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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初代 太祖의 健元陵과 2代 定宗의 厚陵
初代 太祖의 健元陵 -單陵 -사적 제193호 -九里 東九陵 境內(九里市 仁倉洞)
*太祖 李成桂(1335~1408) -本貫; 全州 -出生; 咸鏡道 永興 -字; 仲潔 -號; 松軒
父親 李子春과 母親 崔氏의 次男으로 高麗 忠肅王 4년(1335)에 출생했다. 先祖는 全州에 살았으나
高祖父 李安社 때 間島地方으로 移住해 曾祖父 李行里, 祖父 李椿, 父親 李子春까지 元나라
地方官吏를 지냈으며, 元이 衰退하자 李子春이 高麗에 歸化했다. 恭愍王 5년(1356) 父親과 함께
柳仁雨가 雙城摠管府를 공격할 때 功을 세우고, 후에 父親의 벼슬을 이어받아 金吾衛上將軍·
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 禿魯江萬戶 朴儀의 叛亂을 討伐, 紅巾賊의 침입으로 함락된
首都 奪還戰에 戰功을 세워 東北面兵馬使로 승진했다. 元 나하추[納哈出]의 咸鏡道 侵入을 격파,
1364년 崔濡가 德興君을 추대하고 恭愍王을 폐하려 하자 崔瑩과 함께 達川江에서 大破하고,
女眞族의 三善·三介의 咸鏡道 침입을 격퇴하여 出征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해 武人으로서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恭愍王 21년(1372) 和寧府尹이 되고, 倭寇가 開京을 위협할 때 이를 격퇴했다.
1380년 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雲峰에서 倭寇를 소탕하고, 1383년 李之蘭과 함께
咸鏡道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吉州에서 대파했으며, 1384년 東北面都元帥·
門下贊成事가 되고 이듬해 함경도 咸州에 침입한 倭寇를 격파했다.
(*愍: 근심할 민 *禿: 대머리 독 *魯: 노나라 로 *濡: 적실 유)
高麗 禑王 14년(1388) 守門下侍中에 올라 崔瑩과 함께 權臣 林堅味·廉興邦을 處刑, 이때 明나라의
鐵嶺衛 설치문제로 遼東征伐을 반대했으나 거절되어 右軍都統使로 北進하다가 威化島에서 回軍,
崔瑩을 제거하고 禑王을 폐하고, 昌王을 세웠으며, 자신은 守侍中으로 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다. 다음해 鄭道傳 등과 함께 昌王을 폐위하고 恭讓王을 세웠다.
恭讓王 3년(1391) 三軍都摠制使로서 趙浚 등과 함께 田制改革을 단행했으며, 舊臣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고, 그의 一派인 新進勢力은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恭讓王 4년(1392)
鄭夢周를 제거, 그 해 7월 스스로 새 王朝의 太祖가 되었다. (*禑: 복 우 *瑩: 밝을 영 *摠: 밝을 영)
1393년 國號를 朝鮮으로 정하고 太祖 3년(1394) 도읍을 漢陽으로 옮겼다.
1398년 제1차 王子의 亂이 일어나자 芳果(定宗)에게 禪位해 上王이 되고, 1400년 芳遠이 즉위하자
太上王이 되었다. 1402년 王子들이 권력다툼을 빚은 心惱로 東北面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와 佛家에 歸依하여 餘生을 보냈다. 事大主義·排佛崇儒·農本主義를 建國理念으로 삼아
朝鮮 500년의 根本政策이 되고, 官制整備, 兵制와 田制의 再調整 등 初期國家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廟號는 太祖, 능은 健元陵이다.
太祖는 太宗 8년(1408) 5월 昌德宮 廣延樓 別殿에서 昇遐했으며, 領議政 河崙 등이 山陵址를
物色하다가 6월 현 위치로 결정하고, 7월 5일 忠淸·黃海·江原道에서 軍丁 약 6,000명을
徵發·役事하여, 9월 7일 太宗이 百官을 거느리고 殯殿에 나가 遣奠禮를 행하고 發靷했다.
(*崙: 산 이름 륜 *殯: 빈소 빈)
健元陵 사진
(05) 健元陵 禁川과 禁川橋
(06) 太祖 健元陵 홍살문
*太祖 健元陵 -사적 제193호 -陵 形式: 單陵 -造成: 太宗 8년(1408)
健元陵은 朝鮮 第1代 太祖의 陵으로, 朝鮮王陵 制度의 標本이며, 高麗 恭愍王의 玄陵 樣式을
따르고 있으나, 高麗王陵에는 없던 曲墻을 封墳周圍에 두르는 등 石物의 造形과 配置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封墳에는 다른 王陵처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는데, <仁祖實錄>에
太祖의 遺敎에 따라 억새를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一說에는 太祖가 故鄕 咸興에 묻히기를
희망했으나 대신 거향의 억새풀을 덮었다고도 한다. (*墻: 담 장)
陵寢을 둘러싸고 있는 12面의 화강암 屛風石에는 十二支神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欄干石을 두르고, 난간석 밖에는 石虎와 石羊을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했는데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守護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封墳 앞 魂遊石이 밑에는 도깨비를 새긴 북 모양의
鼓石 5개가 놓여 있고, 양 옆에는 望柱石이 한 柱씩 서있다.
中階에는 長明燈과 石馬 한 필씩 딸린 文石人있고, 下階에는 武石人과 石馬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健元陵에만 유일하게 正中石이 있다. 陵 아래는 丁字閣(보물 제1741호), 碑閣, 守僕房,
수라간, 홍살문, 板位 등이 배치되고, 碑閣에는 太宗 때 세운 神道碑(보물 제1803호)와
大韓帝國 宣布 후 太祖高皇帝로 追尊된 陵標石이 있다.
太祖는 太宗 8년(1408) 5월 24일 昌德宮 廣延樓 別殿에서 昇遐했으며, 領議政 河崙 등이
山陵址를 物色하다가 6월 28일 현 위치로 결정하고, 9월 7일 太宗이 百官을 거느리고 殯殿에
나가 遣奠禮를 행하고 發靷했다.
(07) 健元陵 守僕房-丁字閣-碑閣
(08) 健元陵 守僕房
陵을 지키는 守僕이 지내는 곳으로 丁字閣 동쪽에 건립했다. (*僕: 종 복)
(09) 健元陵 參道
홍살문에서 丁字閣까지 폭 3m정도의 돌을 깔아놓은 길로, 왼쪽의 조금 높은 길은 神이
다니는 神道, 오른쪽 조금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御道이다.
(10) 九里 東九陵 健元陵 丁字閣 -보물 제1741호
朝鮮 太祖 高皇帝의 健元陵 丁字閣으로, 祭享을 지내는 건물이다. 정면 3칸·측면 2칸인
正殿에 2칸의 拜位廳을 결합한 ‘丁’字形 건물로, 太祖가 昇遐한 太宗 8년(1408)에 건립했으며,
英祖 40년(1764) 修理했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丁字閣의 典型的인 形態이며, 기둥 위의
翼工形式은 18세기의 手法을 보여주고 있어 英祖 때 重修 당시의 時代的 特徵을 잘 반영하고
있다. <國朝五禮序例>의 [壇廟圖說] 중 山陵에 대해서 ‘丁字閣은 陵室 남쪽에 위치해,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한다. 모두 3칸으로 동쪽과 서쪽에 계단이 있고, 神座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한다.’ 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과 비교해 볼 때 健元陵 丁字閣은 건립당시의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朝鮮 太祖의 健元陵 丁字閣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朝鮮의 陵寢制度 중 丁字閣의 표준으로 歷史的, 藝術的, 學術的 價値가 큰 건물이다.
(11) 丁字閣으로 오르는 階段
東入西出의 原則으로 동쪽에서 丁字閣에 오르는 계단으로, 동쪽 계단의 좌측은 神階,
우측은 御階이며, 서쪽에는 내려가는 西階가 있고, 封墳쪽으로 神階가 있다.
(12) 丁字閣 祭需陳設圖
(13) 丁字閣 안에서 보이는 陵寢
(14) 建元陵 无坎(예감)
예감은 祭享 後 祝文을 태우고 祝版을 묻는 구덩이로, ‘望燎位’, ‘燒臺’라고도 한다.
(*坎: 구덩이 감)
(15) 健元陵 碑閣
(16) 太祖 健元陵碑
碑文은 [大韓 太祖高皇帝健元陵]이라고 篆書體로 刻字했다.
大韓帝國 宣布 후 太祖高皇帝로 追尊된 陵標石이다.
(17) 九里 太祖 健元陵 神道碑 -보물 제1803호
太祖 李成桂의 生涯, 建國過程, 業績 등을 기리기 위해 一代記를 새긴 비석으로,
太宗 9년(1409)에 세웠으며, 碑身, 龜趺, 螭首가 잘 보존되어 있어 朝鮮初期
神道碑硏究에 중요한 자료이다. 碑文은 權近이 짓고, 陰記는 卞季良이 지었으며,
篆額은 鄭矩가 쓰고, 글씨는 成石璘이 썼다.
(*龜: 거북 귀 *趺: 책상다리할 부 *螭: 교룡 이 *篆: 전자 전)
健元陵의 神道碑는, 朝鮮建國 後 高麗時代 石碑造形을 脫皮하고 明나라의 石碑 傳統을
받아들여 세운 새로운 形式의 神道碑이다. 비록 碑座部分이 새로 제작되었으나,
조선시대 石碑의 基準作이 되며, 碑身에 새긴 글씨와 내용은 歷史·文化史·書藝史의
硏究資料로 귀중한 文化財이다.
(18) 山神石
보통 예감과 마주하는 위치에 설치한 것으로 葬禮 후 3년간 后土神(땅을 管掌하는 神)에게
祭祀지내는 곳이다. 健元陵에만 유일하게 正中石이 있다. (*掌: 손바닥 장)
(19) 健元陵 封墳
封墳에는 다른 王陵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심었는데 故鄕을 그리워하던 父王을
위해 太宗이 李成桂의 故鄕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었다는 逸話가 전한다.
(20) 東九陵 歷史文化館
문화재청에서는 UNESCO 世界文化遺産인 朝鮮王陵의 理解를 돕기 위해 각 王陵에
歷史文化館 建立의 一環으로 東九陵 歷史文化館도 2011년에 건립했다.
동구릉에 관한 歷史와 造成方法, 傳統祭禮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역사문화관 展示室[동구릉 개요, 동구릉 이야기, 王陵 年表, 造成, 山陵祭禮, 發靷 班次 등]과
안내 데스크가 있다. (*靷: 가슴걸이 인)
*班次: 官職의 높음과 낮음이나 序列에 따라 늘어서는 것.
齊陵 -太祖 妃 神懿王后의 單陵 -北韓 開豊郡 所在
-北韓 保存級 文化財 제556호 -黃海北道 開豊郡 上道面 扶蘇山 남쪽기슭
太祖 李成桂의 正妃 神懿王后의 무덤으로, 太祖 7년(1407) 工曹判書 朴子靑의 監督으로
무덤을 확대하여 王妃陵의 규모를 갖추었다. 開城 扶蘇山 남쪽기슭에 있으며,
高麗 恭愍王陵(恭愍王의 玄陵과 王妃 魯國公主의 正陵, 북한 국보급문화재 제123호)을 模倣한
朝鮮初期의 무덤으로, 石造物의 造形美가 뛰어나며 墓域은 3단으로 구성되었다.
맨 윗단의 封墳에는 十二支神像을 새긴 屛風石을 설치하고, 주위에 欄干石을 둘렀으며,
東·西·北 3면에 曲墻을 쌓고 그 안에 石羊과 石虎를 배치했는데 현재 曲墻은 흔적만 남아 있고,
石羊도 2개만 남았다. 무덤 앞에는 魂遊石과 望柱石 1쌍이 있다. (*懿: 아름다울 의)
中間段에는 6角의 長明燈 左右에 文人石과 石馬를 한 쌍씩, 아랫단에는 武人石과 石馬를
한 쌍씩 마주 세웠다. 묘역 앞쪽에 丁字閣과 碑閣이 있으며, 碑閣에는 神懿王后의 行蹟과
追贈된 諡號를 밝힌 齊陵碑(북한 보존급문화재 1624호)가 있다.
*神懿王后(1337~1391) -本貫; 安邊 -姓氏; 韓氏
李成桂의 첫째 夫人인 神懿王后 韓氏는 高麗 東北地方에서 密直司副使 贈領門下府事였던
安川府院君 韓卿과 어머니 平山 申氏 사이에서 安邊에서 남쪽 조금 떨어진 風流山(靑鶴山)이
있던 지역에서 1337년에 출생했다. 韓氏가 15세때 당시 신분이 비슷한 17세의 李成桂와
嘉禮를 올리고 咸興 雲田里에 살았으며 이때 芳雨, 芳果(定宗), 芳毅, 芳幹, 芳遠(太宗), 芳衍과
慶愼, 慶善의 6男 2女를 낳았다.
李成桂가 政界의 一人者로 浮上하기 전까지 고향에서 집안의 大小事를 도맡아 처리하는 등
內助가 컸다. 高麗 禑王 14년(1388) 威化島回軍 때에는 朝廷에서 李成桂의 가족을 체포한다는
전갈을 듣고 숲 속으로 避身해 한동안 老宿하기도 했다.
이런 渦中에 韓氏는 胃腸病이 악화되어 朝鮮開國 1년 전인 1391년 55세에 他界했다.
韓氏는 처음에 開城 남쪽 海豊郡 治粟村에 묻혔으며, 1392년 7월 朝鮮開國 다음날 節妃로
追尊되고 陵號를 齊陵이라 칭했다. 이후 開豊郡 上道面 楓川里에 奉陵했다.
1398년 韓氏 蘇生 2남 定宗(芳果)이 神懿太王后로 追尊하고, 太宗 8년(1408) 太宗이
承仁順聖 神懿王太로 諡號를 높였으나 1683년 肅宗 9년(1683) 神懿王后로 格下되었다.
大韓帝國 宣布 후인 光武 3년(1899 神懿高皇后로 追尊되었다. (*懿: 아름다울 의 *楓: 단풍 풍)
서울 貞陵 -神德王后 康氏의 陵 -사적 제208호 -單陵
서울 城北區 貞陵洞에 있는 太祖의 繼妃 神德王后 康氏의 陵으로, 원래는 서울 中區 貞洞에
있었으나 太宗 9년(1409) 현재위치로 遷葬했다. 太祖 5년(1396) 神德王后 康氏가 他界하자
太祖는 聚賢坊(現 中區 貞洞 英國大使館 위치)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造成했다.
그러나 太宗이 卽位하고 太祖가 昇遐하면서 貞陵의 陵域 100步까지 建築을 허락하고, 貞陵이
都城 안에 있다는 이유로 沙乙閑山(京畿道 高陽郡 崇仁面 기슭, 現 城北區 貞陵洞)으로 遷葬하고
丁字閣을 철거했다. 太宗 10년(1410) 土橋인 淸溪川 廣通橋가 洪水에 流失되자 능의 石物 중
屛風石과 欄干石을 비만 오면 유실되는 土橋 廣通橋를 石橋로 가설하는데 사용했으며, 그 밖에
木材나 石材들은 太平館을 짓는 데 쓰게 했다. 民間墓나 다름없었던 貞陵은 260여 년이 지난 顯宗 10년(1669) 王陵의 象設을 갖추게 되었다. 貞陵은 屛風石과 欄干石을 세우지 않고, 虎石과
羊石이 각 1쌍으로 줄어들고, 武人石을 세우지 않아 다른 王后의 陵에 비하여 貧弱하나
朝鮮王朝 최초의 王妃陵이다. 貞陵의 四角長明燈이 高麗 恭愍王의 玄陵과 魯國公主의 正陵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朝鮮王陵은 高麗王陵을 規範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貞陵의 願刹은 貞洞에 있을 때는 興天寺(1794년 敦岩洞으로 옮겨 重創), 貞陵洞으로 遷葬되고
王后의 陵으로 復原된 후(顯宗 10년)에는 奉國寺가 원찰이 되었다.
*神德王后(1356?~1396) -本貫; 谷山
象山府院君 康允成과 晉山府夫人 姜氏의 딸로 黃海道 谷山에서 태어났다.
康氏 家門은 高麗의 權門勢家로 李成桂의 權力形成과 朝鮮建國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李成桂는 紅巾賊 討伐, 元의 侵入大破, 倭寇討伐 등 戰功을 세우고 首都 開城에 진출했으나
地方土豪의 한계를 느끼고, 開城 權門勢族 背景이 필요했던 李成桂는 康氏 門中의 勢力伸張에
도움이 될 康允成에 의해 康氏와 政略的인 婚姻을 했다. 康氏 집안은 高麗의 權門勢家로서
李成桂의 權力形成과 朝鮮建國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太祖는 鄕妻(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京妻(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高麗의 風習에 따라
神德王后는 太祖의 京妻가 되어 2男(撫安大君 芳蕃, 宜安大君 芳碩) 1녀(慶順公主)를 낳았다.
1392년 朝鮮이 建國되면서 태조의 鄕妻 韓氏가 이미 他界해 康氏가 조선 최초로 王妃로
책봉되었다. 太祖 때 자신의 둘째 아들 宜安大君(芳碩)을 王世子로 책봉하는 등 支持基盤을
닦았으나 이는 후에 ‘王子의 亂’의 씨앗이 되었다. 太祖 5년(1396) 他界했으며,
光武 3년(1899) 神德高皇后로 追尊되었다. (*撫: 어루만질 무 *宜: 마땅 의 *碩: 클 석)
太祖가 康氏를 만나던 당시의 유명한 逸話가 전하는데,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太祖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물 길러 나온 處女가 있어 물 한 바가지를 청했다. 버들잎을 띄워 건네 주
는 물을 후후 불며 천천히 마신 뒤 緣由를 물으니 “급히 물 마시다 탈이 나실까 염려돼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 처녀가 바로 繼妃가 神德王后 康氏이다.
‘급하게 마시다가 배탈이 날까 봐 물에 버들잎을 띄웠던’ 聰明한 康氏가 王妃가 되어 權力과
子息에 대한 過慾이 두 아들과 사위의 목숨을 잃고 딸은 比丘尼가 되게 하고, 자신도 死後에
恥辱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서울 貞陵 사진
(01) 서울 貞陵 禁川橋
(02) 홍살문
(03) 參道, 神道-御道
(04) 丁字閣
(05) 丁字閣 東階, 神道-御道
丁字閣을 동쪽에서 올라가는 神階와 소맷돌이 없는 御階
(06) 丁字閣의 祭需 陳設 (模型)
(07) 丁字閣 西階
‘東入西出’로 동쪽에서 올라가 서쪽으로 내려가는 西階로 神(魂靈)은 丁字閣에서 바로
陵寢으로 올라감으로 西階에는 神階는 없다.
(08) 守僕房. 貞陵을 관리하고 祭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지내던 곳.
(09) 貞陵 碑閣
(10) 貞陵碑
앞면에는 [大韓 神德高皇后 貞陵]이라고 篆書體로 刻字하고, 뒷면에는
王妃의 一代記 銘文이 있다.
(11) 莎草地, 위에 陵寢이 보인다.
(12) 貞陵 陵寢, 石物 중에 武人石이 없다.
(13) 貞陵 長明燈
太祖의 관심이 커 下臺石과 間柱石의 彫刻이 섬세하다. 朝鮮初期의 四角形
長明燈은 이후 八角形으로, 肅宗의 明陵부터 다시 四角形으로 변형되었다.
高麗 恭愍王陵(玄陵)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朝鮮時代 陵域에서 가장 오래된
石物이며, 藝術的 價値도 높다.
(14) 魂遊石
받침돌인 鼓石은 원래 5개였으나 移葬할 때 2개만 설치했다. (*鼓: 북 고)
(15) 魂遊石의 받침돌인 북모양의 鼓石
(16) 貞陵 陵寢(封墳)
屛風石과 欄干石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遷葬하고 나서 淸溪川 廣通橋를 架設할 때 사용했다.
(17) 望柱石
機能은 무덤의 位置標示, 陰陽의 調和, 王陵의 生氣保存 등 여러 說이 있다.
(18) 文人石과 石馬
(19) 石羊
石羊은 惡鬼를, 石虎는 猛獸로부터 陵을 보호하는 石物이다.
(20) 貞陵 曲墻. 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三面으로 두른 담장이다.
(21) 陵寢에서 莎草地를 지나 내려다 본 丁字閣 일대
淸溪川 廣通橋(廣橋)에 사용한 貞陵의 石物
(22) 廣橋의 欄干石. 貞陵 欄干石의 石柱를 사용했다.
(23) 廣橋 橋臺에 사용한 十二支神像을 새긴 貞陵의 屛風石
(24) 廣橋 橋臺에 거꾸로 설치한 貞陵의 屛風石, 十二支神像이 거꾸로 섰다.
일부로 거꾸로 설치한 것인지 공사하는 인부들이 무관심하게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保存狀態는 좋은 편이다.
(25) 廣橋 橋臺에 사용한 정릉 병풍석; 隅石의 鈴鐸(왼쪽)과 鈴杵(오른쪽)
*鈴鐸: 방울 (*鈴: 종 령 *鐸: 요령 탁)
*鈴杵: 공이 (*杵: 절구 공이 저)
*隅石: 건물의 모서리에 쌓는 돌
*鈴鐸: 작은 종에 쇠 추(錘)를 매달은 기구로, 殿閣의 처마끝이나 塔의 지붕돌에 매달아
바람에 흔들려 맑은 소리가 나게 함.
(26) 廣橋 橋臺에 사용한 정릉 병풍석 隅石의 鈴杵[공이]
제2대 定宗의 厚陵 -定宗과 定安王后陵 -雙陵
-위치: 黃海 開城直割市 板門郡 嶺井里
厚陵은 조선 2代 定宗과 定安王后 金氏의 雙陵으로 陵寢 앞에서 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定宗,
오른쪽(동쪽)이 定安王后의 陵이다. 陵寢은 屛風石과 欄干石을 둘렀으며, 陵 앞에 각각
魂遊石 1座씩 배치했다. 文·武石人은 각 2쌍씩, 石馬, 石羊, 石虎는 각각 4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太宗의 獻陵과 같은 형식으로, 高麗 恭愍王과 魯國公主의 玄·正陵의 제도를 繼承한 것이다.
丁字閣은 터만 남아 있고, 表石은 碑閣없이 세웠으며, 홍살문과 守僕房 등은 燒失되었다.
太宗 12년(1412) 定安王后 金氏가 王大妃의 身分으로 他界하자, 海豐郡 白馬山 동쪽언덕에
陵을 조성했으며, 世宗 1년(1419) 定宗이 老上王의 신분으로 他界하자 世宗 2년(1429)
定安王后의 陵 옆에 安葬했다.
*定宗(1357~1419) -諱: 芳果 -在位: 1398.09(음력)~1400.11
李成桂와 元妻 韓氏의 次男으로 高麗 恭愍王 6년(1357) 咸興 歸州洞에서 태어났다.
父親 李成桂를 도와 倭寇를 征伐한 功으로 軍簿判書, 上護軍 등을 歷任했다.
1392년 朝鮮이 建國되어 永安君에 책봉되고 義興親軍衛 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398년에 제1차 王子의 亂(戊寅靖社)으로 王世子로 책봉된 후 太祖의 讓位로 王位에 오른 후
首都를 開城으로 다시 遷都하고, 王族, 權臣 등의 私兵을 폐지해 三軍府에 編入시켰다.
集賢殿을 설치하고, 漢陽의 五部에 각각 學堂을 설립했다.
1400년 제2차 王子의 亂(朴苞의 亂)으로 동생 靖安君(芳遠)을 王世子로 책봉한 후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上王이 되어 仁德宮에서 생활했으며, 1418년 世宗이 王位에 오르자 老上王(太上王)이
되었다. 世宗 1년(1421) 仁德宮 正寢에서 63세로 昇遐했다. 昇遐 後 廟號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올리지 않고 明나라에서 내린 恭靖王이라는 諡號로 부르다가 肅宗 7년(1681)
廟號를 定宗으로 올렸다.
*定安王后 金氏(1355~1412) -本貫; 慶州
月城府院君 金天瑞와 潭陽 李氏의 딸로 太祖 7년(1398) 남편 永安君(芳果)이 世子가 되면서
世子嬪이 되어 德嬪에 冊封되었다가 永安君이 定宗으로 즉위해 德妃로 進封되었다.
野史에서는 定安王后가 잠자리에서 정종에게 李芳遠에게 王位를 이양할 것을 권했다고 전한다.
定宗 2년(1400) 定宗이 世弟 芳遠에게 讓位하자 順德王太妃의 尊號를 받았다. 슬하에 子女는
없으며, 1412년 58세를 일기로 他界했다. 肅宗 7년(1681) 溫明莊懿의 尊號가 追上되었으며,
陵은 豊德(開城 開豊郡)의 厚陵이다.
-(03) 제3대 太宗과 元敬王后의 獻陵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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