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거리 두기 》
살후 3:6~12
〈 코비드 펜데믹의 거리두기 〉
역사는 간혹 잠자고 있는 어떤 한 ‘개념’을 끄집어내는 수가 있습니다.
역사가 흐르는 중에 불현듯 소환된 개념은 다시 말하면 ‘가치’ 혹은 ‘가치관’입니다.
그동안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살았는데, 역사가 처한 현실이 그 개념을 불러냅니다.
소환된 가치관이 그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가 됩니다.
전 세계적 재앙이었던 코로나 펜데믹이 끄집어낸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거리 두기”였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거리 두기’라는 개념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거리 두기’를 하면서 세상을 삽니다.
그런데 코로나 펜데믹이 전 세계를 덮쳤습니다. 살아날 유일한 길은 ‘거리 두기’였습니다.
‘거리 두기’가 최고로 중요한 덕목이 되었습니다. ‘거리 두기’만이 살길이 되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첫 마디를 이렇게 했습니다.
“역사는 간혹 잠자고 있는 어떤 한 ‘개념’을 끄집어냅니다.”
여기서 ‘역사’를 ‘하나님’으로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간혹 잠자고 있는 어떤 한 ‘개념’을 끄집어냅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간혹 잠자고 있는 어떤 한 ‘개념’을 끄집어냅니다.”
하나님은 종종 어떤 개념을 끄집어내어 매우 중요한 가치관이 되도록 하십니다.
저의 신학이기도 합니다.
저는 2019년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필두로 하여 책을 부지런히 펴내고 있습니다.
저의 책이 아직은 베스트셀러가 아닙니다. 아직은 많이 읽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이 저의 책에서 다룬 주제를 끄집어내실 수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에 책을 씁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저의 책에서 다룬 신학적 주제를 소환하시리라 믿습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은 코로나 때 ‘거리 두기’를 가장 중요한 생존 수단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 거리 두기의 세 차원 〉
하나님은 코비드 펜데믹에서 ‘거리 두기’를 인류 생존의 중요한 가치로 삼게 하셨습니다.
코비드 펜데믹에서 전 세계 모든 이들이 ‘거리 두기’를 잘 실천했습니다.
코비드 펜데믹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읽어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살아오는 중, 오늘 본문과 ‘딱’ 마주쳤습니다.
(6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형제에게서 떠나라” 이 말씀은 곧 신앙생활에서 ‘거리 두기’를 하라는 선포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거리 두기는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 거리 두기 》입니다.
잘 들으시고 은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거리 두기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 1 〉 물리적 거리 두기
〈 2 〉심리적 거리 두기
〈 3 〉영적 거리 두기
〈 1 〉물리적 거리 두기
코비드 펜데믹에서 실천했던 거리 두기입니다.
전염병의 전파를 차단하기 위하여 거리 두기를 했습니다.
환진자와 거리 두기는 물론, 주변 사람이 확진자인지 알 수 없으니 거리두기를 합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거리 두기를 합니다.
① 냄새를 심하게 풍기는 사람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거리 두기를 합니다.
② 혐오감을 주는 사람이 눈에 띄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우회하게 됩니다.
③ 흉기를 든 사람이 있다면 거리 두기는 필수입니다.
☞ 모두가 물리적 거리 두기입니다.
☞ 물리적 거리두기, 꼭 필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 2 〉심리적 거리 두기
심리적 거리 두기는 ‘마음의 거리’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되었든, 저 사람과 나 사이에는 ‘마음의 거리’가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마음이 끌리고, 어떤 이에게는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마치 자석과도 같습니다. 자석은 S극과 N극으로 나뉩니다.
자석은 같은 극은 밀어내고, 다른 극은 잡아당깁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치 자석과 같아서 어떤 이에게는 다가서고, 어떤 이는 멀리합니다.
사람의 ‘욕심’중에는 ‘상대가 나를 잡아당겼으면 좋겠다’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단장을 합니다. 그리고 거리에 나섭니다.
일단 마주치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지는 않아야겠다는 마음에서입니다.
☞ 심리적 거리 두기에서 우리가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간혹, ‘자기를 세상 모든 이들이 자석처럼 잡아당겨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사람을 ‘관종’이라 합니다.
‘관종’은 ‘관심 종자’의 준말로써 신조어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에게 호감 갖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뜻밖으로 기독교인 중에도 관종이 있습니다.
저도 책을 쓰다보니, 슬슬 욕심이 생깁니다.
‘더 많은 이들이 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책을 쓰는 제가 경계해야 할 ‘욕심’입니다.
살아가는 중에 모든 이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것, 욕심입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겠다는 욕심은 일찌감치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개성이 있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거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거리두기를 해야만 합니다.
단, 심리적 거리 두기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도 사람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면서 ‘거리 두기’를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거리두기’가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 3 〉영적 거리 두기
물리적 거리 두기, 심리적 거리 두기에 이어서 영적인 거리 두기가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 안 되는 거리 두기입니다.
예수 안 믿고 사는 사람들은 물리적, 심리적 거리 두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거리 두기를 한 가지 더 해야 합니다. 6절을 다시 봅니다.
(6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초대교회 시대, 교회 안에는 ‘골칫덩이’ 게으른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멀지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일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오시면 우리 모두가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는데, 양식 쌓아둘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초대교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2천 년 동안이나, 이 문제는 교회의 골칫덩이입니다.
희한하게 ‘종말이 곧 닥친다’ 하면 사람들이 꾀어듭니다.
이단 종말론자들입니다. 이들과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이들이 교회의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들을 방지하고 교회의 전통을 세우고자 애를 썼습니다.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았다.(7절)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았다.(8절)
주야로 일을 했다.(8절)
섬김받을 권리가 있으나 권리를 쓰지 않았다.(9절)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다.(10절)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과 ‘거리 두기를 하라!’ 명령합니다.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영혼 구원 〉
2천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흘만의 부활, 40일 지나 승천, 그리고 10일 후 성령강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완성되었고, 이 땅에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영혼 구원”의 섭리와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얻는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으로 죽었던 영혼이 되살아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그 즉시, 영혼이 죽었습니다.
영혼이 죽었으니,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때부터 ‘오래 참으시는 중’에 죽은 영혼의 회생을 도모하십니다.
영혼이 되살아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섭리와 경륜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이 섭리를 구원이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할렐루야~
제가 아는 목사님은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하여 7년을 교회 강대상 앞에서 잤답니다.
“내가 구원받았음을 분명히 보여주십시오!”
7년 만에 확신을 얻고, 목사가 되었답니다.
구원받은 확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이에게 추가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영적 거리두기’입니다.
‘영적 거리두기’
우리는 영혼이 죽어있는 불신자들과 구별됩니다. 그들과 같지않습니다. 다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면 그들과 함께, 어울립니다. 직장생활을 합니다. 사회생활을 합니다.
그 속에서 그들과 물리적 거리두기, 심리적 거리두기는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거리 두기는 분명히 해야합니다.
☞ 물리적, 심리적으로는 동류가 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영적으로는 섞일 수가 없습니다.
〈 믿는 자들의 전통 〉
“안 믿는 자들 속에서 함께 살면서, 영적 거리 두기는 어떻게 해야할까?”
오늘부터 우리에게 추가된 기도 제목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합니다. 6절에 답이 있습니다.
“ ~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그동안 우리는 신앙생활을 너무나 대충하지 않았는가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안 믿는 이들과 다를 게 없이 지내오지 않았는가 회개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전통은 ‘세상 풍조’입니다.
믿는 성도의 전통은 창조주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님,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순종입니다.
영적 거리 두기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영적 거리 두기 개념이 내 안에 있었는가?’ 진단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 펜데믹을 통하여 인류에게 ‘거리 두기’ 개념을 소환하셨습니다.
이와 함께, 데살로니가 후서 3장 설교를 통하여 ‘영적 거리 두기’를 점검했습니다.
6월 셋째 주,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본문을 통하여 ‘영적 거리 두기’를 실천합니다.
“영적 거리 두기는 세상 풍조와 거리 두기입니다.”
아울러 물리적 거리두기, 심리적 거리두기도 성도답게 실천하는 한 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