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6일 사순 제3주간 (목) 복음 묵상 (루카 11,14-23) (이근상 신부)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루카 11,14-16)
그 때 말할 수 없던 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치유 이상을 의미한다.
복음시대 사회종교적 맥락에서 치유된 장애의 회복은 부차적이다. 마귀들렸다는 이해에서 드러나듯 말 못하는 신체장애는 문제의 드러난 결과일 뿐, 정작 말 못하는 이의 문제는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단죄받은 죄인이라는 사태다. 하느님의 반대편 힘에 지배당하고 있는 죄인. 그의 청각장애는 죄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청각장애가 사라졌다해도 온전치 못한 치유행위라면 죄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예수라는 온전치 못한 치유자 덕분에 그가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뿐, 그는 여전히 죄인. 예수님은 치유받은 자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온전함을 주장해야만 했다.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믿지 않겠다는 이들은 새로운 표징을, 또 새로운 표징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에게 믿음이 생길만큼의 넉넉한 표징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다른 모든 이들의 치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생의 주제, 곧 그들 자신의 삶의 바람이 이루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바람이 죄인들의 것처럼 비루하지 않고, 높고 거룩하다.
믿고 기대하는대로 온 세상이 다 뒤집혀서 자신들의 하느님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왕이 되어 민족을 으뜸의 자리에 놓는 것. 당장 이게 아니라면 이 희망을 더 강력하게 살리는 징표들, 예언을 통한 로드맵을 펼쳐보이는 것.
이 아득한 희망을 살리기에 예수의 징표는 너무 소소하고, 너무 개별적이며, 무엇보다 쓸모가 없다. 저 죄인 한 명의 치유를 어디에 쓸 것이냐?
그러나 예수에겐 전략이 없다. 그에겐 늘 단 한 명이 있을 뿐이다. 그는 한 명을 치유할 뿐이다. 그게 나라면, 치유된 이에게도 전략이 있을 수 없다. 그에게 늘 단 한 명이 있을 뿐이다. 온 생을 걸고 손을 뻗을 단 한 명. 우리가 파견된 자리는 그 한 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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