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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라
시편 111:1~10
오늘 읽은 시편 111편과 그 다음에 나오는 시편 두 편,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다섯 편은 “할렐루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데 있어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이 시편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시편과 그 다음 112편은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글머리가 알파벳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가나다순으로 글을 써서 하나의 사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행사의 위대하심과 영광, 의로우심, 인자하심, 그 권능, 그 일치와 영속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같이 본문 1-4절 말씀을 읽어보십시다.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 도다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이 시인은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할 때는 우리 자신이 거기에 전념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불이 붙어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불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든지 안하든지 나와 내 집을 찬양하기를 결심해야 하며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골방에서 나 혼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도 찬양하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은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 위에 세운 등대와 같기 때문에 믿는 사람으로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모든 방면에서 그래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의 수업시키는 태도나 일상생활에서 어딘지 다른 것이 있어서 학생들에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무 보는 사람이 자기가 맡은 일에서 충성되게 잘해서 상사에게나 동료 사원에게 “과연 저 친구는 뭔가 다른 점이 있어.” 하는 평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장터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도 물건을 만들어 팔 때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봉사해서 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틀림없는 상품을 공급하여 손님을 만족시켜서 나중에 “어딘가 다른 게 있다 했더니 예수 믿는 사람이었더구먼!” 하게 되면 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겠습니까?
가정생활을 하는 주부도 살림을 알뜰하게 하고, 자녀교육 잘시키고, 이웃에게 봉사하고, 집안에서 행복하게 살면 다른 사람들이 “저 예수 믿는 사람의 가정을 보라, 얼마나 행복하게 남에게 본이 되게 사는가!” 하게 되어 “우리도 예수 믿으면 저 집처럼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하며 호기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마태복음 5장 14절 이하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그리고 크고 작은 모임에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에서도, 여호와의 집 궁정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찬양하든지 전심으로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행사가 너무 크시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에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너무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데 대한 감탄입니다. 우리의 한정된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때가 많아도 지나 놓고 보면 감격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의 행사는 크시도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통해서 기쁨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당장에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또한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 세상 우주만물을 보세요. 모두가 신비입니다.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사들을 우리는 겸손한 마음과 부지런한 자세로 추구해야 합니다. “찾는 자가 발견할 것이요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25편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4절을 보세요.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 둘 만한 일일 뿐더러 우리가 찬양하기에 합당하며 마음에 새길 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이 행하는 많은 일들은 솔직히 말해서 다시 거론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진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간직되어야하며 기억되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원된 것을 유월절을 통해 저희가 기억하고 역사에 길이 보존하기 위한 길과 방법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의 군대를 넘실거리는 홍해 바다 속에 납덩이처럼 빠지게 할 때도 물이 높은 벽을 이루어 이 불쌍한 종들을 도망케 하셨던 홍해에서의 놀라운 장면을 저희가 잊을 수 있을까요?
약속의 땅을 점령할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있을까요?
우리 민족이 50년 전에 일본 사람들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던 8.15 광복의 날을 잊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 개인의 생활에서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죄사함 받고 의롭다 인정받던 그 날, 그 감격을 잊을 수 있을까요?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이한 일을 성경에 기록해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모세 오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벽두에서부터 그의 백성에게 행하셨던 기이한 일들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책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을 장래의 세대들이 읽을 수 있게 기록하도록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신중히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책은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기억하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 자손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부모들은 그의 자녀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며, 광야를 건너갈 때 어떻게 인도하셨으며, 가나안 땅을 그들이 어떻게 점령하여 소유로 삼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위 ‘쉐마’라고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이 듣고 행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매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을 우리 자손들에게 알게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월절을 통해서 애굽에서 해방된 사실을 기억케 하고, 광복절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일본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며 기억하는 것처럼, 신령한 이스라엘의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떡을 주시고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요 나의 피니 이것을 행하여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적인 사건인 이 속죄는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며, 바로 어제의 일같이 주님께서 우리 위해 못 박히신 사실을 우리 속에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겟세마네 동산의 고민과 갈보리의 십자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옛날에 행하셨던 일을 성경을 통해서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희 모든 자들아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에게 행하셨던 바를 내가 선포하리라” 위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풍성한가 하는 사실을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자녀는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짓을 선전하기에 요란스러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합니다.” 저는 제 경험으로 이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간증은 이론적인 논쟁보다 더 효과 있게 불신의 의심과 사탄의 시험을 잠잠케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도와주셨는가 하는 사실을 말씀하십시오.
며칠 전에 어느 자매님이 찾아오셔서 그 동안 겪은 어려움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벌써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라며, 주일을 기다리고 삼일기도회를 기다리는 것이 낙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 앞에 나아와 시들었던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을 체험하신다는 간증을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말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도가 기술과 지식으로 되는 것만은 아니고 내가 체험한 변화의 생활을 간증하는 것이 큰 효과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가 풍성하시도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슬픈 자에게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은혜로우시며 자비가 풍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일이 그의 모든 행사 중 가장 놀라운 일이며 그의 영광입니다.
5절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는 것”은 그의 은혜와 자비의 표현입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셨던 일을 말합니다. 또는 약속에 따라서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온 것을 말합니다. 시편 74편 14절에 보면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그 백성에게 식물로 주셨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셨으며, 그들을 풍요하게 하시고, 그들의 양식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잔을 넘치게 하시고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십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 이하에도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9-10)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도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윤택하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간증을 하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시편 111편 5절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10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이와 같은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10장 12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했고,
여호수아 24장 14절에도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충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솔로몬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잠언 1장 7절과 9장 10절에 보아도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흔히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고 사람의 귀를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말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왜냐 하면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사람의 겉만 보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속마음까지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외적인 행동만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 배후에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은 겉만 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을 보시므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은밀한 일까지 살피시고 인간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속았습니다. 그러나 십여 년 후에 여러 사람 앞에서, 애굽 왕 앞에서 속인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부하인 요압 장군을 통해 블레셋 최전방에 우리아를 내보내 자연스럽게 전사하게 했습니다.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단 선지를 통해 이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은밀한 것까지 살피시고 사람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십니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죄는 죄대로 형벌 하십니다.
마귀는 항상 사람을 유혹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죄를 지어도 벌하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다음에는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니까 아무리 죄를 회개해도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속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사랑의 하나님인 까닭으로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겐 용서를 해 주십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벌하십니다. 금생에도 내생에도 벌하십니다. 어떤 때는 양심을 통해서 벌하십니다. 어떤 때는 육신의 병을 통해서 벌하십니다. 때로는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급한 환난을 통해서, 국법을 통해서 벌하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벌 이외에 마지막 오는 세상에 가서 최후 심판을 통해서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민수기 32장 23절에 보면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졸졸 따라다니다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반드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 까닭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을 못 보시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실제로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공기가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같이 하여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꼭 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였습니다. “눈을 지으신 자가 어찌 보지 못하겠느냐” 사실 하나님의 눈은 X-ray보다 더 밝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강하고 담대합니다.
혹시 어떤 오해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해도 늠름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그를 칭찬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고생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범죄한 사람은 왕좌에 앉아 있어도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장래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불안해서 그럽니다. 오늘까지는 평안했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까 해서 불안해합니다. 항상 장래에 대하여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실 죽는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죽음이란 천국 문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왜요? 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대 심판과 형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언제나 두 가지에 힘씁니다. 먼저 죄를 멀리하려고 애씁니다.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범죄 할 수 있느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삽니다. 혹시 잘못해서 죄를 범하면 당장 회개합니다. 죄를 묶어 두지 아니합니다. 그 자리에서 곧 회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만 그치면 안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을 대할 때 재판장의 두려운 얼굴이 아니라 사랑이 가득한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하게 될 때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자리에 들어가게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시편 112편 첫머리를 보세요.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며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의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시 112:1-3) 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경배의 비밀
(시 111:1-10)
찬송 21장
시편 111편은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과 같은 이스라엘의 대절기에 사용되던 작자 미상의 감사 예배시입니다.
시112편과 흡사해서 쌍둥이시라고 불리고 문단 각행의 첫머리가 알파벳 순서에 따라 시작되므로 답관체시 혹은 알파벳시라고도 부릅니다.
본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기이한 행사 특히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대로 자기 백성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사에 대한 감사와 경배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가 이처럼 큽니다.
그래서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했고,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