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를 시작으로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 3월, 4월호, 5월호, 6월호, 7월호이다. 이번 7월호가 열두 번째 연재기고이다. (편집자 주)
이청준과 가면(假面) 세계- 이청준 문학관을 위하여(12)
1. 소설과 이청준과 가면
이청준 소설에는 가면(假面)이 꽤 등장한다. 가면을 쓴 세상과 벗은 세상이 공존한다. 가면으로 가린 본색(本色)과 가면으로 가장한 가색(假色)은 물론 달랐다. 그는 진짜와 가짜 구별에 민감하였다. 가식을 꺼려했던 이청준의 개인적 품성이 드러나는 대목일 수 있지만, 어느 누구인들 가면의 세계에 따로 관심을 둔다는 것은 뭔가 불편한 불안증과 우울증, 분열강박증의 반영일 수 있다. 이청준은 빈한한 시골에서 어린 나이에 출향을 하였기에 한쪽으로 출세와 성공의 포부가 상당했을 것이 지만, 다른 한쪽으로 낙마와 추락의 불안에 불면의 밤도 많았을 것이다. 대도시의 부초(浮草), 난민, 유랑의식의 혼돈 속에서 그 정체성의 이중성에 참담한 고초를 겪었을 시절이었으리. 또한 "사람으로서 밥값을 하고 살아야 한다. 소설가로서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면 죄악이다."는 지식인으로서 부채의식도 상당했을 것인데, 그러면서도 개인적 부끄러움과 자괴감으로 인하여 그 뭔가를 어둠 속에 감추거나 깊이 묻어둘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말과 입을 단속하던 국가권력의 폭력에 대항하는 직업 소설가로서 그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는 방패 역할을 하는가면(假面)을 이용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렇다 해도 유령 마스크는 등장하지 아니했다.
-소설가 이청준 역시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열패감을 부여해주는 멍에와 굴레를 훌훌 털어내고, 저 창공 높이 훨훨 날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크게 달랐다. 무엇보다도 어린 영혼에 치명적 타격을 준, 외갓집 참사의 비극을 쉽게 털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체험과 목격에서 야기된 무력감을 가릴 수 있는 가면(假面) 때로 필요했을지 모른다. 여하튼 이청준 소설에는 여러 가면에 의지하는 인물들이 나타난다. 그 가면의 가상세계에는 얼굴 가면을 쓰거나 변장을 한 인물들,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정신병으로 진단받는 환자와 미친 사람으로 찍혀버린 사람들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소설가 이청준이 제시한 가면(假面)은 인간본성의 이중성과 분열성을 표상 구하는 상징물일 수도 있다. 험악한 세상을 지켜보는, 두 눈구멍이 파여진 가면(假面)은, 스스로를 지켜내는 유용한 수단일 수 있다. 음지(陰地)의 사물과 인간을 표현하는 것도 창작세계의 범주에 포함 될 수 있겠다. 이청준이 보여주는 가면은 점차 고립되고 단절되는 개인사회를 예고하는 시대적 증상일 수도 있었다.
2. 몇 사례들
<소문의 벽, 1971> - 그 '정신 병' 증상이 그 내면적 가면이 되고 만다. 소설가가 문학으로 말할수 있는 시대에 작가 박준(박준일)은 정신병 환자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 상황이라 했다. 관찰자나'는 잡지사 편집장이다. 소설가 박준을 치료하는 병원장은 전짓불 치료법을 사용한다. 소문 속에 소문이 겹쳐지면서, 진실과 표현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에 미친사람으로 진단받고 만데서, 미칠 수밖에 없는 소설가의 불안을 그려 낸 작품일 수 있다. 박준은 "나는 미친사람이 아니요"라고 말하는데, 그런 미친 얼 굴 자체도 제3자가 만들어낸 가면일 수 있다.
<가면의 꿈, 1972> -가면 쓰기와 가면 벗기가 계속 되다가, 중국에는 '가면의 추락'으로 결말이 난다.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에 최연소 합격을 한 판사의 일상에도 '어둠속 가면'이 필요하였다. 밤마다 가면을 쓰고 외출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가면에서 위안을 얻었던 것이며, 대낮의 햇빛은 너무 따가왔다. "가면이 울고 있다! 가면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한탄과 궁금증이 겹쳐진다. 그 가면의 눈물은 속으로 흐르기 마련인가? 그런데 추락사를 한 판사의 가면 속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 가면 속에서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가 날마다 치열하게 싸웠을 것. 죽은 남편의 하얀 얼굴에는 눈물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얼굴은 꿈을 꾼듯,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도시사회 속의 인간 소외 결과도 되었을까?
<황홀한 실종, 1976) - 비록 은행이라는 안정된 직장문 안으로 들어갔으나, 수차 승진에서 탈락한 은행원 윤일섭은 시위전력도 있었는데, 대인기피증과 도착증 증세를 보인다. 정신과 전문의 손박사의 처방이 있었지만, 윤일섭은 동물원 쇠창살 안으로 들어가서 사자 자리를 차지하였다. 동물이 있던 자리에 사람이 안주했으니, 그 쇠창살 의미가 혼돈스럽다. 사람의 가면을 쓴 동물인가? 동물원 쇠창살의 안쪽과 바깥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자본주의 체제의 상징, 은행점포의 창살과는 또 어떻게 다를수 있는가?
<예언자, 1977>- '살롱 여왕봉'에서는 새로 바뀐 '홍마담'이 정한 출입규칙과 지시에 따라, 손님과 주인, 여급 등 누구라도 미리 정해진 '가면(假面)'을 써야 했다. 사람들은 가면에 익숙해지면서, 가면의 여왕 홍마담이 휘두르는 회초리에 복종하게 된다. 표정을 숨긴 가면은 익명성과 공격성을 부추기는 도구가 되었다. 살인사건을 예고했던, 원래의 예언자 '나우현'은 '홍마담' 앞에서 점차 힘을 잃다가 그 마지막에 드디어 혼자 가면을 벗은 얼굴로 나타났다. 홍마담의 심복이던 가면이 곰처럼 위태롭게 그에게 다가간다. 과연 어느 쪽이 끝내 이길 것인가?
여타 소설에도 '불안감과 이념적 정체성, 삶과 죽음, 출신지 고향, 지역차별 등에 관련하여 얼기설기 얽혀있는 모습의 가면, 얼굴, 진상, 운명'이 등장한다. <굴레,1966>, <나무 위에서 잠자기, 1968> <가수(假睡), 1969>, <안질주의 보, 1975>, <얼굴없는 방문객, 1978>, <숨은 손가 락, 1985>, <가해자의 얼굴, 1992> 등이 있다.
3. 이청준의 본색
그는 세월이 숨겨버린 진상 속에서 '잃어버린 기본'을 되찾고자 노력하였다. '수단껏 승리를 쟁취한 노예' 쪽보다 웃으면서 패배한 자유인' 쪽을 갈망하였다. 가난하였지만 남보다 똑똑하여 누릴 수 있었던, 서울 대처 생활에 있어서도 자부심 에 낭패감이 겹쳐 있었다. 그는 '얻어 누리며 안주하는 자리'를 부끄러워 했다. 그 1960년대에 주말이면 비행기로 동경 쇼핑을 다녀오는 서울상류층 자녀를 상대하는 가정교사 자리를 계속할 자신도 없었다고 한다. 서울사람 행색으로 태연하게 산다는 것 자체에 영 자신이 없었다. 그를 향하여 깊어지는 경계와 멍에와 굴레 속에도 하나의 원칙은 분명하였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시와 소설은 힘없는 사람들 입장을 공감하는 것이다. 그가 발표하는 '소설이야기'는 결국에는 '소설가이청준'의 <소설론타령>으로 귀결되고, <인생론철학>에 가까워지고 말았다. 그는 그 글쓰기 때문에 살아갈수 있었다. 이청준, 그는 거울속 자신의 얼굴을 바로 못보는 부끄러운 남자요, 그 주변 가족과 여자들에게도 늘 면목이 없었을지 모른다. 하늘의 눈과 인간의 눈을 누구보다 조심하면서, 그 어떤 침묵의 소리에도 민감하신 분이었다고 생각 한다. (그는 드디어 <비화밀교, 1985>에 이르러 그 제왕산 횃불과 함성을 힘껏 지 지하였다)
박형상 변호사(前 서울중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