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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70)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2014년 8월 18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명동대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마지막으로 로마로 귀국하는 사목방문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사가 끝나기 전 교황님 제의실로 가는 데 경찰 통제선 안쪽에서 한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이 나에게 손짓했다. 가서 들어보니 어머니가 교황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꼭두새벽부터 기다렸는데 입장하실 때 교황님이 다른 쪽을 향해서 인사를 하셔서 안수를 못 받았다고 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간절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의실로 가서 기다렸다. 미사가 끝나고 교황님께서 복사단과 함께 들어오셨다. 한여름의 빡빡한 한국 사목방문 4박5일의 일정을 다 마친 교황님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교황님께 다가갔다.
그러자 교황님은 걸음을 멈추고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따듯한 미소를 띠시며 아이와 악수했다. 내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교황님은 아이를 안으시고 볼에 입맞춤하셨다. 아이가 준 편지도 받아서 직접 제의 안으로 챙기셨다. 그때 보았던 교황님의 따듯한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입맞춤은 예로부터 평화와 우호의 상징으로 계약의 조인에도 사용되었다. 발이나 손에 하는 입맞춤은 겸손과 자발적 복종, 존경의 표시이다. 지금도 외국 성지순례 때 보면 성인상의 발등에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해 악인들에게 넘겨줄 때 입맞춤 장면이 언급된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7-48)
입맞춤은 본래 애정과 헌신의 표시였지만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의해 악용돼 배반의 표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해 돈을 받고 팔아버려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로 생을 끝마쳤다. 예전에는 유다가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13명의 사도단은 실제로 없었다. 지금도 서양권에서 성행하는 숫자 13을 기피하는 문화는 유다가 그 시작이었다.
유다는 사도단의 살림을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다. 단체에서 돈주머니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죄인들의 손에 팔아넘긴 이유는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스승이 유다인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킬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를 실망하게 했을까?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가끔 일하다 보면 진짜 걸림돌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이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진격하는데 방해를 놓는 것은 독일군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편이 발목을 잡는다.”
[성경 입문] (14) 희년 ①
2025년은 2000년 대희년 이후 사반세기가 흐르고 맞이하는 희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5년 정기 희년을 준비하면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Spes Non Confundit)」(주님승천대축일, 2024.5.9.)라는 칙서를 발표하셨습니다. 희년 칙서의 제목은 로마서 5장 5절의 말씀입니다.
희년제도는 레위 25장으로부터 유래합니다. 레위기는 한마디로 거룩함의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명으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동족들을 찾아가 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빠져나옵니다. 모세가 향한 곳은 자신이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던 그곳, 거룩한 산입니다. 탈출기 19장은 광야여정을 거쳐 마침내 하느님의 산, 호렙(시나이)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서술합니다. 이곳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3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 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5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6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탈출 19,3–6; 신명 7,6 참조)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며 이스라엘과 함께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비전입니다. 이 계획의 중요한 핵심은 ‘하느님의 소유인 백성, 사제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라고’ 부름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완성은 ‘거룩함’이라는 하느님의 속성을 향해 있습니다. 레위기는 반복해서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레위 11,44.45; 19,2; 20,6).
43 너희는 기어 다니는 어떤 것으로도 너희 자신을 혐오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로 너희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어, 너희가 부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44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땅에서 우글거리며 기어 다니는 것으로 너희 자신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45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주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3–45)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너희는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해야 한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19,1–3)
26 나 주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려내어 내 것이 되게 하였다.(레위 20,26)
레위기를 거룩함의 책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처럼 레위기 곳곳에서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세세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란 말의 근본 의미는 ‘다름’입니다. 곧, 무언가 같지 않음, 범상치 않음, 그래서 분리되고 따로 떼어 놓은 것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분이 피조물과 다른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그 분 말고는 모든 존재가 그분을 통해, 그분에 의해 존재하는, 존재의 근원이신 분으로서 하느님은 엄격히 다른 모든 존재과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다른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훼손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인가? 삶의 모든 방식이 달라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름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계약법, 정결법, 성결법과 같은 법입니다. 그 맥락에서 레위기는 사물과 공간의 거룩함, 관계의 거룩함, 그리고 시간의 거룩함을 위한 규정들을 제시합니다. 희년법은 이러한 시간과 절기의 거룩함에 대한 규정을 제시하는 단락(23,1-26,46)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2025년 5월 4일(다해) 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성경 입문] (14) 희년 ②
레위기 23장에서는 ‘거룩한 날’들[日], 그리고 25장에서는 거룩한 해들[年]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거룩한 시간들의 기본 사상은 안식일로부터 시작합니다. 곧, 한 주간이라는 시간 단위는 창조의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을 다른 날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날로 삼으신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설정됩니다. 첫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동참하는 날이지만, 일곱째 날은 그 창조를 관조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쉬며 ‘참 아름다운, 참 좋은 세상’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일곱째 날의 세상은 한 주간 동안의 노동의 결실을 바라보며 나를 통해 변화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시간과 공간의 원 주인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뒤돌아 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정기적인 안식일 외에도 일 년 중 몇몇 특별한 축일에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상기하며 경축하는 축제일을 지내게 됩니다: 파스카와 무교절(레위 23,4-8),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레위 23,9-14), 주간절(오순절; 레위 23,15-22), 칠월 첫날(로쉬 하 샤나; 레위 23,23-25), 속죄일(레위 23,26-32), 초막절(33-36).
25장에서는 날 수로 계산하는 안식일 규정을 년 단위로 확대하여 일곱 번째 해에는 휴경하며 땅에게도 안식을 부여하는 규정을 싣고 있습니다.
더불어 일곱 번째 안식년이 지난 다음 해가 시작되는 해의 속죄일에 나팔을 울리며 오십 번째 해의 시작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희년을 의미하는 요벨(לבוי, yôbel)은 숫양, 혹은 나팔을 만드는 데 사용한 숫양의 뿔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요벨이라는 히브리어에서 라틴어 유빌레움Jubilaeum이 유래했고, 현대 이탈리아어의 Giubileo 혹은 영어의 Jubilee라는 단어가 생겨난 듯합니다.
이 오십 번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포하고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희년을 선포합니다. 이 희년은 ‘해방을 선포하는 해’입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주민은 해방되어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자기 씨족에게 돌아갑니다(레위 25,10). 피치 못할 사정으로 땅과 주택을 팔고, 또 제 자신의 노동력을 남에게 팔아 품팔이꾼이나 거류민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희년이 되면 자유를 얻게 됩니다(레위 25,40-41).
희년은 하느님께서 주셨던 선물이 다시금 제 주인을 찾아가는 날로서 하느님의 해방과 구원의 결실을 다시금 원위치하라는 규정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희년 규정이 실제로 행사되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그 핵심 의미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며 선물입니다(땅은 본래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토지거래에서 매매의 대상은 땅의 소유권이 아닌 사용 권리일 뿐입니다. 토지의 거래 가격은 그 토지를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비례하므로 희년에 가까울수록 토지의 가격은 하락합니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서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파는 것이다. 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25,13-17)
보니파시오 8세 교황께서 1300년을 희년 혹은 성년으로 선포한 이래, 교회는 매 100년 주기로 희년을 지내다, 1470년부터는 25년 주기로 정기 희년을 지내왔다고 합니다. 가장 근래에 지낸 정기 희년은 2000년 대희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올해는 제 삼천년기의 두 번째 정기 희년인 셈입니다.
[성경에서 희년을 보다] 예리코에서 맞이한 해방의 해
오랜 광야 생활을 접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맨 처음 정복한 성읍은 바로 예리코입니다(여호 6장). 예리코는 야자나무 성읍(신명 34.3)이라 할 정도로 물과 먹을거리가 풍부해 광야를 다닌 이들에게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리코에는 과객을 상대한 주막과 창녀가 많았고, 여호수아가 예리코 정복 전에 파견한 정탐꾼을 도와준 이도 창녀 라합입니다(여호 2장). 가나안 여인인 라합이 동족이 아닌 이스라엘을 도운 건, 비참한 창녀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한 노예 집단을 구해내 탈출시켰다는 소문을 듣고(여호 2,9-11) 자신도 해방을 꿈 꾼 것은 아닐까요?
창녀 라합의 도움으로 예리코가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될 때, 그 스토리도 해방의 해인 ‘희년’ 모티프로 서술되어 흥미롭습니다. 여호수아기 6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정복 전 계약 궤와 뿔 나팔을 앞세워 예리코 성을 하루에 한 번씩 돌고, 이레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돕니다. 그린 다음 뿔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자 예리코 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나, 그곳을 주님께 완전 봉헌물로 바치게 됩니다. 이때 분 뿔 나팔은 하느님 예배 때 자주 쓰인 악기로, 주님의 현존을 신호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기 6장의 뿔 나팔[쇼파르]는 ‘숫양’을 뜻하는 히브리어 [요벨]이 함께 쓰인 형태입니다(4.6.8.13절). 요벨은 레위기 25장 9절에서 ‘희년’의 뜻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요벨]이 이렇게 뿔 나팔과 함께 쓰인 예는 탈출기 19장 13절의 “숫양 뿔 나팔”에도 존재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상징성을 전달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직후 시나이산 아래 섰을 때 주님의 현현을 신호하며 ‘요벨’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백성이 주님의 약속대로 가나안을 차지하는 첫 과정에서도 ‘요벨’ 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기의 요벨 소리는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드디어 실현되었음을 신호하는 셈입니다.
또한, 희년이 일곱째 해인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뒤 맞이하는 해이듯이(레위 25,8) 예리고 정복에도 같은 상징수가 반복됩니다. 사제들이 분 뿔 나팔의 수가 일곱이고, 백성이 다 같이 예리코 성을 돈 날수도 이레입니다. 이렛날에는 일곱 번 돕니다. 이런 특징은, 가나안의 첫 성읍인 예리코에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한 희년, 곧 ‘해방의 해’를 준비하셨음을 알려줍니다.
여호수아기 6장에서 말하려는 바는 이스라엘 집안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게 되는 첫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예리코에 울려 퍼진 뿔 나팔 소리는 희년의 요벨 소리처럼 이스라엘과 창녀 라합의 해방을 완전히 확정 짓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갈릴래아 사람
이스라엘의 북쪽으로 올라가면 갈릴래아 지방이 나옵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비옥한 곳은 ‘이즈르엘’ 평야인데, 그야말로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느끼게 해주는 곳입니다. 이즈르엘은 ‘하느님께서 씨를 뿌리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직접 파종하신 듯 곡식이 많이 나는 곡창 지대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갈릴래아 지방에는 예수님의 유년기 고향인 나자렛도 있습니다.
다만 갈릴래아 지방이 워낙 비옥하여 예부터 이곳을 노리는 이방 세력이 많았습니다. 판관 가운데 유일한 여자였던 드보라는 가나안 장군 시스라의 침입에 맞서 갈릴래아 지방 타보르산 전투에서 승리합니다(판관 4-5장). 그다음 판관인 기드온도 갈릴래아 지방까지 올라온 유목민 미디안을 꺾습니다(6-9장). 이스라엘에 왕정이 들어선 뒤에도, 첫 임금 사울은 갈릴래아 지방 바로 아래쪽에 자리한 길보아산에서 필리스티아와 마지막 전투를 하다 전사합니다(1사무 31장). 오죽하면 성경에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 이사 8,23)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은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올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요한 7,52).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나타나엘도 그분에 관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반문합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초라한 마구간이었듯이, 유년기를 보내신 갈릴래아도 천시 받는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점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2000년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수학 공식처럼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묵상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연찮게 접하게 된 주보에서 마더 데레사에 관한 글을 읽은 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 의미를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콜카타에 방치된 빈민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던 마더 데레사. 그들을 어떻게든 구해보려 했지만 너무 망가진 탓에 그들에겐 어떠한 의욕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더 데레사는 누군가의 기부금에 의지하거나 후원회를 모으려 한 대신, 그들 곁으로 다가가 직접 돕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거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죽는 빈민들이 그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날 때, 하느님의 자녀로 죽게 해 주심에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예수님 공생애의 의미를 뿌리까지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곧 상대의 처지로 직접 내려가 함께 아파하는 진정한 사랑 말입니다.
우리 인간을 하느님 나라에 걸맞도록 끌어올려 구제하기에는 희망도 의욕도 보이지 않으니, 하느님께서 몸소 가장 누추한 마구간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밑바닥 사람들부터 끌어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시 받던 갈릴래아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시며 모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심으로써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 다시 보기] 불제자였던 예수?
올해가 불기 2569년입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지가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단기는 4358년. 우리 민족의 기원인 단군의 탄생이 또한 그렇게 된답니다. 그리고 서기로는 2025년. 그리스도교의 기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아니, 전 세계는 불기나 단기보다는 서기를 젤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예수님보다 500여 년을 앞서 태어났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간상으로 부처님이 예수님보다 앞서시니, 예수님은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요한 1,15).
그런데 왜 “불제자였던 예수”라는 책이 시중에 나돌게 되었을까요? 엘리사벳 클레어가 쓰고 김용환이가 번역한 이 책을(나무출판사) 혹시 아시거나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가 읽어본 그 책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어느 탐험가가 “예수는 불제자”였다는 아주 오래된 고문서가 티베트의 어느 사원의 문서고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사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기행문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그 문서를 발견하고 그 문서의 진의를 가리고 학문적인 가치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기대하고 열심히 정독하였지만, 끝내 그 문서를 찾아보았다는 이야기는 없고, 그 사원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로 담아내는 글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불제자였다는 억척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신약성경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 2장과 3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도 그 부모님을 따라 파스카 축제에 참여하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루카 2,42).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그때 그분의 나이가 서른 살쯤 되셨다고 했습니다(루카 3,21-23). 그럼 13살부터 29세가 되시기까지 그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약성경에는 그에 대해 짐작할 만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의문이 계속되다 보니, 그 의문들 그 가운데 하나의 가능성이, 그분은 그동안 티베트에 있는 어느 사원에서 불경을 공부했다는 설이 전설처럼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이거나 학문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풍문으로만 전해져 왔던, 여러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가다듬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얼마나 진실하게 받아들여 믿어야 할지 또는 말지를. 왜냐하면 “예수님은 불제자였다”는 그 고문서를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그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으로는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추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경험상으로 우리는 무엇을 참으로 좋아하든지 또는 그런 환경이나 생활에 젖어 살다 보면, 생활에서 그런 지식이나 지혜 그리고 언행이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언어생활 가운데 외래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에 하나 티베트나 어느 사원에서 불경을 공부했던 불제자였더라면, 그분의 활동에서나 가르침에서 불경을 인용한 말씀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신약성경의 예수님 가르침이나 말씀 가운데서는 불경이 아니라 언제나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계신 것을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시조에 이런 시조가 있습니다: 대천 한 바다에 여남은 사공 놈이 긴 장대로 바늘귀 낀다고 소리를 친다. 아소님아! 뭇놈이 뭇 말을 하여도, 님이 알아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