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미날 / 에밀졸라 / 박명숙 / 문학동네
몇 주 동안 나는 탄광촌에 살았다. 처음으로 등불을 들고 갱도를 헤매기도 했고, 굶주리기도 했으며 죽음의 공포에 머물기도 했다.
작품 제목인 '제르미날(Germinal)'이라는 말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공화력의 일곱 번째 달로서 3월 21일부터 4월 19일까지의 한 달 동안을 가리키며, '싹(germe)이 나는 달'이라는 뜻이다. - 출판사 서평에서
희망의 이름을 가진 소설 속에서 나는 무엇을 느껴야 했을까?
조각조각 머릿속에 저장된 탄광의 이미지와 저자의 묘사만으로 소설 속의 장면을 바르게 그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경한 단어들이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몇 주 동안....
탄광 기사가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를 아무 말 없이 통과하는 동안, 광부들은 평소 몸에 벤 습관대로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섰다. 1권 101
대부분의 광부들보다 조금 더 배운 그로서는 그들 사이에 만연한 체념과 순종의 미덕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1권 102
소설은 "체념과 순종의 미덕"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하면 어떨까?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왜 누구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누구는 저토록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가?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누군가의 발아래에서만 살아가야 하는가? 그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희망 따위는 한 번도 품어 보지도 못한 채? 1권 257
희망이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조금씩 조금씩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갈 어떤 동력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희망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고개 들어 푸른 하늘이 있다는, 있을 것이라고 믿어볼 수는 있다. 희망이 구름으로 가려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개인은 누구나 용감할 수 있지만,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군중은 무력할 수 밖에 없다. 2권 256
마음속에 간직했던 희망은 언젠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 희망이 다른 이의 희망과 부딪힌다. 다른 이는 또 누구인가! 희망이 한 가지로 존재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탐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 2권 365
결국 걸림돌은 개인의 "이익"이라는 것일까? 그것이 내부에서 자란 것이든 외부의 것이든, 누군가의 희망으로 시작된 일이, 누군가의 희망 또는 이익을 위해 좌절된다.
개인, 무리(군중) 또는 계급 그리고 희망과 이익이 서로 얽히고 얽혀 그 매듭을 쉽게 풀지 못한다. 자본이라 불리는 돈, 자본이라 불리는 권력이 이 매듭을 순리라고, "체념과 순종의 미덕"이라 이름 짓는다.
소설은 이 매듭이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님을 빨갛게 얼어붙어 살짝이라도 건들면 쪼개어 떨어질 듯한 귓바퀴에 대고 조심히 귓속말로 전해주는 듯하다.
그런데, "체념과 순종의 미덕"이라는 것이 광부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라면, 아래만 바라보는 그들의 눈을 가리는 경구는 존재하는 것일까?
첫댓글 영화 쥬라식 파크와 제르미날이 맞붙어 무참히 깨어진 제르미날....
나는 사람 체취가 나는 영화가 좋았고 불란스 영화가 가지는 색감
때문에도 제르미날이 좋았다는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