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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안에서의 교회문화] 포도주
와인으로 대표되는 포도주는 가톨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술입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는 노아가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해 포도주를 빚어 마시고 취했다(창세 9,20-21 참조)는 일화를 기록하고 있고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장 참조)에서 하신 첫 기적의 대상이자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위에서 건네지는 피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중세 때부터 포도주 생산을 주도한 것은 수도원이었습니다. 기도와 노동으로 봉헌의 삶을 살던 수사들은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하는 일이 주된 일과였습니다. 토양과 기후에 맞는 품종을 개량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의 포도 재배와 포도주 양조 기술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럽의 유명한 와인 브랜드들의 뿌리는 수도원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두각을 나타낸 베네딕도회와 시토회는 지금도 유럽을 비롯한 미국, 칠레 등에서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포도주를 만든 사람도 한국천주교회 순교자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복자 윤유일 바오로입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성직자를 모셔 오는데 힘쓴 순교자입니다. 1789년 10월 중국을 오가는 상인으로 위장한 윤유일은 북경에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조선에 사제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에 대한 파견 약속과 함께 필요한 준비로 미사에 필요한 도구들을 비롯해 포도나무 묘목과 포도 재배법, 포도주 제조법을 배워왔습니다. 그 후 중국에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들어와 1795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나라에서 첫 미사가 봉헌되었는데 이때 윤유일이 재배해 담근 포도주가 미사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00년에 경기도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지역 주민들의 가난을 해결하고 미사 때 사용할 포도주를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포도 묘목을 들여와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미사주로 사용하는 전용 포도주는 롯데주류에서 생산하는 ‘마주앙’으로 교회법(924조 3항)에 따라 다른 첨가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100% 순수 포도만으로 빚어집니다. 교황청의 인증을 받아 미사주용으로만 별도 생산되는 것이기에 일반 소매점에서는 구매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포도주는 단순한 술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상징합니다. 포도주잔을 들 때마다 이를 상기하면서 주(酒)님(?)을 모시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 희망의 근거 – 하느님 사랑
루카복음 16장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있습니다.(16,19-31) 평소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와 그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는’ 거지 라자로가 등장합니다. 각자 지상 삶을 마친 후 두 사람의 상황은 반대로 바뀝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 머물고, 부자는 저승 불 속에서 고초를 겪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자 하실까요?
먼저 부자는 죽은 다음 왜 비참하게 됐을까요? 사는 동안 거지 라자로를 돕지 않아서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에 거지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모두 죽은 다음 저 부자처럼 저승의 불 속에서 고초를 겪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은 부자들을 미워하실까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지만, 이는 모든 부자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들, 오직 자신만 아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평소 제자들과 복음을 선포하며 다니셨고, 그 많은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자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당시 부자들의 도움도 여러 번 받으셨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복음 말씀에는 그 부자가 어떤 악행을 저지르거나 죄지었다는 증언도 없습니다. 아마도 부자가 죽은 후 벌 받은 이유는 사는 동안 하느님을 찾지 않고, 하느님 없어도 살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 추정됩니다. 딱히 큰 죄 짓지 않아도 하느님 없이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은 나중에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라자로는 왜 구원을 받았는가.’입니다. 복음에는 라자로가 구원받기 합당한 행동을 한 정황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희망과 약속을 상징합니다. 사는 동안 어려운 일이 참 많고, 때로는 삶이 버겁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데 왜 죄 없는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사람이 편하게 살까요? 왜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삶이 이리 고단할까요? 확실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 처지를 잘 아시고,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을 나중에 다 갚아 주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던 것처럼, 라자로같이 하느님 믿고 따르는 사람, 고통 중에 사는 사람도 결국 그 품에 안길 것입니다.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불신이 만연해도 우리는 주님만을 믿고서 살렵니다.” 가톨릭성가 28장의 가사처럼 사는 동안 하느님 믿고, 그 말씀 따라 사는 사람은 결국 복 받을 것이고, 하느님 없이 사는 사람은 결국 벌 받을 것입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 가톨릭교회는 이 ‘믿을 교리’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 1,1-2)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22) 성모님이 나타나셨어요 - 프랑스 루르드
루르드 성모, 죄인들 회개 위한 기도 당부
1789년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혁명 주동자들은 프랑스 국교였던 가톨릭교회를 완전히 파괴하려 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상징이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훼손됐으며,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추방되고 살해됐습니다. 이토록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던 프랑스에 성모 마리아는 자주 발현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프랑스 교회를 걱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나타나실 때마다 눈부시게 빛나셨지만,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
1858년 2월 11일,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기슭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루르드 근처 마사비엘 동굴에 성모님이 나타나셨습니다. 1854년 12월 8일 복자 비오 9세 교황이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한 지 3년 2개월 되던 때의 일입니다.
가난한 물방아 집에 태어난 성녀 베르나데트(벨라뎃다)는 13살이 됐을 때, 마사비엘 근처에서 땔감을 줍다가 동굴 가운데 나타난 거룩하고 아름다운 젊은 부인을 보았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였습니다.
흰옷을 입고 허리에 푸른 띠를 두른 성모님은 손에 흰 구슬과 금줄로 된 묵주를 쥐고 계셨습니다. 아울러 맨발로 장미꽃 두 송이를 밟고 서 계셨습니다. 놀란 베르나데트 성녀는 곧장 묵주 기도를 바쳤습니다. 묵주 기도가 끝나자 젊은 부인은 사라졌습니다. 베르나데트는 집에 돌아와 마사비엘 동굴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였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부인(성모님)은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번에 걸쳐 베르나데트 앞에 발현하셨습니다. 2월 25일 9번째 발현 때,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샘물을 마시고 얼굴을 씻으라”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셨습니다. 그쪽을 바라본 베르나데트는 의아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물이 나올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가리킨 곳을 파보니 물이 솟아올랐습니다. 이 물은 지금까지도 병자들을 영적으로 치유하고 있습니다.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16번째로 나타나신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밝히셨습니다. 이로써 성녀는 부인이 성모 마리아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됐습니다.
성모님은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베르나데트에게 “앞으로 많은 고초를 겪을 것”이라며, 그 보상으로 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베르나데트는 그 말씀대로 성모 발현 목격 후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거나, 성모님을 이용해 큰돈을 벌고 있다는 의심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성녀는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수군대는 많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르나데트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2살이 되던 날인 1866년 7월 8일 그는 느베르 애덕 수녀회에 입회해 평생 자신을 감추며 침묵과 기도·희생·봉사 속에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성모 발현 목격자로서 성녀 베르나데트는 특별한 은혜와 주님의 각별한 사랑에 감사하며 순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862년 성모 발현을 공식 확인하고, 1891년 첫 발현일인 2월 11일을 기념일인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로 정했습니다. 이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요청하기 위해 1992년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정하고, 병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29)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죽음, 하느님의 어린양
임종 세례, 곧 죽을 위험 중에 있는 어른이 세례를 받기 위한 조건 중에는 임종자가 의식이 있는 경우 적어도 기본 교리(즉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를 설명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 제55조 1항 2.). 이미 설명한 ‘강생’ 과 함께 기본교리 중 하나로 묶여 있는 ‘구속(救贖, Redemtio)’ 에 대해 알아봅시다.
성자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이며 성부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할 속죄 제물로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되었습니다. 구속(救贖), 라틴어로 Redemtio는 구원, 속량, 대속과 같은 말로도 번역할 수 있으며 본래는 몸값을 받고 죄인을 풀어주어 자유인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속죄 제물로 바치던 어린양과 같이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름으로써 우리 모두의 죄를 없애 주시고(가톨릭 교회 교리서 608항)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도 부릅니다.
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공생활에는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율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은 그들에게는 하느님을 모독하고 거짓 예언을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74-575항 참조).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의 용서를 행하신 예수께서는 이를 통해 당신께서 구원자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으나 유다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신성모독자로 판단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90, 594항 참조).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게 된 것은 이런 대립의 결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불행한 상황들 때문에 우연히 생겨난 일이 아니며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써 놓으신 각본을 수동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획에는 각 사람의 자유로운 응답까지도 포함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배신자 유다나 최고의회, 빌라도, 그리고 십자가형을 외친 군중들과 같은 사람들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을 허락하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00항 참조).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당신 아드님을 죄 때문에 타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주시고, 죄 없는 분을 죄인으로 만드시어 우리 모든 죄인과 연대하게 하시고 그 모든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놀라운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02항 참조). 강생하시는 첫 순간부터 이 사랑의 계획에 순명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구속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셨고 결국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이 사랑의 뜻을 이루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06~607항 참조).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 제물로 내놓는 희생 제사를 완성하셨고,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시는 그분의 신성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안에 품음으로써 그분의 희생 제사를 모든 사람을 위한 제사가 되게 하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15~616항 참조).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전교 주일
오늘은 전교 주일로서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전교 주일은 선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선교 지역의 교회를 영적 ‧ 물적으로 돕고자 제정된 날입니다. 이날 전 세계 가톨릭교회는 선교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근본 사명임을 깨닫고 복음화에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전교 주일의 역사는 폴린 마리 자리코(Pauline Marie Jaricot)가 프랑스 리옹에서 만든 ‘전교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하느님을 전하고자 먼 나라로 떠난 선교사들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돕기 위해 매주 하느님께 기도하고 헌금하는 모임을 만들어 1822년 5월 ‘전교회’라는 정식 단체를 발족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1844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1831년~1846년 재위)에 의해 정식으로 인준되었고, 설립 100주년이 되던 1922년 5월 포교성성(오늘날 복음화부) 산하의 ‘교황청 전교기구’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비오 11세 교황(1922년~1939년 재위)은 이 단체의 건의를 받아들여 1926년 전교 주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전교 주일은 매해 10월 마지막 주일의 앞 주일에 지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제98차 전교 주일 담화에서 ‘혼인 잔치의 비유’(마태 22,1-14)를 성찰하면서 선교에 관한 몇 가지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① ‘가다.’와 ‘초대하다.’라는 두 단어가 함의하는 선교의 본질을 되새기며 “끈기 있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이어가야 한다.
② 비유에 나오는 잔치는 “종말론적 잔치”로서 매 미사의 성찬례에서 거행되며, 성찬례는 선교의 원동력이 된다.
③ 선교는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며, 이 사명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헌신이 요구된다.
한편, 한국천주교회는 1970년 주교회의 임시 총회에서 전교 주일이 있는 10월을 묵주기도 성월과 함께 ‘전교의 달’로도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995년에 발표한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에서는 이렇게 규정하였습니다: “모든 사목자는 세계 선교에 대한 의식을 증대시키고 영적, 물적 지원을 강화시키기 위한 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여야 하며, 모든 신자는 특히 전교의 달과 전교 주일을 뜻있게 지내도록 힘써야 한다”(208조).
오늘 전교 주일을 맞아, 특별히 해외에서 복음 선포에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또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주님께 의탁하며 우리 역시 일상에서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꾼이 되도록 합시다.
[가톨릭 신학]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신명 6,18 참조)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판관 3,12)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기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야 할 법과 규정들을 설명하는데,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신명기입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받아, 돌 판에 새겨 전해주었다고 하는 십계명도 이 책에 담겨있지요.(신명 5,10 참조)
신명기가 말하는 주제를 요약하면,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면 그분께서 약속하시는 것들을 받게 되지만,(신명 4,1 참조) 반대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잊고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면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신명 8,19 참조) 즉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 충실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신명기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명기 신학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구약성경의 많은 책들이 신명기 신학을 토대로 저술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신학을 잘 표현해 주는 성경 구절을 두 개만 언급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고 좋은 일을 해야 한다.”(신명 6,18)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판관 3,12) 이 구절들에서 ‘주님의 눈에’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들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전해져 내려온 전통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계명을 주신 하느님의 존재, 나아가 그분의 시선을 느끼면서 그분의 눈에 드는 좋은 일을 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느끼면서 살아갔던 성경 저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다른 이들이 시선을 의식하십니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그것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이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도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조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의 시선을 그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그 시선을 의식하며 주님의 눈에 올바른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주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염려하면서도 정작 중요하게 의식해야 할 하느님의 시선은 너무 쉽게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요. 나에 대한 주위의 평가가 나를 진리로,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으로 나아감에 있어 신경 써야 할 시선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시선 하나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그분의 눈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