된다.
첫댓글 수영만에서의 "자토이치"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만 머리속에 그려보아도 하루가 충만해 짐을 느낍니다. 언제쯤 스크린에서 다시 볼수 있을까~~~~ 올해안엔 힘들듯 하니. 근데 "자토이치" 올해 정말 볼수 있을지???
"돌스"가 시네마테크에서 11월14일~27일까지 상영일자가 잡혔네요~ 시간이 났으면 조케따~ 13:00,15:20,17:40,19:50.... 수영만에는 이제 슬슬 땅거미가 지네요. 6학년 아자씨와 저녁에 션한 호프나 한잔 해야겠다. 열혈멤버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