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22) 김충선 장군
“조선은 예의의 나라” 조총부대 500명 이끌고 귀순
나는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조선을 괴롭히지 않겠다 맹세했다.
힘과 용기와 무기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조선을 일찍부터 동경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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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國難)의 전쟁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꼭 무관 출신의 장군만 다룰 수 없는 것이, 문관으로 벼슬길에 나갔어도 전쟁 중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출전해 무공(武功)을 세운 인물이 많다. 권율, 김성일 등이 그런 경우다. 이분들의 전쟁 시 업적은 명장의 반열에 들어간다. 그런가 하면 의병(義兵)이나 승군(僧軍) 지휘자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특이한 인물을 소개해 본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장수로 조선정벌에 나섰다가 투항해 조선군이 돼 일본을 상대로 항전한 인물도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충선(金忠善·1571~1642)이다.
조선의 한 농부의 효심에 감복
김충선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 장수로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그는 한 농부가 늙은 어머니를 업고 피난 가는 것을 보고 감복하고 왜군들의 잔악상에 분노를 느껴 귀순을 결심한다. 부산에 상륙한 그는 부하들에게 약탈을 금하는 군령을 내리고 효유서(曉諭書·알아듣도록 해명한 글)를 백성들에게 돌렸다.
‘모든 백성은 이 글을 보고 안심하고 직업을 지킬 것이며 절대로 동요하거나 흩어지지 마라. 나는 비록 선봉장이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마음으로 맹세한 바 있었으니 그것은 너희 나라를 치지 않을 것과 너희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내 일찍이 조선이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듣고 오랫동안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였다. 한결같은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충선은 이어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화서(講和書)를 전달했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김충선의 일본명)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김충선의 편지를 받은 박진은 그의 귀화를 고심 끝에 찬성했다.
귀화 후 조선군 조총대 조직에 공을 세우다
김충선은 자신의 철포(조총)부대 5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귀화했다. 투항한 후에는 조총 제작기술을 조선군에 전수해 공방에서 조총을 생산케 했고, 화약제조법도 알려주어 조선군에도 조총대를 조직하는 데 큰 힘을 쏟는다. 또한, 직접 조총대를 조련시켰다. 그는 왜군의 진법, 병참, 첩보, 전술을 알고 있었으니 조선 입장에서는 대단한 수확이었다. 선조임금 역시 항왜(조선에 투항한 왜군)의 귀순 선무공작에 큰 힘을 기울였다. 그런 성과를 통해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 항왜는 거의 1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장졸들의 탈영을 막기 위해 부대의 막사 밖에 목책을 높이 두르라”고 명하기도 했다.
정유재란·병자호란 때도 혁혁한 전적
김충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곽재우 등의 의병과 함께 왜군과 싸웠으며 울산성 전투에서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휘하장수로 자신이 직접 부대를 통솔해 울산성을 공략했다. 정유재란 때 세운 전공으로 3품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으로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성명이 하사되고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10년 동안 북방 변경 수비를 한 공로로 정헌대부에 올랐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조정의 명령 없이도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나가 싸워 청나라 병사 500여 명을 베었으나 화의가 성립됐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대구의 녹리(鹿里)로 돌아갔다. 목사(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결혼, 5남 1녀를 두었으며 가훈(家訓), 향약(鄕約) 등을 마련해 향리 교화에 힘썼다.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그의 후손들인 사성(賜姓·임금이 공신에게 내린 성) 김해김씨의 집성촌이다.
김충선의 후손들은 17대 이상 내려오며 6만 가구에 20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김충선의 귀순과 우국충정은 역사에 길이 빛난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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