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엔 안개로 덮혀 천지(天地)를 분간할 수 없었다. 계속 비가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천지(天池)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을 하였다. 대기 중인 버스로 이도백하 부근에 도착,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숙소에 도착했다.
종일토록 빗속을 헤매고 다닌 탓이었는지 호텔로 들어오는 여행객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룸에 들어가 비에 젖은 옷과 신발을 말렸다. TV를 시청하려 리모컨의 채널을 이리 저리 돌려봤다. 재미있어 뵈는 프로그램도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14번 채널에서 우리말로 한약재 광고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연변TV였다. 북한방송의 말씨보다 남한 말씨에 더 근접해 있었다. 우리 TV를 마주한 기분으로 자정이 가깝도록 시청하다 잠들었다.
이튼 날 새벽 다섯 시 반, 모닝콜에 잠이 깨었다. 북파(코스)로 백두산에 오르는 마지막 여행 날이다. 창밖에 비는 그쳤다. 여섯 시 쯤 되자 날씨가 개이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동녘 하늘이 파란 얼굴을 살짝 드러냈다. 차츰 연한 코발트색 하늘이 넓어져갔다. 천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었다. 서둘러 세면과 식사를 마쳤다.
호텔 앞에서 출발한 버스는 북파를 향하여 네 시간 가량 달렸다. 왕복 2차선 도로변 숲에는 미송을 비롯,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침엽수들이 위용을 뽐냈다. 광활한 들판 곳곳에 자라고 있는 옥수수가 장관(壯觀)이었다. 이따금 도로가에 노랗게 피어 있는 이름 모르는 야생화가 가을의 정취를 더했다.
버스가 도착한 지점에서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봉고를 타고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는 중 안개와 푸른 하늘이 몇 차례나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산림은 줄어들고 야생화 무리만이 가냘픈 모습을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상도착! 자욱이 낀 안개로 천지(天池)는 물론 사방 천지(天地)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두 번째 등산 또한 상상의 천지(天池)에 불과했다.
그곳은 듣던 바와 같이 사람 천지(天地)였다. “天池” 라는 한문을 새긴 표지판 근처에 북새통을 이룬 여행객들은 서로 먼저 사진을 촬영하려 경쟁을 했다. 본토에서 온 이들이 한국관광객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들도 거의 손에 스마트 폰을 쥐고 있었다. 우리는 사진을 찍은 후 1시간가량 담소를 나누다 천지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지닌 채 내려왔다. 봉고는 1분도 채 못 되는 간격으로 정상(출발지)에서 도착지(정상)까지 줄을 이어 운행하고 있었다.
도착지에서 다시 셔틀버스로 장백폭포로 이동하였다. 계단을 이용, 걸어서 폭포가 가까이 보이는 곳 까지 올랐다. 더 갈 수 없는 곳에 멈춰 흐르는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반대방향의 계단으로 내려왔다. 섭씨 42도의 유황 온천에 손을 담가 보았다. 년 중 어느 시기라도 따뜻한 온천수가 흘러내린다고 한다. 노른자위부터 먼저 익은 계란을 사서 맛보았다.
폭포관광을 마치고 연길로 이동 중 농산물 판매장에 들렀다. 복숭아 사과 개구리참외 옥수수 인삼 등을 팔고 있었다. 일행이 구입한 사과를 맛보니 우리 것에 비해 육질이 무르고 단맛도 떨어졌다. 참외는 맛을 보여주지 않아 사지 않았다. 이동 중 가이드가 잠시 차를 멈춰 수박과 자두를 사왔다. 수박은 우리 것과 모양과 맛이 그대로였으나 자두는 우리 것에 비해 열매가 작고 신맛이 더했다.
1800년대 중반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이주한 세대가 정착 한 이래 5, 6세가량의 후세가 태어났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말과 글을 사용, 민족혼을 지켜가고 있다. 참으로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이들의 자녀들 중 그곳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얼마가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수 있을까?
참으로 자랑스러운 동포들이다.우리 생활양식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기에.우리가 짓고 있는 벼농사를 지으며 돼지와 닭을 기르고 있다. 겨울이 길고 한랭하여 재배하는 씨앗이나 품종이 우리 것과 다를 뿐, 농작물의 종류는 수십 여 가지가 우리 것 그대로였다.
용정이 가까워지자 도로에서 우측으로 멀리 있는 일송정을 바라보았다. KH양은 나에게 독립을 위해 저항했던 윤동주 시인과 독립투사를 기리는 의미에서 ‘서시’를 낭송할 것과 가곡 “선구자”를 부를 것을 주문했다. 시낭송을 하고 노래를 부르니 감개가 무량했다.
연길에 도착, 저녁식사는 북녘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가졌다. 음식이 준비된 둥근 식탁에 앉으니 30대 후반쯤 돼 보이는 평양출신의 미희(美姬) 셋이서 전자오르간의 반주에 맞춰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이라는 노래로 우릴 반겼다. 이어 맞춰 “반달”,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등을 차례로 불렀다. 그들에게도 한류의 열풍이 일고 있음일까?
식당에서 나온 후 가이드에게 한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동포(조선족) 여성들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느냐고 했더니 ‘예의바르고 성격이 부드러워’ 아내로 삼기를 원한다고 했다. 자녀들의 대학진학에 관해 궁금했는데 중국도 교육열이 대단하였다. 과거엔 인(학) 쌓기 위해 자녀를 대학에 보냈으나 지금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보낸다는 것이었다. 우수한 청년들이 남한처럼 공직에 많이 몰린다고 하며 이를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KH양은 공항에 따라와 짐을 부치는 곳까지 노부부의 짐을 운반해줬다. 따뜻한 가슴으로 대해 주었던 그녀와 석별의 정을 나눴다. 이튼 날 현지시간으로 1시 반경 트랩에 올랐다. 짧은 일정이었으나 연변 동포들의 생활상을 상당부분 접할 수 있었던 뜻 깊은 여행이었다.
첫댓글 좋은 곳 다녀 오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연변동포 5.6세대들 정말 훌륭합니다. 우리 문화를 그렇게 잘 계승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백두산 여행기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 여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여행중 보고 들은 것에 대한 한 가지 중요한 일(사건)에 대하여 끝까지 치밀하게 파헤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저 보고 듣고 느낀대로 서술했기에 이 글은 기행문이지 기행 수필은 못됩니다. 그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천지 못보신게 아쉽네요. 좋은여행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