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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간 예수님의 천국 비유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천국에 관한 묵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난 주간에는 제 아버지의 장례가 있어 장례를 치르며 더욱 천국에 대한 생각을 가지며, 깊이 있게 천국 묵상을 해 본 한 주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어떤 곳인지를 비유하는 이 말씀을 통해 천국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지고 천국에 합당한 인생이 되길 기대하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천국에 대한 마지막 비유인 그물 비유입니다. 천국은 “어부들이 그물을 치고 여러 가지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도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시고 그 물고기 잡는다는 것이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 모든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오늘 말씀의 끝 부분을 보면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만 구원받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듯이 선악간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정말 구원받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우리가 어떤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지를 깨닫게 되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에 필요한 조건 첫째는 교회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7절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팔레스타인지역에 사는 유대인의 대부분은 소금에 절인 생선과 밀, 보리 등을 주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보통 팔레스타인 지역이 지중해 바다에 접해 있으니 바다 물고기를 먹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주로 갈릴리 호수에 있는 각종 물고기를 잡아서 먹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약 22종 이상의 물고기들이 생존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면 아마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잡힐 것입니다. 이것으로 바로 구워 먹거나 혹은 소금이나 식초로 절여서 또는 말려서 먹었습니다. 팔레스타인지역에서 어업은 농업보다도 오히려 더 필요한 식자재 생산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어부는 각광받는 직종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잡을 때는 여러 종류의 그물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천국을 그 그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씀을 자세히 읽다보면 이 그물이 비유하는 것이 천국이라고 하기보다 교회 혹은 천국 들어가기 전의 심판의 단계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의미라고 볼 수 있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σαγήνῃ βληθείσῃ εἰς τὴν θάλασσαν καὶ ἐκ παντὸς γένους συναγαγούσῃ (사게네 블레쎄이세 에이스 텐 쌀랏산 카이 에크 판토스 게누스 쉬나가구세) 이라는 문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인자의 명령에 순종하며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쓰인 “그물” 헬라어로는 ‘사게네’(σαγήνη)라는 것은 투망이나 작은 그물이 아니라 저인망이나 예인망과 같은 큰 그물을 뜻합니다. 어떤 한 종류의 물고기를 잡은 그물이 아니라 수 많은 물고기 각종 물고기를 잡는 그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각종 물고기”라고 번역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공동번역성경에서는 “온갖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초청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녹아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바다이며, 그물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가려가며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다 구원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적어도 7명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어부였으니까 이 비유를 저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물을 바다에 내린 이유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물을 치면 내가 필요한 물고기만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부는 일단 그물 안에 어떤 물고기이든 들어오기를 기대하며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마태복음 22장 9,10절입니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바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은 ‘그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영혼에게 내가 만난 이 복음을 전하여서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불신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는 환란과 핍박시대입니다. 복음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참수를 당하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살려달라는 애원보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결국 그의 순교의 마지막 순간에 그 영향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 자리에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고 온갖 폭행과 핍박을 일삼던 그가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경험으로 인해 그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이유 한 가지만을 들라고 한다면 당연히 영혼구원입니다. 교회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주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닌 교회밖의 아직은 구원받지 않은 듯 보여지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도 보시겠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도 이 땅의 영혼을 사랑하며 그들을 끝까지 붙들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며 내 가족, 내 이웃을 교회로 인도하기를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해서 한 영혼이라고 더 생명을 얻게 되는 일에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에 필요한 조건 둘째는 그물에 잡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8절입니다.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오늘 본문 48절을 보시면 어부가 친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그물 안에는 어부가 원하는 물고기도 들어 있었을 것이고 원하지 않는 물고기도 함께 잡혔을 것입니다. 주인이 밭에 알곡을 뿌려놓고 보니까 그 옆에 가라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밤에 몰래 사탄이 와서 뿌리고 간 것입니다. 알곡이 가라지와 함께 자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그물 안에는 각종 물고기가 있는 것입니다. 어부가 원하는 물고기도 있을 것이고 원하지 않는 물고기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가라지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아직 알곡을 맺지 않은 채 자라고 있는 곡식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큰 죄악을 범했습니다. 이 때 교회에 대해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이 화를 내며 “교회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저렇게 큰 죄를 범했는데 왜 교회는 가만히 있느냐?”라며 교회를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한 사람은 교회를 떠나 버린 그 사람을 보면서 “아니, 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용서할 줄도 모르고 화를 내는 저런 사람이 교회 중직자란 말인가?”라고 말했고 화내며 실망했고 교회를 떠나 버렸습니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은 모두 교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보고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닌 지 우리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연약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에 허물과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오염되지 않은 완벽한 공간, 이상적인 장소가 절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의로운 사람도 있지만 죄인도 있고, 영적으로 성숙한 어른도 있지만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고 긍휼과 관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며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우리 주님되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고쳐나가시고 점차로 변화되면서 천국으로 인도하실 그 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 담배를 끊지 못하고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갖 악한 행동을 하며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온갖 상처를 주며 한 주간을 보냈지만 그 상태로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한 주동안 세상속에서 엄청나게 세속적인 삶을 살았고 전혀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던 상태로 주일에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온갖 죄악과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온갖 고통, 삶속의 여러 가지 고민을 가지고 우리는 교회에 나와 교회에서 그것이 해결받기를 기대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도 나쁜 습관을 끊지 못하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행할 수도 있고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을 믿고 싶고 변화하고 싶은 마음이 있음에도 친구들 때문에, 환경 때문에, 자라온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좌절과 낙담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소중한 것은 그런 상태에서 이제 하나님을 향한 마음, 변화되고 싶은 마음, 낮아져서 하나님만 경외하려는 그 마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가라지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손해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다른 사람 때문에 실족 당하면 우리 자신이 손해입니다. 사람을 보며 신앙생활하다가 무너지면 내가 손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 주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인간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죄성 때문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또 넘어지지만 다시 한 번 용서받고 주님 앞에 나와 변화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택하셨습니다. 그물로 나를 붙드셨습니다.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믿고 순종하면 반드시 우리안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와 함께 새롭게 거듭나게 하십니다. 지난 날의 잘못된 습관을 내려놓습니다. 잘못된 성격도 바꾸어지고, 잘못된 습관도 바뀌어 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정된 정원이 차기 전에 심판을 단행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숫자가 차기까지 혹은 악이 차기까지 기다리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말씀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나아가서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그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생명을 구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합당한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그물에 잡혀야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 안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기본 자격인 그물에 잡힌 고기로써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을 통해 그물에 잡히는 고기들이 많아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에 필요한 조건 셋째는 잡힌 것 중 선택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48절입니다.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마태복음 13장 앞 부분에 기록된 ‘가라지 비유’에서 추수 때가 되면 농부가 알곡은 모아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넣는다는 것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알곡이요 하나님의 관심은 선택된 물고기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지역 어부들은 바닷가에서 잡은 고기를 ‘쓸만한 물고기’와 ‘버릴 물고기’를 구분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제가 TV를 보니 고기잡이 배에서 그 날 출조하여서 잡으려 했던 어종이 아닌 다른 종의 고기를 버리는 것을 봤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분명 버리는 고기가 더 비싼 어종이고 값비싼 품종을 왜 버리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부들은 공판장에 내려놓을 때 최소의 단위 무게로 판매해야하는데 몇 마리 잡히지 않은 고기는 판매 값어치가 없어지기에 아무리 비싼 고기라고 해도 가져가져 가지 않고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느 것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고를 때 ‘좋은 고기’ ‘나쁜 고기’로 구분할 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에는 ‘쓸 수 있는 고기’와 ‘쓸 수 없는 고기’, ‘판매 가능한 고기’와 ‘판매 불가능한 고기’로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심판 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며 심판하시고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심판하십니다. 천국 복음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언젠가 분명히 심판의 때가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종말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고 모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날을 의식하면서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언젠가 그물을 끌어올려 물고기를 좋은 것과 좋지 못한 것을 나누게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물을 건져 올려 구분을 하기 전까지는 모든 종류의 고기들이 함께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생활하며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하시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3장 49, 50절을 보시겠습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에 대해 말씀합니다. 세상의 끝과 천국, 지옥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 세상에는 분명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구원은 분명한 심판과 분명한 천국, 분명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 땅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모두가 그 끝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이 끝나는 때가 온다면 그것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은 끝이 없습니다. 지옥에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입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지옥불 구덩이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지옥이란 물 한 방울의 자비도 없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약간의 죄라도 짓기만 하면 지옥 불에 던져 넣으시려고 벼르고 계신 분은 아니십니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심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결단은 내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아니할 때가 갑자기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심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날이 되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엄격하게 양과 염소,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구분하실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을 결정하는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향하여 바쁘게 사십니까?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눈앞에 계신데도 시선을 잠시 일락에 빼앗기고 정신없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은 생각보다 미련합니다. 노아의 방주를 120년 동안 짓게 하신 것은 심판을 미루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인내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120년의 기회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주신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며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십니까? 지금 누구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 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심판의 날에도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양으로, 알곡으로, 좋은 물고기로, 충성되고 착한 종으로, 지혜로운 처녀로 인정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심판대에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지만 반드시 심판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심판대에서 각자 양인지 염소인지,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좋은 물고기인지 못된 물고기인지, 악한 종인지 착한 종인지, 지혜로운 처녀인지 미련한 처녀인지 판가름 날 것입니다. 하나님 심판대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편과 마귀 편 둘 중 하나입니다. 세상의 문이 닫히고 심판의 장이 열리면 돌이킬 시간, 회개할 시간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멸망당하는 영혼은 풀무불에 던져 넣어져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갑자기 끝이 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지금 우리가 결단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이 땅에게, 이 세상에서는 분명히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늘과 땅의 모든 주권을 가지신 우리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분앞에 우리가 어떤 심판을 받을지 깨닫고 참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성도되기를 다짐하며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