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 고종시대사2 > 1866년(고종 3년) 12월 20일 > 슈펠트(Shufeldt), 제너럴셔먼호 사건 처리에 대한 견해를 밝힘
기사제목 | 슈펠트(Shufeldt), 제너럴셔먼호 사건 처리에 대한 견해를 밝힘 |
연월일 | 고종 3년(1866년, 淸 穆宗 同治 5年, 日本 慶應 2年) 12월 20일 |
(전략) 이곳(Ta-tong)의 모든 사람들은 제네럴 셔먼호의 선원들이 고위 관료의 명령이 아닌 강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이 범선을 타고 이 해안으로 내려와 주민들을 약탈하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현재 우리가 닻을 내린 곳의 반대편인 "Now-ts"섬에서 약탈자들이 6명의 젊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두 마을의 촌장들은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Ping Yang)강에서 지난 9월에 불태워졌으며, 27명으로 구성된 사관과 선원은 고위관료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조선 전체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 (중략) …
조선인들은 셔먼호에 승선한 선원 중 10명은 이곳 해안을 오랫동안 도둑질하고 약탈하기 위해 왔던, 전 나라의 해안가가 두려워했던 광동 출신의 선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의 해로안내인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셔먼호에 승선한 영국 백성인 호가드 씨는 전 중국에 신중하지 못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지인들은 만약 폭동이 발생했다면 그가 그 사태를 야기한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와추셋호는 조선 해안의 이 장소에 정박한 최초의 외국 선박입니다.
조선인들이 셔먼호의 사건에 주된 책임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라의 서해안 전체가 매년 중국인 특히 광동인들의 약탈과 강도질의 활동무대라는 점과 셔먼호에 열 명의 광동인이 승선해있다는 점으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로안내인은 셔먼호의 선장이 조선의 조랑말을 구입하는데 실패한 후, 그가 중국의 방식대로 강에서 내려올 때 조랑말들을 훔칠 것을 결정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정부는 조만간 다른 동양의 국가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경멸적 배타성 즉 정부 혹은 국민들이 행한 설명 혹은 책임을 무시하는 것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것입니다. (후략)
첫댓글 이 기록은 제너럴셔면호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의도로 씌여진 글로 보여집니다. 당시 대동강에 홍수가 나서...배가 깊이 들어올수 있었고,이에 평안감사 박규수가 을밀대에서 연회를 벌여 유인한후 배의 밑바닥이 모래에 걸려들게 한후, 화공으로 공격해 전원 몰살시킨것이 여러 기록에 의해 고증되고 있습니다. 이사건으로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은 아시아 전 함대를 대동강으로 보내 공격하려 했으나, 청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 시행하지 못했다 하고, 이후 신미양요에 이르게 된것이 사건의 전말이 되고 있습니다. 이후 평양 대동강에는 셔면호의 닻이 대동문앞에 걸려 있었다고 하지요. 이것은 서양인들의 기록에 많이 확인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