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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승리와 견고해진 왕권
삼상 11:9-15
9 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10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11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삼상 11:9-15 / 사울이 길르앗야베스에서 온 심부름꾼들에게 명령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주민들에게 내일 정오쯤에는 너희가 해방될 것이다.' 하고 전하여라. 암몬 족속에게 포위되었던 성읍에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안도의 숨을 쉬었다. 10) 그러나 그들은 슬기롭게도 암몬 족속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다. `우리는 내일 성문을 열고 나아가서 너희들 앞에 항복하겠다. 그때 너희가 원하는 대로 우리를 처단하여라!' 11)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사울이 벌써 자기의 군인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놓고, 이른 새벽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사방에서 암몬 족속의 진지로 기습해 들어가도록 하였다. 사울의 군인들은 방심하고 잠만 자던 암몬 족속의 군인들을 이른 새벽부터 쳐죽이기 시작하여 정오쯤에는 그들을 거의 다 쳐죽였다. 칼을 피해 달아났던 몇몇 암몬 군인들도 사방으로 흩어져서 더 이상 싸우러 나설 수가 없었다. 12) 사울이 이렇게 암몬 족속을 쳐서 멸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찬양하면서 사무엘에게 제안하였다. `전에 사울은 왕이 될 수 없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자들은 이제 저희 손에 맡겨 주십시오. 당장에 죽여 없애겠습니다.' 13) 그러자 사울이 나서서 반대하였다. `오늘은 어느 누구도 죽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몰살당하게 된 것을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살려내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14) 사무엘이 온 백성에게 제안하였다. `이제 우리는 길갈로 갑시다! 우리는 거기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만세를 부릅시다!' 15) 그래서 모든 백성이 사무엘을 따라 길갈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여호와의 성소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많은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친 다음에 온 백성이 큰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하였다.
사울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므로 왕권이 견고해졌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백성들을 길갈로 모은 후 여호와 앞에서 화목제를 드리며 사울의 즉위를 재차 선포합니다.
승리의 전쟁(9-11) 사울은 군사소집을 마친 후 야베스에 전령을 보내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야베스 사람들은 기뻐하며 암몬 족속에게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고 요청합니다. 사울이 소집된 군사들을 삼 대로 나눠 새벽에 기습작전을 펼친 후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을 칩니다. 이로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이 전쟁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사울의 겸비함(12-13) 사울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사울의 즉위를 반대했던 자들을 끌어내어 처단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인정하며 결코 보복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사울이 초기 통치기간 동안에 보여주는 겸비함은 그가 왕으로 선택받았음을 인정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왕권강화(14-15) 사무엘은 사울이 이끄는 군대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백성들을 길갈로 오게 한 후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촉구합니다. 이에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고 여호와 앞에서 화목제를 드리며 왕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비로소 사울이 백성들로부터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왕권이 든든히 세워지게 됩니다.
적 용 : 어려운 일을 해결한 후 그 결과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세계 최대 부호인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뛰어난 두뇌로 세계적인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빌 게이츠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생각한 것처럼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재능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으로 옮기고 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노력했을 뿐입니다.”
< 설 교 >
나라를 새롭게 하라
사무엘상 11:12-15, 마태복음 6:9-10
우리나라가 요즘 ‘의리 신드롬’에 빠져 있습니다. ‘의리’라는 말이 때아니게 유행하더니 ‘의리 패러디’도 많아졌습니다. ‘아메으리카노’, ‘성유으리’, ‘믿고 맡기는 으리은행’, ‘레으리잇고’ 등 패러디도 만발하고 있습니다. ‘의리’를 외치던 배우 김보성씨가 CF 출연한 식혜가 대박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월드컵 본선에서 우리나라는 16강 진출에 실패하였습니다. 홍명보감독의 축구도 런던 올림픽 축구 동메달을 땄을 때의 선수들을 기용해서 자신이 아는 선수만 뛰게 했다고 하여 ‘의리’ 축구라고 들끓고 있습니다. ‘의리’도 아닌 ‘으리’가 갑자기 열풍을 일으킨 배경에 세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버린 선장이나 재난을 수습하는 정부인사도 의리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의리 없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의리 신드롬’을 만들었다고들 합니다. ‘의리’는 인간의 삶에 참 중요한 요소입니다.
옛말에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익을 보면 먼저 의리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군자는 의리를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군자는 점점 사라지고 소인배들만 남아 있어 자신의 작은 이익 때문에 큰 것을 놓치고 천하보다 귀한 인명을 하잖게 버림으로 사회를 위험에서 재앙으로, 낙심에서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의리’(義理)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입니다. 의리는 인간의 기본 인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인성조차도 버리고 찾지도 않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 가족 간의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 사회인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 교인들 간에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 국민들이 상호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나라의 경제나 교회의 발전이 압축성장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기본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나라도 교회도 반드시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를 배워야 합니다. 인문학이 괄시 당하고, 철학과가 폐과 되고, 기초과학을 기피하고 당장 돈을 벌기 쉽고 눈앞에서 쓰기 좋은 학문만 발달하는 나라는 희망이 없는 나라입니다.
나라나 교회가 겉을 바꾸고, 형식을 새롭게 할 것이 아니라 근본을 바꿔야 합니다. 나무의 잎이 아니라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성형으로 얼굴을 다듬을 것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도 교회도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요시야왕은 고대 이스라엘의 마르틴 루터라고 불립니다. 그는 부왕 아몬이 일찍 세상을 떠나서 8세에 즉위하였습니다. 재위 8년이 되던 해인 16세에 그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고 평생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살았습니다. 20세에 우상과 우상의 제단을 다 제거하였습니다. 역대하 34:2에는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합니다. 18번째 해인 26세에 그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수리하는 가운데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나라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룬트비목사님(1783-1872)은 덴마크의 시인이며, 교회의 감독이며, 신학운동인 그룬트비주의의 선구자였고, 덴마크의 국부로 불리는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동포 사랑을 외치며 덴마크를 현대의 부국으로 만든 분입니다. 그는 “교회는 이 일에 앞장서라”고 하여 나라를 새롭게 세웠습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가 나라를 새롭게 합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의 건국 수상인 벤구리온, 전후 독일을 새롭게 세운 아데나워수상, 미국을 새롭게 세우고 가장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된 아브라함 링컨, 27년의 옥고를 치르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을 타파하여 새롭게 나라를 건설한 넬슨 만델라대통령 등이 다 나라를 새롭게 세운 위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나라를 새롭게 세웠다고 공인할 만한 전직 대통령을 가지지 못한 것이 민족의 불행입니다.
잠언 4:2에는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리는 우리 개인이나 민족이나 나라를 새롭게 합니다. 요시야를 비롯한 성경의 인물들, 그룬트비를 비롯한 인류역사에서 나라를 바로 세운 위인들은 절대 변치 않는 신앙적 의리를 가진 분들입니다. 이제 다시 분연히 일어나 우리가 앞장 서 신앙의 의리로 나라를 새롭게 하는 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길갈에 가서 나라를 세웁니다.
사무엘상 11:14에는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합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길갈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곳, 거룩한 곳, 하나님을 경배하는 의미 있는 곳에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길갈이 어떤 곳입니까?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넌 후 최초로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요단에서 가져온 12 돌을 세운 곳입니다. 셋째는 ‘수치가 굴러갔다’고 했던 곳입니다. 넷째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곳입니다. 다섯째는 엘리야 시대에 선지자를 양성했던 곳입니다. 이런 곳에 나라를 세워야 새로운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거룩한 자리에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한반도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정신적 근간, 영적 뿌리가 좋은 토양에 내려져야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이 어떤 땅입니까? 미국이나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넓고 자원이 많은 땅이 좋은 땅입니다. 이런 나라에 가보면 관광자원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몽골이나 CIS 국가 가운데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리키스탄 그리고 남미의 페루 같은 나라를 자원부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원이 많다고 하여 반드시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영적 바탕과 정신적 기초가 기름진 곳에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스위스, 싱가포르, 베네룩스 3국 등을 보세요. 자원이 많아서 부국이 아닙니다. 지하자원은 없지만 영적 자원, 정신적 자원이 풍성합니다. 든든한 영적 기초에 나라를 세웠기에 나라가 든든하고 좋은 나라입니다.
시편 1편은 복이 있는 자를 정의합니다. 복이 있는 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해지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복이 있는 자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애쓰지 말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많아지게 되자 종들이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겠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롯은 요단 지역 소알까지를 바라보니 온 땅에 물이 넉넉하였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롯은 우선 좋아 보이는 땅을 모양만 보고 선택하였습니다. 외형만 보고 속아서 택한 곳이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삶의 자리를 잘못 선택하므로 온 집안이 멸망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느라 부인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만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려고 버티지 말고 아예 옳지 않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죄 있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잠언 4:15에는 사악한 자의 길과 악인 길을 두고 “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라고 합니다. 나쁜 자리를 피하고 지나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항상 좋은 자리를 지키고 좋은 자리를 지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모리아는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라고 찬사를 보내던 자리입니다. 모리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세운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 자리를 펴야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십니다. 바로 그런 자리가 나라를 세울만한 자리다운 자리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호렙산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곳은 척박한 산꼭대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룩한 곳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돌을 세워 기름을 부었던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형님을 만나러 다시 돌아올 때에 야곱의 가문이 큰 환난을 당합니다. 그의 딸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욕을 당했고, 디나의 오라버니들은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례인 할례를 아들들이 원수를 갚는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 때 야곱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벧엘은 야곱에게 거룩한 자리입니다. 제단을 세울 가치가 있는 자리입니다.
다윗은 헤브론과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우고 다스렸습니다. 사무엘하 5:5에 보면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고 합니다. 헤브론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거룩한 자리입니다. 나라를 세울 만한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이성계는 즉위 1년 후에 국호를 ‘조선’이라고 정했습니다. 조선이라고 국호를 바꾼 이유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도읍을 새로 정하게 하였습니다. 도읍의 후보지로서는 계룡산 일대인 지금의 계룡대가 있는 계룡,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있는 신촌 일대인 무악 그리고 한양이었습니다. 한양이 계룡과 무악을 제치고 도읍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풍수지리 때문에 정한 곳이 한양입니다. 그러나 풍수지리 때문에 좋은 자리, 거룩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에 나라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렸습니다. 우리나라가 평화통일이 되어 평양에 다시 교회가 세워지고 우리나라가 회복되는 꿈을 함께 꾸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제헌국회는 이승만의장이 제헌국회의원인 이윤영목사에게 기도하게 하므로 기도로 시작한 국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국회에 웬 오물이며, 웬 최루탄입니까? 길갈에 세운 우리나라, 우리국회가 점점 세속도시로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잘 되고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우선 우리나라의 길갈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2. 화목제를 드리고 나라를 세웁니다.
사무엘상 11:15에는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고 합니다. 길갈에 나라를 세울 때에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므로 나라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성경에는 사무엘 시대에 얼마나 나라가 혼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든지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혼란기였습니다.
레위기에는 다섯 가지 제사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다섯 가지 제사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화목제는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와 소제는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의무적 제사인 반면에 화목제는 선택적 제사입니다. 정규적 제사가 아닙니다. 감사할 때는 감사제, 서원이 있을 때는 서원제, 자원해서 드릴 때는 자원제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봉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나 주정봉헌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적 봉헌입니다. 반면에 감사봉헌, 생일봉헌, 목적봉헌 등의 봉헌은 선택적 봉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은혜의 분량에 따라 하는 봉헌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보다 자원하여 감사로 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실 제사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화목제란 히브리어로 ‘쉘라임’입니다. 이 말은 ‘샬롬’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샬롬이란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구원이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화목제사의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구원제’라고도 합니다.
욥기 22:21에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합니다. 화목이란 밀착시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면 영적인 복, 물질적 복, 명예적인 복, 건강의 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화목’이란 말의 헬라어는 ‘카탈라소’로서 교환하다, 혼합하다,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분리된 관계를 다시 붙여 놓는 것이 화목입니다. 고린도후서 5:20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계개선입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안병욱교수님의 ‘인생사전’이란 책에는 인생을 바로 살아가려면 삼기(三氣)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패기(覇氣), 의기(義氣), 화기(和氣)입니다. 인간이 바르게 살려면 삼기가 혼연일체가 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패기란 씩씩한 기상이며 자신만만한 태도입니다. 의기란 의로운 기운이며 올바른 정신이며 정의감입니다. 화기란 화목한 기운이며 훈훈한 정신이며 봄바람과 같은 따뜻한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화목한 기운이 있어야 인생을 바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삶도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나라의 정신적 기초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화목해야 다른 사람과 화목합니다. 사람과 화목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불화하면 사람과 불화하고, 자연과도 불화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 불화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일이 잘 될 수 없습니다. 가정불화는 부부사이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화입니다. 가정불화는 자녀문제를 야기하고 심지어 청부살인까지 서슴치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가불화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화입니다. 이념이나, 계층이나, 이익관계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마구 찢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이런 모든 불화를 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장 기본이며 우선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나라를 새롭게 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불화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귀입니다. 에베소서 4:27에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마귀는 틈만 있으면 벌려놓고 찢어놓습니다. 마귀는 불화하게 하는 선수입니다. 요즘 이단 신천지의 수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게 하려고 온갖 헛소문을 퍼트립니다. 그래서 교회가 문제가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면 들어가 교회를 찢어놓고 그 교회를 접수합니다.
이들은 교회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교회 곳곳에 우리교회가 구원이 없다고 비난하고 자기 교주의 설교를 들어보라고 하는 편지를 뿌려놓고 가기도 하고, 저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른 교회에 익명의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하여 갈등이 생기면 들어와서 틈새를 벌리고 불화하게 하는 것이 이들의 수법입니다. 틈새 작전은 마귀의 전형적 수법입니다.
지난 번 몽골에 갔을 때 그 곳의 항공사에 근무하는 한인교회 집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교회 어느 항공사에 근무하는 집사님이 처음 항공사에 근무할 때에 공항에서 승객의 휠체어 서비스를 맡아서 하였다고 합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의 자존심으로는 그런 일을 하기엔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집사님은 6개월을 묵묵히 그 일을 불평 없이 기꺼이 하더랍니다. 그 때 ‘저 분 참 대단하다. 앞으로 훌륭하게 잘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비록 천해보이고 작은 일일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하는 사람이 나라를 새롭게 세우는 사람이며 의리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감사하는 마음으로 화목하게 하는 한 사람이 세상에 필요하며, 세상을 새롭게 바꿉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라를 새롭게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 론
중국의 제왕학의 요체는 세 사람의 인물을 곁에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원리원칙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인덕 정치란 무엇인가, 경세제민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올바른 사상을 따라 국가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지략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수한 전략과 전술을 생각하고, 위기 때 나라를 구하고, 발전과 번영을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간언하는 사람입니다. 권력자의 잘못된 길을 용기 있게 직언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옳은 길로 돌아올 수 있게 하여야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바르게 만드는 것은 법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칼로도 되지 않습니다. 나라를 바르게 세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과 화목한 것입니다. 나라의 영적, 정신적 자리가 든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 길갈에 우리나라를 든든히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과 화목하므로 사람과 화목하여 하나님이 주신 이 나라를 다시 든든히 세우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