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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태 목사
교회 창립 만 48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서강교회는 1954년 당시 신학교 예과 2학년 재학 중이던 온태원 전도사께서 현재 상수APT 자리에서 초등학생 24명을 모아놓고 성경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시작된 교회로서, 그 후에 신학교에 다니던 친구 지호영 전도사가 뜻을 같이하여 교회와 성경구락부를 함께 하게 되었으며 1957년 신학교 졸업반 때에 온태원 전도사로부터 김병원 전도사에게 교회가 인계되었습니다. 굶기를 요즘 밥먹기 만큼이나 흔하게 굶던 시절 4년간을 교회를 위해 애쓰던 온태원 전도사로부터 교회를 담임했던 김병원 전도사는 가정이 있으신 분으로서 도저히 교회를 더 이상 지탱할 길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몇 개월도 감당치 못하시고 교회를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그후 용산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故 이병섭목사를 개척목사로 후원 파송함으로 서강교회가 기사회생하게 되었는데 그 때가 1957년 6월달 이었습니다. 이후에 교회 기틀은 마련하게 되었지만 그간에 어려움은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서강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섬기며 멋지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된 것도 여기에 교회가 있었고, 눈물어린 목회자와 성도들의 각별한 애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특히 故 이병섭 목사는 교회 건축을 손수 교인들과 함께 벽돌을 손수 쌓으면서 교회를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지어진 교회가 드디어 1968년 11월 24일 헌당식과 함께 김성장로의 임직과 박원장로의 취임으로 정식 당회를 갖춘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997년 4월 17일 서강교회는 1대 위임목사이신 故 이병섭목사를 원로 목사로 추대함과 동시에 교회에서 부목사로 2년간 검증받으신 故 김용문목사께서 2대 위임목사로 취임하는 축복의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978년 10월 13일 이병섭 목사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을 떠나셨으며 모든 성도들의 조문 속에 교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예배를 통하여 한평생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신 목사님을 가슴에 신앙적 표상으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2대 위임목사로 서강교회를 목회하신 故 김용문목사께서는 그 뒤에 교회의 성장과 성숙의 기틀을 마련 하셨으며 말씀에 갈급했던 성도들에게 깊은 영적 말씀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축복하셨고, 오늘 우리가 예배 드리는 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정하심과 시작의 초석을 놓으시고 평생 교회를 3개를 지으시려는 마음에 결단과 기도의 서원은 다 이루지 못하시고 그만 1996년 7월 11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 땅에서의 수고를 다 마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훌륭한 선배 목사님들과 그리고 장로님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성장시키셨으며 많은 교인들이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떠나갔지만 그들이 어디에서든지 우리 서강교회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들이 신앙의 모판이 되었던 모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갖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전해들을 때마다 하나님께 더욱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돌립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믿습니다.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 속에 사라져간 수많은 사건들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고 계시며 마지막 날에 그 책이 펼쳐지는 때 우리들의 잘한 것과 잘못한 것들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영어에서 말하는 "역사"라는 말 history는 지난날에 발생한 사건 중에서 조사연구 되고 정리된 자료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지난 48년 동안에 역사 속에 발생한 일은 실로 엄청난 분량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은 몇 페이지 안되는 분량으로 정리된 history만을 우리는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 실상 정리된 적은 분량의 정사(正史)보다는 기록되지 않는 더 많은 분량의 야사(野史)를 찾아내는 일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그 잃어버린 기억들이 무엇 때문에 중요하겠습니까? 역사는 단순히 의미 없이 흘러가 버린 지난날의 기억일 뿐만 아니라 그 지난날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죽어 묻혀 버린 역사가 아니라 현재 살아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로체"는 말하길 "모든 참 역사는 현대사"라고 하였습니다.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강력한 현재적 의미를 부여할 때 이를 역사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식에 투철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주후 33년에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로마의 사형법에 의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께서 처형된 한 역사적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역사적 사건은 적어도 지금부터 1970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사건의 현재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역사적 사건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볼 때에는 지금부터 까마득한 옛날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사건이 오늘의 나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느낄 때에는 역사의식이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나 자신이 1970년 저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가게 하여 그 십자가 그늘에 서게 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식인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감격이 옵니다. 눈물이 납니다.
찬송가 136장은 바로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찬송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바로 이 찬송이 역사적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숱한 세월이 흘렀으나 지금도 내가 그 역사적 사건을 생각하기만 하면 견딜 수 없는 죄의식과 뜨거운 감사를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단지 십자가 사건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현재 나 자신과 연결 지어 읽을 수 있는 식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역사의식에 투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든 역사적 사건을 구속사로 읽어야 합니다. 이 말은 지난날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인간의 구원과 우리들의 신앙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섭리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실패한 이간의 역사도 하나님의 숨결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물론 실패한 인간의 역사를 다 하나님의 계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전혀 신앙과 관계없는 개인적 실패의 역사들이 이 땅에 허다하게 많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이란? 역사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여 우리들의 구원사에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즉 오늘 나의 나됨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모습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은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미래 속에 숨겨져 있음을 믿고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함께 할 때 그 믿음이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국사인 동시에 전인류의 구원사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그 속에서 우리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찾고 잇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사를 이스라엘의 역사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룩한 구원사라고 한다면 우리 한국 역사 또한 거룩한 구속사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의 모든 48주년의 역사도 구원사로 보아야합니다. 6.25 사변이 민족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이 징계로, 4.19 학생의거를 교회가 교만하여짐에 대한 하나님이 채찍으로, 5.18 광주항쟁 역시 교회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읽을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20세기의 최대 비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에 의해서 60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의 대학살 사건일 것입니다. 이러한 비극적 학살 사건의 범인이 과연 히틀러였느냐? 아닙니다. 그 주범은 바로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철학이었던 것입니다. 이 철학에 근거하여 "독일인이 세계사의 주인공"이라는 헤겔의 역사철학이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유발하여 마침내 그 엄청난 학살극을 연출하였던 것입니다.
중세기 천년을 가리켜 우리는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이 때가 교회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때 임에도 불구하고 암흑시대를 생산한 장본인은 바로 "어거스틴"의 역사철학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역작 「신의도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면 세상 나라는 몰락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요, 세상 나라는 로마제국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왕성하면 로마제국은 자연히 몰락한다"는 역사철학을 주장하였고, 결국 이 철학에 따라 교황청은 비대해지고 황제는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으나 이 역사철학은 국가주의를 태동케 하였고 중세기는 몰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역사철학을 갖게 되면 개인은 물론이지만 교회까지도 타락케 하며 어지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집이요, 잘못된 판단에서 나오는 발상인 것입니다.
사6장에 보면 성군 웃시야가 죽던 해에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서 지금까지는 왕의 눈치만 보았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의지했던 이사야였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이 죽으면서 의지할 힘이 없어졌습니다.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웃시야의 아들 요담왕 다음에 유다 왕국의 12대 왕인 아하스 때에 아람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의 18대 배가 왕이 연합하여 남유다 아하스를 치러 올라 왔습니다. 이때 이사야가 아하스를 찾아가 눈물어린 충고를 합니다. 그들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처하여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을 퇴치를 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쳐야만 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결국 아하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징계로 앗수르를 사용하셨는데 앗수르가 교만해졌습니다.
사10:12절에 보면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말씀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앗수르의 교만을 참지 못해서 그의 유명한 역사철학을 토하기에 이릅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함과 일반이로다"(15절)고 외칩니다.
단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앗수르가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의 눈에는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부지깽이요, 도끼자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분명 이사야의 역사철학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경에서 이사야의 역사철학은 남은 자(Remnant)의 사상에서 구체화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는 사상은 메시야 시대를 예고하는 밝은 전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11:1절에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싹(남은 자)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한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메시야 사상이 이사야의 역사철학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대한 역사철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지난 세월동안 우리 교회가 가는 발걸음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한 일도 있었고, 잘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한 일에는 아낌없이 상을 베풀어 주셨고, 우리가 잘못한 일은 모두 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때로는 순풍에 돛을 높이 올린 배처럼 순조로운 성장을 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광풍을 만나 휘청거리는 배처럼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분명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하심을 받는 곳입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연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 우리 교회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저희 교회 당회와 모든 교우들이 합심하여 새로운 21세기를 열어갈 비젼으로 교회 부지 확장과 교육관을 위한 헌금에 동참하여 열심히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50주년 되는 희년 사업으로 저희 교회가 박차를 가하며 총 매진 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올해 교회 표어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처럼 더욱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사명들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한 해가 되어야할 것이며,
앞으로 계속해서 골1: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들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역사철학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서 채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계속 전파해야합니다. 주님께서 병든 자들과 소외당하고 천대받는 자들을 돌보아 주셨던 것처럼 오늘도 교회는 그러한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해 나가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고난을 겪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데 많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맡겨주신 고난이며 또한 오늘 성도들이 감당해야 될 고난입니다.
옛날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역마차에 일등석과 이등석과 삼등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좌석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리는 똑같습니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마차가 고장이 났을 때 일등석 손님은 그냥 자리에 앉아 있어도 되며, 이등석 손님은 마차에서 내려서 다 고칠 때까지 밖에서 구경을 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삼등석에 탄 사람은 마부와 함께 마차를 고쳐야 합니다.
때문에 마부 입장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연히 삼등석에 탄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교회 안에도 가만히 앉아서 대접을 받는 일등석에 앉아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냥 구경만 하고 있는 이등석에 앉아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일을 하는 삼등석에 앉아 있는 분도 있습니다. 혹 지금까지 일등석, 이등석에 계셨던 분들 계시면 삼등석으로 옮겨 앉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보시는 분들이 바로 삼등석의 일꾼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역사철학은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일꾼의 특징은 섬기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먼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직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면서도 자기 체면과 자존심이 겉옷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온전한 섬김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역사철학 가운데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을 섬기되 최고의 것으로 섬길 때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느 청년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그러면 그 청년은 나중에 믿겠습니다. 지금은 인생을 즐기다가 좀 나이가 먹고 기력이 쇠잔하면 그 때가서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옆에 잇던 강도도 죽기 직전에 구원받고 천국에 갔던 것처럼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이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님께서 꽃다발을 보내주었는데 다 시들은 꽃다발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무디 목사님이 병실을 방문하자 청년이 항의합니다. "목사님 좀 싱싱한 꽃을 보내주시지 어디서 버린 것 주어다가 다 시들어 버린 것을 보내시면 저를 놀리시는 것입니까?"
그때 무디 목사님 대답하시길 "왜 기분이 나빴나! 그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일세, 자네 인생을 다 낭비하고 마지막 남은 것을 바친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섭섭하시겠는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역사는 절망적이거나 비관적인 것이 아닌 반드시 완성의 종말을 향하여 긍정적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낙관론적 역사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 피조물은 도덕적인 책임존재로서 책임역사의 완성을 향하여 끊임없이 발전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영적으로 살려는 소수의 창조적 무리, 즉 남은 자가 없으면 그 시대는 몰락하고 맙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 남은 자 10명이 없었기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에 구석 구석에서 신실한 남은 자들이 있기에 하나님의 교회는 든든합니다. 누가 알든 말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감사해서 섬김을 다하는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에 역사철학을 가진 성도들에 의해서 하나님 교회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우리의 신앙적 역사 철학을 정립하십시다.
▶첫째로 우리는 지나간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 구속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시도해야 할 것이며,
▶둘째로 우리의 완성의 종말을 향하여 새로운 교회 역사를 창조하는 최후의 남은 자가 될 것을 다짐해야 할 것이며,
▶셋째로 역사의 주인공인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존재 양태를 인식하고 교회의 선한 역사를 창조하는데 한 알의 밀알로 사용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48주년의 역사가 앞으로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 시대가 자랑스럽게 기록되는 역사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