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117. 묵상글 들 (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 나를 하찮게 여기지 말고 재물을 하찮게 여겨야. 등 )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를 하찮게 여기지 말고 재물을 하찮게 여겨야
오늘도 사울에 대한 인물 탐구를 계속하겠습니다.
지난 시간 사울은 허우대가 그럴 듯한 근사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자기에 대한 자신감도 가지고 뽐낼 법도 한데
오늘 얘기를 보면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만들어 낸 말 중에 근자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거없는 자신감의 준말이지요.
이런 어법으로 얘기한다면 사울은 근열감의 소유자일까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울이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봤다기보다는
사무엘이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보기에 사울이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이고,
자신을 소중하고 귀히 여겨야 마땅한데 하찮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때 즉시 떠오르는 코린토 전서 6장 19절의 바오로 사도의 말이 있지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이 말은 자신의 몸을 함부로 굴려 겨우 욕망을 채우는 데 쓰지 말고,
성령의 궁전이 되도록 써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또 떠오르는 존재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주님께 대해서는 자신이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지만
주님 외에는 그 누구와 비교해서 자신을 하찮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앞길을 닦는 자로서의 사명을 망각하여 함부로 살지 않고
자신을 근신하며 늘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이 임금일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임을 망각하였고,
세상 재물과 전리품에 욕심을 부려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주님의 뜻은 재물을 하찮게 여기라는 거였는데
사울은 자신을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핑계는 좋습니다.
주님께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그것은 강도질한 것으로 제물을 바치겠다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기름 부음 받은 자다운 것입니다.
기름 부움 받은 자는 성별된 자라는 뜻이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욕심이나 부려서는 안 되는 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만 쓰이도록 성별된 자입니다.
성작을 가지고 술을 마시면 안 되고,
성체를 개나 쥐에게 주면 안 되듯이
우리를 함부로 굴리면 안 되겠습니다.
어제 얘기를 연장해서 성찰한다면
우리는 소박데기나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여자요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의 자매들에게 얘기하듯 성부의 딸이요 성령의 정배들입니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곧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단식의 열매는 애덕의 실천」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소신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디딤돌로 삼아 미래를 열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을 쇄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소식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를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 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단식은 생색내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의 절제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사랑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복음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두 명의 사울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마지막 판관이었고 사울은 첫 임금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진 판관 시대 250년의 역사는 비록 불안정하기는 했으나 열두 지파가 평등하게 연합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신앙의 백성을 구현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주변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지도자들의 신앙이 약화되는 바람에 왕정제도를 도입하여 정치를 안정화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지막 판관이었던 사무엘은 이 지도자들에게 예언자적인 경고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막무가내로 요구했고 백성들도 이에 부화뇌동한 결과 사울이 첫 임금으로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기보다 전리품에 눈이 어두워져서 이제는 예언자로서 경고한 사무엘의 개입으로 이스라엘의 첫 왕위를 빼앗기고 맙니다. 이러한 사울의 비극은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같은 이름을 지닌 사울이 천년 후에 극적인 회심과 장고를 거듭한 식별 과정을 통해 이방인 선교의 새 복음화 경로를 개척한 놀라운 역사로 극복됩니다.
신약의 사울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직계 사도들이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던 노선과 달리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눈을 돌림으로써 보편적인 복음화의 방향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향에서 기성 사도들과는 다른 새로운 복음화의 방식을 개척하였으니, 그 특징을 찾아가는 선교, 노동하는 선교, 공동체를 건설하는 선교, 지속적으로 유대하는 선교, 이렇게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그는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찾아가는 선교를 지향하고서, 소아시아 일대와 그리스 일대에 20여 년에 걸쳐서 세 차례의 선교 여행으로 복음화의 범위를 전 로마 제국 영토로 넓힌 후에 생의 마지막에는 로마로 가서 순교하였습니다. 오늘날 서방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사울의 공로가 있습니다.
그는 박해자의 전력을 숨기지 않았고 이방인의 복음화를 위해 부르심 받은 평신도로서의 자의식을 고수하면서도 사도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노동하며 자신의 생계비와 선교비를 충당했으며, 생활과 활동으로 이방인들에게 모범이 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평신도 사도로서 그가 지녔던 자의식과 명예감이 어찌나 뛰어났든지 이에 바탕한 그의 선교 활동은 기성 사도들도 엄두를 내지 못한 로마 복음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노동하는 선교를 기본으로 하는 사울의 선교는 선교지 이방인들에게 감화를 줄 만큼 영향력이 컸기에 그는 이 모범적 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을 본받아서 이방인들에게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공동체를 제물로 봉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세례를 주어 신자들을 늘리기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그래서 박해에도 견디어낼 수 있는 선교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선교는 서로 유대하는 선교로 이어졌습니다. 그가 세 차례의 선교여행에서 20여 년 동안 세운 공동체들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까지 넓게 퍼져 있었고 종국에는 로마에로 연결되기 마련이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그 많은 인명은 다 사울의 선교 협력 네트워크입니다. 신약성경에까지 포함되게 되어 그 진실성과 신앙적 정통성을 인정받은 그의 수많은 편지들은 이 유대의 결과물입니다.
이렇듯 구약의 사울은 판관들의 전통을 이어 받은 사무엘에게 경고를 받아 하느님과 엇박자를 내고 말았지만, 신약의 사울은 이 엇박자를 벌충하고도 남을 정도의 공로를 쌓아서 그 선교적 명성이 기성 사도 열둘을 능가하는 정박자를 냈습니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초등학생 때, 어머니 심부름으로 석유 가게에 갔던 일이 기억납니다. 석유를 담는 통과 돈을 주시면서 석유를 사오라고 하셨습니다. 석유 가게에 가서 통에 석유를 담고서 계산을 위해 돈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께서 화를 내시며 혼내시는 것입니다. 지폐를 꼬깃꼬깃 구겨진 채 주었다는 이유였습니다. 빳빳하게 펼쳐진 돈이나 꼬깃꼬깃 구겨진 돈이나 그 가치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아저씨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는 사람에게 어떤 돈이 더 기분 좋겠니? 돈은 귀하기에 이렇게 잘 펼쳐서 줘야 한다.”
그 뒤에 돈을 낼 때는 항상 잘 펼쳐서 드립니다. 그리고 마트에서 계산대에 물건을 올릴 때도 최대한 계산원이 쉽게 계산하도록 배려합니다.
남을 배려하면 상대방도 저를 배려한다는 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 배려받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받고자 한다면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신앙적인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사랑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이가 자기 뜻을 따르지 않으면 죄인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모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합니다. 매일 게임만 하고 있으니 미치겠어요.”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사실 공부만 하는 사람, 놀기만 하는 사람, 먹기만 하는 사람, 잠만 자는 사람…. 이런 식으로 한 가지만 하는 사람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만 잘하면 정상일까요? 이 역시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인간 생활과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기쁨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착각입니다. 신앙생활과 일상의 생활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특히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
살면서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실수할까 봐 계속 걱정하는 것이다(엘버트 허버트).
----------------------
백해무익한 걱정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어쩌면 모두가 걱정 기계가 되는 것처럼 계속해서 걱정을 찍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을 한다고 해서 추락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안전히 귀가하길 걱정한다고 해서 안전 귀가 가능성이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암 검사 결과를 걱정하며 기다려도 암이 아닐 가능성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걱정은 그렇게 유용하지 않으며,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등 되레 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걱정에 자유롭지 못한 우리입니다. 걱정으로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걱정보다 ‘지금’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떠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꿀 수 없거나 피할 수 없다면, 걱정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걱정은 백해무익합니다. 주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면서 걱정을 줄여 나가야 합니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스 큉 신부님의 “나는 무엇을 믿는가?”를 읽고 있습니다. 책의 단락 중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전에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객체가 가지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은 정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낮은 데로 흐르는 면에서 겸손의 의미도 있습니다. 주체가 가지는 의미가 있습니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보듯이 내가 의미를 부여해 주면서 비로소 의미가 생깁니다. 철학, 종교, 문학, 윤리는 이런 의미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의미의 상황을 경험하기도 하고, 목격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상실,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가 있습니다.
30일 피정을 하면서 신학생들에게 ‘삶의 의미’를 이야기했었습니다. 묵상이 잘 안 되거나, 분심이 들 때면 그 ‘삶의 의미’를 읽어보거나, 외워보라고 하였습니다. 종교인에게, 사제에게 삶의 의미는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취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따라갔던 길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길입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계몽주의를 살아왔고, 이념과 관념의 대립을 살아왔습니다. 과학과 자연은 진화론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저 또한 진화론의 과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의, 식, 주를 해결하는 것이 삶의 의미인 사람도 수억 명이 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춤하였지만 체험이 삶의 의미인 사람도 많습니다. 여행, 공연, 운동, 취미, 봉사, 나눔이 삶의 의미인 사람도 많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쾌락과 향락에 취할 수도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불의와 고통의 현장에서 신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스 큉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들 흔들리지 마! 돌아올 수 있느니. 낮이 문들 안에 있다. 그대들은 이미 밤바람을 느낄 수 있을 터, 아침은 또 오리니. 그대들 속지 마! 삶이란 거의 없어. 삶은 급행열차 안에서 발을 질질 끌며 걷고 있지 않아! 그대들이 삶을 그대로 나둬야 한다면 삶은 그대들에게 충분하지 않아! 그대들 위로받지 마! 그대들은 시간이 많지 않아! 구원받은 자들, 온통 곰팡이가 슬었다고? 삶은 아주 심각해 갈수록 더욱 준비 되지. 그대들, 부역과 소모로 홀리지 마! 무슨 불안이 아직 그대들을 휘저어 놓을 수 있는가? 그대들, 동물처럼 죽지 않고, 그 후에 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야.” 오늘 감사할 일이 있다면, 오늘 기뻐할 수 있다면, 오늘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삶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안토니오 아빠스는 ‘삶의 의미’를 찾아 사막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었고,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토니오 아빠스를 따라서 사막으로 갔고,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생활의 시조’라는 칭송을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낡은 것들, 세상의 것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를 우리의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힘들고 험난해도,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이 가야할 ‘삶의 의미’입니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포주는 새 부대에, 그리스도 중심의 삶
- 말씀, 회개, 기도, 믿음 -
새벽에 일어나 잠시 휴게실에 들렸다가 신간 서적을 발견하고 참 반가웠습니다. 새 책을 보면 우선 행복감에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37년전, 1985년 왜관수도원에서 수련받을 때, 수련장 신부님이셨던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님의 참 신선하게 느껴지는 ‘사제서품 50주년 기념 글모음’집었습니다. 참으로 선량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으로 기억하는 어른이십니다.
“우리 믿음이 든든한 바위 같게 하소서”
책 제목도 마음에 와 닿았고 책 서문의 내용도 소박하고 겸손하며 온유한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수도원에 입회한 지가 벌써 6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수도서원한지도 53년이 흘렀고 사제서품 50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수도자로서 또한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고, ‘아빠, 아버지’의 크신 배려로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저를 받아들여 이끌어 주신 수도원의 선배님들과 공동체 형제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오래된 옛 글들을 꺼내 보니, 과거의 제가 지금의 저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더 열심히 살라고 가르치고 깨우치는 느낌이 듭니다.”
절의 두 귀한 보물은 절의 역사가 담신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이라 하는 데, 이런 아름다운 수도선배는 수도원의 참 귀한 자산입니다. 참으로 한 평생 성소에 충실했다는 삶 자체가 참 아름답고 귀하게 생각됩니다.
오늘은 은수생활의 아버지라 칭하는 사막의 성 대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무려 105세 까지 사셨으니 성인들중 아마 가장 장수했던 분일 것입니다. 105세까지 참으로 성소에 한결같이 충실했던 분으로 네가지 예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안토니오 아빠스의 회심 과정에서 말씀과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의 현존이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들은 것입니다. 말씀이 회심을 일으키고 기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도 날로 굳건해지니, 말씀-회개-기도-믿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끊임없는 말씀과 회개 및 기도의 수행이 든든한 바위같은 믿음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완전히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19,21)
바로 이 복음 말씀이 안토니오의 결정적 회심과 더불어 그를 사막의 수도생활로 이끌었습니다. 성인의 마지막 유언도 인상적입니다. 임종을 예견한 성인은 지팡이는 성 마카리오에게 한 개의 양피 망토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또 한 개의 양피는 제자 세라피온에게 주고 자신의 시신은 비석 없는 비밀묘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얼마나 무소유의 본질적 가난한 삶을 살았는지 그의 성소 말씀이 평생 성인께 영향을 미쳤음을 봅니다.
성인은 언젠가 온 세상이 덫들과 함정으로 가득 한 꿈을 꾸었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오, 좋으신 주님, 누가 이러한 덫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애원하듯 묻었을 때 들려온 주님의 답변입니다. “겸손은 더없이 그것들을 피할 것이다.” 새삼 모든 덕의 어머니라 칭하는 겸손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자기를 아는 자가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끝까지 성소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안토니오가 악마와 치열하게 싸운 후 원망하듯이 주님께 악마들이 공격할 때 하느님은 어디 계셨나 추궁하듯 묻자 주님은 대답합니다. “나는 거기에서 너와 함께 있었으며, 네가 사나이답게 잘 싸우며 견뎠으므로, 나는 너의 이름이 온 세상에 두루 퍼지도록 할 것이다.” 하느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늘 나를 살펴보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에 이어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주인공은 사울입니다. 사울의 불행의 단초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치 못했음에 기인함을 봅니다. 이 또한 하느님 탓이 아닌 자업자득입니다. 순간의 탐욕에 빠져 주님의 말씀을 잊었고 구구하게 합리화 합니다만 이미 하느님의 마음은 그에게서 떠났고 성소에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바로 다음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주시는 다음 주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말씀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항구할 것을 가르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15,22)
바로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의 이해에도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참으로 본질적인 분별의 잣대는 단식의 횟수가 아니라 말씀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단식을 잣대로 함은 주객전도主客顚倒, 본말정도本末顚倒의 어리석음을 반영합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가 있으며, 지금은 단식의 때가 아닌 주님이신 당신과 함께 축제인생을 즐겨야 할 때라 말씀하십니다.
불가에서 인생을 고해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교회의 믿는 이들은 고해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축제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깨어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살 때 축제인생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축제인생을 살 수 있겠는지요?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답이자 결론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래야 늘 새 하늘에 새 땅의 삶이 겠습니다. 바꿔야 할 것은 외적 환경이 아니라 마음을 늘 새롭게 하여 새 부대로 만드는 일이 겠습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말씀-회개-기도-믿음”의 일련의 여정을 통해 늘 새 부대의 마음으로 만드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래야 늘 새 포도주의 현실을 새 마음 부대에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노년이 될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는 데, 지갑은 물론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을 수 있도록 마음의 눈, 마음의 귀도 늘 열려 있어야 함을 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해주시고, ‘새 부대의 마음 안에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게 해 주시며,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해주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아멘.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들의 스승처럼
단식하였고(마태 9,14 참조), 바리사이들은 속죄일 외에,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습니다(루카 18,12 참조).
물론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습니다(『디다케』, 8,1 참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신랑과 손님을 비유로 들어,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변호하십니다.
혼인 잔치의 신랑은 예수님이시며 손님은 제자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구원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오신
‘지금’이 바로 구원의 시간임을 드러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을 창조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에제 36,26)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간입니다.
이렇게 혼인 잔치는 구원의 시간, 기쁨의 시간이기에
슬퍼할 수 없고(마태 9,15 참조), 단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단식할 것입니다.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지 않으며,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주어진 새로운 것, 곧 그분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하느님 나라를 강조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낡은 사고와 습관 안에 담을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회개와 이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 안에 그분의 나라를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2코린 5,17-18).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절)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 말씀하셨다.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 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19절) 이스라엘 성조들에게 구세주가 처음 약속된 때부터 성도들은 눈물과 비탄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놀라 화내며 선포된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과 관련된 말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또 새것(새 천 조각, 새 포도주)과 낡은 것(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즉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는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묵은 나’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 22)
새로워지는
삶의 연속이다.
모든 생활의
중심에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계신다.
새 포도주가
맺어주는
새로워지는
사랑의
새 삶이다.
새 포도주로
얻게되는
새로운 삶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진정
새로워지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는
새 포도주이다.
그래서 신앙은
새 포도주가
주는
새 체험의
연속이다.
새 포도주가
우리를
안아준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새 포도주가
주는
소중한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새 포도주가
우리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새 포도주의
울림을 듣는
새 날이다.
새 포도주와의
친밀감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새 포도주가
진정한 가치를
우리의 생활에서
만나게 하여 준다.
새 포도주가
향하는 관계가
우리가 진정
사랑해야 할
사랑의
관계이다.
새 포도주
자체가 곧
새 부대이다.
신앙과 생활
사랑과 새로움은
언제나
하나의 일치로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8-20)”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을 본받아서 자주 단식했고,
바리사이들은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려고 자주 단식했습니다(루카 18,12).
그들의 단식에는 원래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한다는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었고,
위선자들의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잘난체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으셨지만,
위선자들의 단식은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태 6,16-18).>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 친구로 표현한
세례자 요한의 말에서(요한 3,29) 표현을 빌려온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지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고 있는데,
메시아는 이미 왔다. 그러니 그런 단식을 하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할 수 없다.’는 ‘하면 안 된다.’입니다.
(“단식할 필요가 없다.”도 아니고, “단식을 안 해도 된다.”도 아닙니다.)
메시아께서 오셨는데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는 것은,
이미 오신 메시아를 메시아로 안 믿는 것이고, 메시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단식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손님들’이라는 말은, “신앙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고,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신앙인들(제자들)은 ‘손님’이 아니라 ‘신부’입니다(요한 3,29; 2코린 11,2).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바로 우리가(신앙인들이) 그 잔치의 주인공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혼인 잔치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그 ‘잔치의 시작’이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잔치는 ‘잔치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손님으로서 ‘남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으로서 ‘나의 잔치’에 참석합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때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사순 시기에 행하는 단식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뜻이고,
평소에 개인적으로 하는 단식은 ‘회개’의 단식입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새 천, 새 포도주, 새 부대’는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이고, ‘헌 옷, 헌 가죽 부대’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낡은 종교생활과 낡은 사고방식입니다.
말씀의 표현만 보면, 헌 옷이 찢어지는 것과 헌 부대를 터뜨리는 것을
걱정하시는 말씀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보존해야 할 것은 헌 옷과 헌 부대가 아니라,
새 옷과 새 포도주와 새 부대입니다.
(헌 옷과 헌 부대는 폐기 처분해야 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다음 말씀이 더 있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새것을 거부하는 태도는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면서 회개를 거부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단순히 “헌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꿔라.”가 아닙니다.
“옳지 않은 것을 버리고 옳은 것으로 바꿔라.”입니다.
옛날 것이라고 해서 항상 낡거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새로 나온 것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수천 년 전의 것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도 이천여 년 전의 것이지만,
우리는 그 가르침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천여 년 전에,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혁명적인 것이었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롭고 혁명적입니다.
반면에 요즘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이천여 년 전의 세속주의자들의 낡고 그릇된 사고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선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선이고, 악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악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새 하늘, 새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그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지금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 자신도 날마다 새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이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화’입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복음화’의 반대쪽에 있는, ‘스스로 낡아지는 모습’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일상의 회복’만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복음 정신의 회복’을 말해야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세속 사람들은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거리두기만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세속의 풍조와 사고방식에 대한 거리두기를 실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복음 정신의 회복이고,
세속의 풍조와 사고방식에 대한 거리두기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에페 4,17ㄴ-18).”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기쁨♣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오늘의 말씀들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말씀을 듣고, 새로운 영혼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것을 새롭게 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주는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고, 그 기쁨이 사라지는 슬픔의 때, 곧 죽음을 맞을 때가 바로 단식할 때라고 하십니다(2,19-20).
바리사이들은 매년 속죄의 날에 하는 의무 단식(레위 16,29) 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루카 18,12).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스승의 고행을 본받아 자주 단식했던 것 같습니다. 단식은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신심행위였으나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려고 위선적으로 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생전에는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1세기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마다 단식했을 것입니다. 1세기 말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디다케 8,1). 그리고 2세기 말에는 부활축일 전에 단식을 했습니다.
우리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분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랑의 결핍과 부재’를 채우기 위해 단식해야겠습니다. 단식은 그 결핍과 부재, 새로움의 상실을 다시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한 영적 용트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오심으로 열린 새 시대에 그분의 신앙과 가르침에 맞는 새로운 마음과 시각과 생활양식을 지니도록 힘써야겠습니다(2,22). 또한 묵은 떼처럼 들러붙어 있는 바리사이들의 위선, 과거 전통과 제도에 매인 폐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와 이 사회를 쓸모없고 썩게 하는 낡은 천과 낡은 부대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과 돈, 인간의 생각과 힘을 주인으로 섬기는 우상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주의, 차별을 부르는 사회주조들, 복음의 가치보다 정치이념이나 사상을 앞세우는 태도, 비합리적 사고, 폐쇄적인 태도, 고정관념과 편견 등이 그것일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위해 새로운 마음과 순수하고 사랑 넘치는 눈길,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는 소박한 영혼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단순하게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느끼며 그분처럼 생각하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듣고 명심함으로써’(1사무15,22) 낡은 천과 낡은 부대를 버리고, 주님 보시기에 좋고 우리 서로를 살리는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는 복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과거의 일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혀와 배를 잘 다스리십시오!
세상 모든 수도자의 아버지요 길잡이이신 성 안토니오 아빠스의 기념일입니다.
그는 기원후 251년경 이집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세 되던 무렵 한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마르코 복음 10장 21절이었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머리가 명석하고 빠릿빠릿했던 안토니오는 즉시 그 말씀이 자신을 위한 말씀인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말씀을 듣자마자 조금도 지체치 않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라 우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한동안 성문 밖에서 가난한 노동자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던 그는 깊은 사막속으로 들어갑니다.
놀랍게도 그는 20년 세월 동안 홀로 완전한 고독 속에 사막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막 속에서 얼마나 고초가 컸겠습니까?
틈만 나면 그의 귓전을 때리는 사탄의 간사한 유혹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안토니오, 너 지금 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 것인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휘황찬란한 도시 생활이 얼마나 멋진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포기하라는 유혹, 맛있다는 유혹, 달콤하다는 유혹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권에 무조건 승복한 그였기에 모든 유혹을 잘 극복하고, 깊은 내공을 닦은 다음 20년만에 사막에서 걸어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막에서 걸어나온 안토니오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20년간 제대로 먹지 못해 해골바가지 같은 얼굴, 노인의 얼굴을 하고 나올 줄 알았는데, 더없이 건강한 얼굴, 천사의 얼굴로 걸어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성숙한 인간의 모습, 진보한 영성으로 충만한 안토니오의 모습에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숙한 영적 동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치유시켰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안토니오는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존경을 뒤로 하고 또 다시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더 깊은 하느님과의 만남과 합일 속에 살다가 356년 10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안토니오는 한곳에 머물렀지만 영원히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늘 깨어있기 위해, 언제나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 또 다시 더 깊은 사막으로의 여행을 평생토록 반복했습니다.
안토니오는 깊은 고독, 깊은 사막, 그리고 부단한 이동과 순례야말로 참된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지는 장소임을
오늘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고독이 없을 때 거짓 자아의 환상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고독은 부족한 나와의 치열한 싸움의 자리인 동시에 진실로 하느님을 대면하는 위대한 만남의 자리입니다.
고독이라는 광야는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변화의 장소요 새출발의 장소입니다.
누군가가 안토니오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단순화의 대가인 안토니오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바라보십시오.
무엇을 하든 성령의 가르침대로 사십시오. 어디에 살든 그곳을 쉽게 떠나지 마십시오.
이 세 가지만 잘 지키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또 다른 제자가 안토니오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세 가지의 전문가 안토니오는 이번에도 간단간단하게 세 가지를 말해주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너무 의지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일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혀와 배를 잘 다스리십시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헌 부대 새 부대 되는 법: 새 포도주를 견뎌라!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하게 될 터인데 당신을 빼앗길 때라고 하시며,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잔치하는 중이라 단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며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지 못하고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새 천 조각이고 새 포도주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은 새 옷이며 새 부대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신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우리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는 방식은 누군가를 자신 안에 담음으로써입니다.
누군가를 자신 안에 담는다는 말은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감사하며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부모를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존감이 낮아서 자신이 낡은 부대로 있어야만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낡은 부대로 머무르는 합리화가 바로 자신에게 상처 준 부모입니다.
그 부모를 품고 있으며 자신이 낡은 부대로 변화되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기가 품고 있는 것은 상처받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 자아가 자신에게 상처 준 부모를 품게 만들며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부모 탓이라고 여기게 합니다.
우리 뇌는 부정이 없습니다.
무조건 긍정입니다.
부모에 대해 안 좋은 생각 해도 부모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의 저자 이시이 마레히사 씨에게 고야라는 한 남성이 찾아왔습니다.
연년생 형 때문입니다.
처음에 둘은 사이가 매우 좋았습니다.
공공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폭군으로 사소한 일에도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오면 폭력이 더 심해졌고 밥상을 엎거나 밥공기를 집어 던지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정말 날마다 지옥 같았어요.
그래도 형과 저는 항상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어요.
언젠가 아버지에게 복수하자면서요. 그런데 대학생이 된 형도 주정뱅이가 된 거예요.
형의 술 취한 모습이 아버지와 너무 닮아서 형을 보는 것이 힘들어졌고 그렇게 형과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어요.
형은 술만 마시면 친구들에게 아버지 욕을 하였는데, 아버지와 똑같이 물건을 집어 던지고 주먹을 휘둘러
싸움이 일어납니다.
얼마 전에는 술에 취한 형이 앞니가 부러진 채로 피를 흘리면서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어요.
저는 형에게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지는 말라고 했어요. 그러면 또 싸움이 일어나요.
어느 날 형이 토해내듯이 한 말이 있어요.”
“그 말이 뭔가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어쩔 수 없다’라는 거였어요.”
“그럼 동생도 술을 마십니까?”
“아뇨, 저는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아요. 결혼해서 원만하게 잘 살고 있지요.
그러나 형은 술 때문에 여성과 헤어졌어요.”
형도 분명 아버지처럼 되기를 원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되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모습과 반대로 나갔습니다.
그러니 그런 가정에서 자라서 그렇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고 자신에게 상처 준 아버지는 그렇게 사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이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 부대로 있고 싶으니 헌 술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헌 옷이 되고 싶으니 헌 사람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생은 어떻게 아버지와 반대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나오지는 않지만 자신 안에 새 포도주를 담은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욕구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욕구는 그 욕구를 가진 사람과 함께 자신 안으로 들어옵니다.
욕구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본래 우리에게는 생존 욕구만 넣어져 있었습니다. 나머지 사랑과 관련된 모든 욕구는 내가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이면서,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함께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좋지만, 우선은 그분은 감당할 수 없기에 포도주를 조금씩 내가 견딜 수 있는 더 새로운 포도주로 넣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부대도 더 튼튼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내가 변화하는 방식입니다.
마레히사 씨에게 남편의 속마음을 듣고 싶다며 남편과 함께 상담실을 찾은 아내가 있습니다.
남편은 이구치 순스케로 29세의 공인회계사였습니다. 이구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침착하고 냉정해 보이는데,
조금만 기분이 언짢아지면 난폭하게 돌변하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혼하고 싶은데 이혼 말을 꺼내면 손찌검당할까 봐 겁내고 있었습니다.
이구치는 앉자마자 한마디도 안 하고 마레히사 씨를 노려보았습니다.
마레히사 씨는 “혹시 아내가 왜 당신을 여기에 데려왔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계속 노려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아내는 남편분과 이혼하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구치는 의외로 냉정하게 “그렇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왜 이혼을 원하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알아요, 안다고요! 내 태도. 공격적이잖아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무시당하면서 자라왔어요.
부모에게서 사랑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요. 항상 방임 상태에서 자랐어요.
부모가 나에게 한 말이라고는 ‘멍청이’, ‘저리 가!’ 이런 말뿐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사람을 보면 경계하고 공격하게 된 거고요.”
“그럼 개선하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개선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돼요. 나는 애초에 실패작이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구치는 아내의 이혼 생각을 이미 예상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아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약간 덜 새로운 포도주를 먼저 담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성장합니다.
이런 때 상담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잠깐 만나는 덜 새로운 포도주. 마레히사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이구치 씨, 사실은 당신도 바뀌길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온 거고요.
나는 나 자신을 잘 알아서 하는 말인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인회계사는 되지 못할 겁니다.
공인회계사가 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공인회계사를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뜻은 그만큼 그 직업을 갖게 힘들다는 의미겠지요.
그래도 당신은 공인회계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사무실을 열고 일도 잘하고 있으니까
당신에게는 훌륭한 능력이 있는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요?” “당신은 실패작이 아닙니다.”
마레히사는 이구치에게 존재의 신비함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태어나기도 힘들고 그래도 그 무한 경쟁을 뚫고 태어나 이 나이까지 잘 자란 신비. 그래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두 사람이 돌아간 뒤 아내에게 메일이 왔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어요. 저는 남편이 선생님에게 폭력을 쓰지는 않을까 불안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줬어요. 지금까지 남편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남편이 상담 후 ‘오늘 상담 나쁘지 않았어’라고 말한 거예요.
무엇이 바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새 부대가 되려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하면 과거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새 부대가 되었는데 헌 포도주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는 사라집니다.
상처에 집중하지 말고 변화에 집중해야 합니다.
변하고 성장하면 상처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렇게 변하게 만드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고 그 사랑의 완성은 그리스도입니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안토니오 아빠스(연중 제 2 주간 월요일)-묵상과 기도
성 안토니오는 3세기 중엽 이집트 중부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하신,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에 감화, 자신의 상속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눈 후,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고, 많은 이들이 따랐으며 세속의 그릇된 가치를 극복하고 극기와 희생의 삶의 이어 갔습니다.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립니다. 안토니오는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고, 4 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사무엘서에서 사울왕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전리품 가운데 좋은 양과 소를 끌고 와서 제사들 드린다고 했을 때 사무엘은 "제사드리는 것이 말씀울 듣는 것 보다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 더 나은가? 하였고,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 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은 새 것, 새 포도주다.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그만두십시오. 간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응답하였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내보내시면서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 ‘가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에 덤벼들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가라고 하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아말렉 임금 아각은 사로잡고 그 밖의 아말렉 사람들은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다만 군사들이 완전히 없애 버려야 했던 전리품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양과 소만 끌고 왔습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1사무 15,16-23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18-22
실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마리아는 그의 태중에 그리스도의 아기가 태어난다는 천사의 말씀의 전갈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예"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말씀입니다. 단지 명령과 금령의 율법이 아니라, 구원과 생명, 진리의 말씀입니다. 일상에서 만남과 대화에서,기도와 성경 말씀에서, 기도와 전례에서, 현장과 생활에서 그분의 말씀이 전달될 때, 우리는 그 말씀에 "예"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실천합니다. 그 말씀은 새옷으로 견고하고 튼튼하며 또한 새 포도주로서 힘있게 활동하고 팽창하여 역동적인 진리의 역사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 순명하고 실천하는 일꾼이 되도록 합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신앙에도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땐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며칠 아주 열심히 이 부분에 대해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역사를 보더라도 어떤 문명이 한 문명을 지배할 때는 힘의 논리로 보면 피지배 문명은 지배 문명에 종속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힘의 균형이 깨져 종속된 문명을 탈피해 산다고 해도 그 역사가 오래됐다면 그런 역사 안에서 고정된 의식은 좀처럼 쉽게 변화가 되기 힘듭니다. 그만큼 생각과 사상을 전환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방증입니다.
요즘 새로운 일을 잠시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기업체에서 근무했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제가 하는 일과 연관된 일입니다. 요즘은 기업의 시스템도 컴퓨터와 전산의 발달로 생산과 기업 시스템이 자동화로 다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도태되는 게 분명합니다. 이걸 제 눈으로 요즘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 관련 기업에 갔을 때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노련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당시만 해도 그건 전산이나 컴퓨터와 같이 자동화로 할 수 없고 오로지 사람의 손과 머리로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해야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첨단을 달린다고 해도 아주 특이하게 이런 부분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회사는 그런 일을 하는 그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또 능력도 상당히 좋은 대우를 해 줬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런 분도 요즘은 어떤 생활을 하실 것 같습니까? 지난주에 잠시 그 회사에 강의를 하기 위해 방문했던 것입니다. 직원 교육이 필요해서 갔던 것입니다. 저는 그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습니다. 다만 그 분야에 대해 필요한 지식이 모든 게 영어로 된 상태라 그 내용에 대해서만 강의를 해 주면 됩니다. 창원에 있는 LG 관련 기업체입니다. 사전에 가기 전에 회사에서 미리 지급된 책을 탐독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저는 다시 고등학교 때 했던 수학과 또 물리에 관한 전문 지식을 며칠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매뉴얼을 이해하려면 필요했던 것입니다. 방산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특히 좌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해 프로그래밍하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베이직 프로그램을 공부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 베이직 프로그램만으로는 힘들지만 그때 배웠던 그 지식이 많은 도움이 됐던 게 사실입니다.
이렇게 사전에 교육에 필요한 공부를 준비한 후에 갔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강의가 필요해서 갔는데 그때 그분은 상당한 위치에서 그분의 힘이 막강했습니다. 지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계실 것 같습니까? 이빨 빠진 호랑이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지금은 예전에 그분이 했던 방식으로는 변화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고 이젠 기술도 발달돼서 그분의 실력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 것입니다. 모든 게 컴퓨터와 전산으로 다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컴퓨터를 다루는 수준으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작업을 컴퓨가 이해를 할 수 있는 방식인 기계어로 명령을 내리고 제어할 수 있는 전문 프로그램을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이 된 것입니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변화가 될지 말입니다.
지금은 아주 단순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기술도 필요한 작업도 아닙니다. 누구나는 아니지만 며칠만 설명을 들으면 할 수 있는 그런 작업만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이런 모습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한때는 그 기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그런 분이었는데 시대의 변화에 대처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만 자신의 위치가 바닥을 전전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사실을 연관시켜 봤습니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시대가 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에 대한 결과물도 다른 것이 창출됩니다. 그럼 그것을 예전의 그릇에 담으면 이상하게 될 때도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에 맞는 새로운 그릇에 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은 변화된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전에 아무리 자기의 지식과 생각이 그 당대의 주류를 이루는 세력이 됐다고 해도 오늘 제가 말씀드린 한 사례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변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신앙은 과학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기 때문에 늘 그대로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로 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그 여정이 세상이라는 광야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잘 가기 위해서는 가는 내내 지금 내 좌표가 어디이고 또 목적지 좌표를 잘 알아야만이 목적지에 잘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적지 좌표만 본다고 해서 목적지를 잘 가는 게 아닙니다. 우주 비행을 비유하자면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좌표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궤도를 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과정이 신앙에 비유하면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성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찰 후 회개하는 게 바로 비행술에 비유하면 좌표수정이 될 것입니다. 틀에 박힌 대로 늘 하던 대로만 하는 신앙생활에 안주하는 신앙생활은 지양되어야 자신의 신앙이 발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은커녕 바닥을 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댓글 -
찬미예수님! 강만연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영육간에 항상 강건하시기를-----
시대가 격변함을 절감하면서도 따라갈 능력이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하기에 심부름 일(묵상글 전달 등)이라도 하면서 지내는 요즈음 기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평화와 선.
----------------------------------------------------
22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1사무15,16-23)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더 낫습니다." (22)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에 해당하는 '하헤페츠'(hahepets)는 '기쁨', '즐거움'을 의미하는 '헤페츠'(hepets)에 의문사 '하'(ha)가 붙은 형태로서 '기쁨이겠는가?'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무엘이 반문형식으로 표현한 것은 강한 어조의 부정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번제물'로 번역된 '뻬올로트'(beolloth; in burnt offerings)의 원형 '올라'(olla)는 '올라가다' 라는 뜻의 동사 '알라'(alla)에서 유래하여 '올라가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가죽을 제외한 제물 전체를 제단에서 불살라 드려 그 향기로운 냄새를 하느님께서 흠향하도록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레위1,3~17). 따라서 '올라'(olla)에는 '완전한 제사'(whole offering)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희생 제물'로 번역된 '제바힘'(zebahim)은 '희생'(sacrifices), '산 제물'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번제물' 이외의 '희생 제물'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에 해당하는 '키쉬모아으 뻬콜 예흐와' (kishmoah beqol yehwa; as much as in obeying the voice of the LORD)는 '주님의 목소리(음성)를 듣는 것만큼'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번제물들과 희생 제물들보다 당신의 음성을 듣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무엘은 이러한 답변을 통해 사울의 변명에 대한 논란을 뛰어넘어 사울의 뜻하는 바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사무엘은 번제물들과 희생 제물들을 기쁘게 받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제사를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마르코12,33참조).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더 낫습니다'
원문은 '힌네 셰모아흐 밋제바흐 토브 레하크쉬브 메헬레브 엘림' (hinne shemoah mizzebah tob lehaqshib mehelleb ellim; Behold, To obey is better than sacrifice, and to heed is better than he fat of rams)이다.
'좋다', '선하다', '낫다'라는 의미의 '토브'(tob; is better)는 원문의 위치상으로 볼 때, '밋제바흐'(mizzebah; than sacrifice)를 수식하는 형용사로 간주되어 '좋은 제물보다'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밋제바흐'가 '셰모아으'(shemoah; to obey)와 비교되기 위해 앞에 놓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말씀을 듣는 것이'(순종이)에 해당하는 '셰모아으'(shemoah; to obey)는 '듣다' 라는 의미를 지닌 '샤마'(shama)의 부정사 연계형이 명사적으로 사용되어 '순종하는 것',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에 해당하는 '레하크쉬브'(lehaqshib; and to heed)는 전치사 '레'(le)에 '귀를 기울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샤브'(qashab)의 사역형 부정사 연계형이 결합한 형태로 명사적으로 사용되어 '주의를 기울기는 것' 이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또한 '숫양의 굳기름'으로 번역된 '헬레브 엘림'(helleb ellim; the fat of rams)는 양의 내장, 신장 등에 있는 모든 기름을 의미하는데, 모든 굳기름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이었다(레위3,16.17; 7,23-25).
하지만 사무엘은 하느님 대전에 이 모든 제의적 규례를 행하는 것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열등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이러한 제사의 가치에 대한 사무엘의 평가는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제사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사실이 아주 자명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당시의 통념을 깨고 단지 동물을 드리는 행위 자체에 제사의 의미가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하느님께서 제사라는 제도를 이스라엘에 주신 것은 그들이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보기 위함' 이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제사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 제도의 근본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울의 껍데기뿐인 형식적인 제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 본문에 나타난 정신은 사무엘 이후 많은 예언자들에 의해 주님께 대한 합당한 예배의 기본 자세로 누차 강조되었으며 (시편50,8-15; 이사1,11-17; 예레6,20; 호세아6,6; 미카6,6-8),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사실이 다시 확증되고 강조되었으며(마태9,13),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도 예배의 근본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로마12,1-2).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르 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 제자들이 아직 혼인잔치의 손님으로 있습니다. 그 손님은 아직 단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겨야 손님이 아닌 그 신랑과 혼인하는 신부로 한 몸이 되는, 곧 예수님께서 신부의 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셔야 소님이라는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단식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단식은, 단식의 자격이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세례로, 초대받은 이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알리기 위한 물세례에 만족하는 신앙을 살고 있습니다.(요한1,31) 그것은 보이는 예수님의 육(땅)의 치유, 기적 등 땅의 복을 위한 신앙을 단식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사53,5) 5 그(예수)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 병자들이 받은 치유(기적) 또한 예수님의 징벌 곧 대속의 댓가 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신앙의 목적으로 보고, 먹는 그 단식을 하면 그리스도의 대속 그 죽음 그 사랑,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 새 천조각- 새 계약(대속) 헌 옷- 율법
(히브9,15-16)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율법)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16 유언이 있는 곳에서는 유언자의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 하느님의 말씀, 모든 약속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사와 윤리, 그 율법의 행위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 헌 옷을 입는 것이고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예수님을 진리로 깨닫는 것,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의 예수님과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의 예수님이 섞어 버리면 둘 다 못쓰게 되는 , 곧 구약의 제사와 율법, 계명을 신약이 대속으로 완성하는 그 진리로 구원을 받는 것인데~ 그 구원의 일, 하느님의 모든 말씀이 헛된 것이 되어 세상에 구원이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의 용서, 그 구원의 예수님이 아닌 육의 만족을 위한 기적의 예수님만을 따르고 좋아하게 되니, 사랑하게 되니 구원을 못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이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로마3,10~ 필리3,18)
십자가 이전, 육의 치유의 예수님을 기억하고 섬기는 것, 헌 옷입니다. 그 예수님을 십자가의 대속 구원자로 깨달아 의지하는 것,새 계약의 새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22ㄱ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 새 포도주- 피의 새 계약 헌 가죽- 육(몸)
(루가22,16-20)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 예수님께서 파스카의 제물로~ 땅(죄)의 존재들의 구원의 값을 당신 목숨으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죽어야할 강도가 그날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루가23,42) 그래서 그에게는 더 이상 파스카의 제물, 예물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히브10,18)
이제는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 그분께서 하신일이 참 사랑, 참 의로움의 진리시라고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구원하신 하느님의 목적이시고요~(이사43,7)
그 하느님의 목적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에페1,6) 그렇게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그 사랑으로 내가 용서 받았다. 라고 믿으면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고(1요한2,5) 그 하늘의 존재가 된 이에게는 더 이상 파스카제물, 그 예물이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다.
17 그리고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 너희도 파스카의 피로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음을 믿는 이는 구원의 표징인 포도 즙, 그 피로 마시지 않게 됩니다.
19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 행하여라(킵)- 밖으로 흘리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하여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흘려듣지 말고 마음에 담아 예수님의 몸을 파스카 제물이 아닌 다른 차원의 몸과 피로 먹고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 구원의 완성, 그 십자가를 믿는 이는 더 이상 제사 행위가 아닌 그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용서, 자유, 평화 그 구원의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그가 곧 새 계약을 지키는, 행하는 이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는 대속의 죽음, 그 사랑, 피의 새 계약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22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그 피의 새 계약으로 받는- 구원은 새로 태어난, 그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요한3,3.5)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보이는 모든 것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로마8,24) 육을 위한 종교행위 헌 옷, 헌 부대입니다. 그 육의 치유를 위한 예수님을 끊는, 그 단식을 하고~ 구원의 그 십자가 피로 받는, 보이지 않는 용서를 깨닫게 해 주실, 그리고 무죄를 증언해 주실~(로마8,2) 성령을 받게 된다면 새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땅의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58,6)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 치유(육)의 예수님을 자랑하면 다른 이에게 희망이 아닌 절망을 줍니다. 또 도덕과 윤리의 예수님을 말하면 법에 묶이는, 무거운 짐의 신앙을 주게 됩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대속으로 얻는 용서 그 진리의 예수님을 올바로 말하는 것, 전하는 것, 그래서 이웃이 용서, 자유 그 하늘의 새 생명을 받게 되는 것,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라 하십니다.
♡ 아멘♡ -*^ㅇ^*-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복음(마르2,18~22)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21~22)
'새 천 조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찾아온 새로운 복음의 질서를 상징하는 반면에, '헌 옷'은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인간적으로 해석하여 문자적인 준수에 얽매이는 구질서를 상징한다.
'새 천 조각'에 해당하는 '에피플레마 라쿠스 아그나푸'(epiblema rekous agnaphou; a piece of unshrunk cloth)는 세탁을 한 적이 없어 줄지 않은 옷감을 말한다.
그러니까 마르코 복음 2장 21절의 의미는, 이러한 '새 천 조각'이므로 '헌 옷'을 기우게 되면 그 기운 옷을 세탁할 때 아직 줄어들지 않았던 '새 천 조각'이 물을 흡수하여 급격히 줄어들면서 '헌 옷'을 망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 뜻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유대교의 전통은 함께 조화될 수 없으며,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망칠 수 밖에 없는 상충적 관계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구시대의 질서인 단식의 문제를 가지고, 하늘 나라의 신랑인 예수님을 맞이하여 기쁨의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2장 22절의 '새 포도주'의 '새'는 '네온'(neon; new)이지만, 후반절에 나오는 '새 부대'의 '새'는 '카이누스'(kainous; new)이다.
전자의 원형 '네오스'(neos)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이고, 후자의 원형 '카이노스'(kainos)는 본질적으로 새롭다는 뜻이다.
특히 '카이노스'(kainos)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더러운 영이 들린 자를 고치셨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라고 했을 때의 '새롭고'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형과 같다(마르1,27).
새 포도주는 아직 발효가 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발효가 시작되면서 그 부피가 늘어난다.
이 때 새 가죽 부대는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어서 변화에 따라 늘어나지만, 헌 가죽 부대는 그 변화를 견딜 수 없고 곧 터지고 만다.
말하자면,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낡아서 헌 가죽 부대 같은 바리사이인들의 전통이 수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헌 가죽 부대 같은 바리사이들의 슬픔의 단식은 합당하지 않으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기쁨의 혼인 잔치와 같은 축제가 합당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해 '혼인 잔치 집의 비유'(마르1,19~20), '새 천 조각의 비유'(마르1,21), '포도주와 부대 비유'(마르1,22)를 연이어 말씀하셨다.
과거의 전통적인 종교 관습을 기준으로, 단식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예수님을 비난하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질문에 국한하지 않으시고 모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이 갖고 있는 역동성을 이런 비유들로 밝히신 것이다.
|
첫댓글 알려 드립니다.
오늘 묵상글도 세분 신부님(이기우, 송영진, 기경호)의 글을 빈란으로 올렸습니다. 제가 공유하는 공간에 아직 올라오지가 아니하여서 입니다. 제가 확인하여 빈란을 채우겠지만 바로바로 그리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회원님들께서 빈란의 묵상글을 입수(? 공유?) 하시면 5. 소금(나눔) 뜨락 1. 묵상글 등 나누기에 올려 주시든가 이 곳 댓글에 출처를 적어 주시면 제가 이 곳 빈란에 보충을 하겠습니다.
다른 사항 추가로 말씀드리면 이 카페 운영에 도움을 주실 뿐이나 달라졌으면 하는 의견, 개선되였으면 하는 의견을 가지신 분은
저에게 문자, 카톡으로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화와 선.
김춘기 루도비꼬(010-5365-5858) 드림.
세분 묵상글 게재하였습니다. (2022. 1.17. 14:50)
이기우, 송영진 두분 신부님의 글은 8시40분경 올라와 있었고, 기경호 신부님의 글은 10시18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