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하도 많아 입 다물어버렸습니다. 눈꽃처럼
만발한 복사꽃은 오래 가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
가세요, 그대. 떨어지는 꽃잎처럼 가볍게, 연습이듯 가세요
꽃 진 자리 열매가 맺히는 건
당신은 가도 마음은 남아 있다는
우리 사랑의 정표겠지요
내 눈에서 그대 모습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온전히 받아
내 스스로 온몸 달구는 이 다음 사랑을.
▶‘복사꽃’은 복숭아나무의 꽃을 이르는 말이다. 과일 나무의 꽃을 사과꽃, 배꽃, 자두꽃……이라 부르는데 왜 복숭아꽃은 복사꽃이라 부를까. 실은 애초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올 때 복사나무였으니 꽃은 당연히 복사꽃이었다. 다만 그 열매를 복사라 하지 않고 복숭아라 부르며 꽃을 한자어로 도화(稻花)라 했을 뿐이란다.
복사나무는 중국 황하 상류 고산지대가 원산지라 하는데 이 나무의 꽃인 ‘복사꽃’은 연분홍빛을 띠어, 보기에 참 아름답지만 개화 기간이 좀 짧은 것이 아쉽다. 흔히 복사꽃의 꽃말을 사랑의 노예, 희망, 용서 등이라 하는데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타나듯이 이상향의 상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열매인 복숭아는 신선들이 먹는다는 선과(仙果)로 여긴다는데 좋은 맛만이 아니라 뽀얀 솜털이 덮인, 젊은 여자들의 예쁜 얼굴이나 육감적인 엉덩이 자태에 비유되어 많이들 좋아한다.
이정하의 시 <복사꽃>은 제목이 ‘복사꽃’이지만 복사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랑을 노래한다. ‘할 말이 하도 많아 입 다물어버렸단다, 그것도 ‘눈꽃처럼’ 입을 닫았단다. 그런데 첫 행의 마지막 구절 ‘눈꽃처럼’은 첫 행을 도치법으로 수식하기도 하지만 그 다음 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눈꽃처럼 만발한 복사꽃’이 그것이다. 시행 배열을 통해 멋진 표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시 속에도 지적하고 있듯이 ‘복사꽃은 오래 가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 시 속 화자는 이별하는 연인에게 ‘가세요, 그대’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도 짧게 피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가볍게’ 가라 한다. 나아가 ‘연습이듯 가’라고 한다. 짧은 사랑이었기에 얼른 잊으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실은 그 다음 사랑이 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시를 연인들의 이별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하다간 고개가 갸웃해진다.
그렇다고 이별을 하는데 미련이야 없겠는가.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은 떠날 사람은 가도 둘이 나눈 ‘마음은 남아 있다’는 것이요 그것이 그들의 ‘사랑의 정표’가 될 것이란다. 그러나 ‘내 눈에서 그대 모습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란다. 무엇을, 진짜 사랑을. 바로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온전히 받아 내 스스로 온몸 달구는 이 다음 사랑’이다. 이 다음 사랑이라니? 맞다. 바로 ‘복숭아’ - 복사꽃이 지고 난 후에 맺히는 열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