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로 변한 박해자 바울
사도행전 9장 19-31절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각을 갖는 문제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우선순위가 바뀌고 의지하는 대상, 내가 투신하는 가치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건강을 되찾은 사울은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사울을 암살하려는 음모 때문에 사울은 다메섹을 극적으로 탈출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과 우호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 사울은 거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지만 또다시 살해 음모 때문에 고향 다소로 돌아갑니다.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울(19b-22)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 사람의 신학과 가치관과 인생 목표 전체에 변화를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수용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변화된 삶을 주변에 보여주었습니다.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19b-22)
본 단락의 이야기를 갈라디아서 1장의 바울의 ‘자서전적' 기록과 나란히 놓고 읽으면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시력과 건강을 되찾은 사울은 다메섹에서 며칠을 그곳의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19b-20). 이 기간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1:16-17에서 말하는 아라비아로 가기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서 바울은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진술합니다. 그렇다면 이 진술은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과 상충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바울의 진술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려는 바는 자기가 지금 전하고 있는 복음이 하나님의 직접 적인 계시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예루살렘이나 다메섹에서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음을 말하려 합니다. 바울은 이제 기독교 박해자에서 기독교 전도자로 전향했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으로 요약합니다. 이것은 특기할 만한 사항입니다. 사도행전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행 13:33)를 제외하고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서신에서 이 중요한 기독론적 칭호는 매우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물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주’와 ‘그리스도’ 칭호를 훨씬 더 자주 사용하지만,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매우 중대한 진술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등장시킵니다. 이 칭호는 갈라디아서 1:16절에서 자기가 받은 중대한 소명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등장하고, 로마서 1:1-4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때도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갈라디아서 4:4에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성육신’ 사건을 이야기할 때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 칭호는 예수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사무엘하 7:14) 부활 이후 하나님 우편으로 고양하신 분(시편 2.7)임을 의미합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도주함(23-25)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환영 받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복음 전도자는 참 증인이 아니며 듣는 이들이 다 좋아하는 말씀은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변화된 사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은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복음이지만, 그 소식이 모두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23-25)
23절에서는 여러 날이 지났다고 말합니다. ‘여러 날’(직역하면·충분한 날들)은 ‘며칠’(19)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은 갈라디아서 1:18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전의 기간을 말합니다. 따라서 23-25절은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온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아라비아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사울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그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을 광주리에 넣고 성 밖으로 탈출시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32-33에서 이 일에 대해 언급합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여기서 아레다 왕은 나바트 왕국의 왕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17에서 언급하는 아라비아는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까? 흑자는 이 지역을 사막으로 간주하고 바울이 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구약성경을 연구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하지만 당시 아라비아는 팔레스타인 동부와 남부에 위치한 나바트 왕국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즉시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이동 장소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하면, 사울은 다메섹(사도행전 9:19-22)에서 아라비아(갈라디아서 1:17; 나바트 왕국)로 가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다시 다메섹(사도행전 9:23-25: 갈라디아서 1:17)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사도행전 9:26-30; 갈라디아서 1:18-19)을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남(26-29)
주변인에게 성도로서 변화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몸소 주의 일꾼이 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을 통해 누군가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주변인들이 주의 일꾼이 되고, 은사를 발휘하고, 적절한 일과 자리를 찾아가도록 돕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에 충성스러웠습니다.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26-29)
사울은 다메섹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후, 예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열두 사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기 원했지만, 정작 그들은 사울이 저질렀던 ‘과거 행적’ 때문에 그의 회심(‘제자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들과 사귀려는 사울의 의도를 하나의 잘 기획된 ‘속임수’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사울의 극적인 회심과 그에게 주신 사명과 그의 전도 활동에 대해 말해줍니다. 이를 통해 아직 사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사도들의 마음을 회유하고 사울의 ‘명예 회복’을 돕습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형제에게 보여준 바나바의 따뜻한 배려는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그의 온유한 성품과 조화를 이룹니다. 물론 원문은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으며 그가(사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으며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열두 사도를 만났다는 사도행전의 기록과 갈라디아서 1:18-19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라는 바울의 진술은 상충하는 것입니까?
성경의 다른 본문을 서로 비교할 때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각 저자가 각각의 본문에서 말하려는 의도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누가와 바울의 진술은 강조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는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열두 사도들과도 우호 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임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두 주밖에 머물지 않았으며 사도 중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만 만났을 뿐입니다(갈라디아서 1:18-20).
사울이 다소로 돌아감(30)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30)
사도들과 우호적인 유대 관계를 맺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헬라어를 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성도들은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간 후, 다시 다소로 보냅니다. 가이사랴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수도이며 학문이 발달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온 교회가 굳건하게 세워짐(31)
풀무불 같은 역경은 진짜 복음이 아니라 거짓 사상을 태웁니다. 세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거짓 선동, 세상을 얻으면 성공한다는 허황된 풍조들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신앙을 순수하게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초기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던 초대교회는 여러 과정을 통해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이제 사울은 사도행전 11:25에서 다시 등장하기까지 사도행전의 서사적 무대에서 잠시 동안(약 10년간) 사라집니다. 누가의 관점에서 볼 때, 9장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이방 선교를 위한 사전 준비가 모두 끝난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31절에서 초대교회의 전반적인 진행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구절로 사도행전 6:8부터 서술한 초대교회의 복음 확장 이야기를 일단락 짓습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는 팔레스타인 전체에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여기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성령의 임재는 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사울은 그리스도를 제거하려는 사람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제거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원수 관계이던 자들이 형제가 되고 형제이던 자들이 원수가 되었습니다. 원수이던 유대와 사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