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 니코스 카잔스키(1883-1957)
초판 발행 ; 1946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이다. 1946년에 처음 출간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 이윤기가 번역하여 출간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야생마같이 거칠면서도 신비한 인물 알렉시스 조르바로, 그의 도움을 통해 책 밖에 모르는 펜대잡이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젊은 그리스 지식인이 작품의 서술자로서 조르바라는 인물을 관찰하고 그의 면모를 전달한다.
이 소설은 1964년 그리스에서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1968년에는 뮤지컬로도 나왔다.
대략의 줄거리는 화자인 '나'는 아테네의 피레아스에서 친구와 헤어져 크레타로 가는 배에 오른다. (화자는 책에 파묻혀 살다가 책을 버리고 여행을 떠난다.) 그는 크레타로 행해 출발한다. 이때 조르바는 '나'에게 무조건 자기를 데려가달라고 말한다. 그렇게해서 크레타에서 조르바와 '나'는 갈탄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헌데, 조르바는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늙수그레하지만 야성미 넘치는 외모 그대로 그야말로 미친놈(...)이다.
그가 단테의 신곡에 막 몰두하려는 때 누군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느낀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의 60대의 남자가 유리문 너머로 그를 보고 있다. 남자는 다짜고짜 들어와서는 그에게 다가와 자신을 함께 데려가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생각지도 못할 수프를 만들 줄 아는 요리사이자, 꽤 괜찮은 광부이며, ‘산투르’에 일가견이 있다고 소개하는 그 남자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알렉시스 조르바이다. 화자는 그의 도발적인 말투와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그를 갈탄광의 채굴 감독으로 고용한다. 그렇게 그들의 인연은 시작된다.
소설은 조르바 옹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아니 그냥 조르바의 인생이야기라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인생이 돌직구인 그가 들려주는 수많은 무용담에 따르면 젊은 시절에 조르바 옹은 산투르(그리스어로는 산두리)에 꽂혀가지곤 젊은 시절에 결혼하려고 꼬불쳐둔 돈을 몽땅 털어다가 산두리를 사서 터키인 사부에게 무작정 달려가서는 산두리를 배운뒤 이리저리 떠도는 삶을 시작한다.
그러다 조국 그리스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산적패에 가담해서는 불가리아인, 터키인들과의 전투에서 남자, 여자, 어린이, 신부 등등 가리지않고 목을 따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가하면 지금까지 그와 함께 잔 여자들의 음모를 모아 배게속에 넣어두는 그만의 고상한 취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의 민폐섞인 인생한탄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조르바의 이야기는 그의 평생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그의 자유의지를 담는다.
갈탄광산을 개발하면서 조르바는 마을에 사는 늙은 여자와 놀아난다. 젊은 시절엔 여러 외국 선장들과 이래저래 염문도 뿌리던 오르탕스라는 여자인데 조르바는 그녀를 나의 부불리나(그리스 독립전쟁 당시의 여걸인 라스카리나 부불리나)라고 부르며 마음을 녹이면서도 다른 여자와 사귀다가 주인공의 장난 때문에 오해한 오르탕스로 인해 결국 그녀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조르바의 행동은 그야말로 파격을 달리면서도 거침이 없었고 주인공 '나'는 그의 행동에서 초인의 의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 20세기 판 산쵸 판사와 팔슈타프를 하나의 인물로 응축시켜 놓은 인물이 알렉시스 조르바이다. 조르바는 현대문학이 창조해낸 가장 원기왕성한 보통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삶에 대한 조르바의 정열(과거에 광산 노동자의 십장이었다는 그의 고백)에 대한 화답으로 갈탄 광산 노동자의 감독을 맡아 달라는 초청장이 도착한다. 조르바는 위험과 좋은 감정을 공평하게 유발하고, 화자로 하여금 삶에 대한 자신의 학문적, 정통적인 접근에 의문을 품는다.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조르바의 놀라운 자연스러움과 젊은 화자가 적용하는, 보다 합리적이고 절제된 고대 그리스식 사고 방식 사이의 철학적 논쟁이다.
이 작품은 1957년에 한 표 차로 까뮈에게 노벨상을 놓쳤다.
(인용문)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반쯤은 무아지경으로 도취된 듯, 반쯤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인간의 창조에 관한 엄청난 이야기를 엮어 나가기 시작했다.
“자, 잘 들어요, 두목. 어느 날 아침, 하느님은 기분이 울적해 가지고 일어났어요. 그러고는 중얼거리지요. ‘나도 참 한심한 하느님이야! 내겐 향불을 피워 줄 놈 하나, 심심풀이로나마 내 이름을 불러 줄 놈 하나 없으니! 늙은 부엉이처럼 혼자 사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 퉤!’ 이 양반은 손바닥에다 침을 탁 뱉고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안경을 찾아 쓴 다음, 흙 한 덩어리를 집어 침을 퉤퉤 뱉어 이기고 개어 조그만 사내 하나를 만들고 이걸 벽에다 말렸어요. 이레 뒤에 하느님은 이걸 볕에서 거두어들였지요. 잘 말랐더랍니다. 하느님은 이걸 들여다보다 말고 그만 배를 쥐고 웃기 시작했지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랬답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의 솜씨. 이건 꼭 뒷다리로 선 돼지 꼴이잖아! 내가 만들려던 건 이런 게 아닌데. 다른 걸 만들 때는 실수 같은 걸 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은 이 물건의 목덜미를 잡아 번쩍 들어올리면서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면서 소리쳤지요. ‘꺼져, 썩 꺼져 버려!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조그만 돼지 새끼를 잔뜩 까는 것이야. 이 땅은 네 것이다. 뛰어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구보……!’
하지만, 두목도 아시겠지만 그건 돼지가 아니었어요. 펠트 모자를 턱하니 쓰고 웃옷은 어깨에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줄을 잔뜩 세운 바지 차림에 빨간 술이 달린 터키 슬리퍼를 신고 있었어요. 그리고 허리띠에는 ‘내 너를 잡겠노라’이런 글귀가 새겨진 뾰족한 단검(이걸 준 것은 틀림없이 악마일 거예요)까지 차고 있었지요.
그게 사내였어요. 하느님이 사내에게 키스하라고 손을 척 내밀자 사내는 수염을 배배 꼬면서 이렇게 말했지요.‘이봐요, 영감, 비켜 줘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
몹시 시장했던지 우리 이야기는 먹는 것을 맴돌았다.
“무슨 음식을 특히 좋아하십니까, 영감님?”
“아무거나 다 좋아하지요.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고 하는 건 큰 죄악입지요.”
“왜요? 골라서 먹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안 되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안 됩니까?”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내 마음은 일찍이 그런 품위와 연민의 높이에 이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잔스키(1883-1957)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동 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지형적 특성과 터키 지배하의 기독교인 박해 겪으며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 민족주의 성향의 글을 썼으며, 나중에는 베르그송과 니체를 접하면서 한계에 도전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소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시적인 문체의 난해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1]
1883년 오스만 제국 치하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할리스 카잔차키스는 곡물과 포도주 중개상으로 중산층에 속했다. 그는 크리티 섬에서 중등 교육을 마치고 1902년 아테네 대학교에서는 법학을 공부했으며, 재학 도중 수필 《병든 시대》와 소설 《뱀과 백합》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희곡도 쓰기도 했다. 1907년에는 파리로 유학했으며 베르그송과 니체 철학을 공부했다.
1911년 그리스로 돌아와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결혼했으며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베니젤로스 총리 비서실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1917년 고향 크리티 섬에 돌아와 후에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알렉시스 조르바의 모델이 된 요르고스 조르바와 함께 갈탄 채굴 및 벌목 사업을 했었으며, 이것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발전하였다. 1919년 베니젤로스 총리에 의해 공공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차대전 평화 협상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베니젤로스의 자유당이 선거에 패배하여 장관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갔으며 그 후 유럽을 여행했다.
<공산주의에 경도하다.>
빈에 체재하는 도중 1922년 그리스 터키 간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전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 성향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동경으로 러시아 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1925년, 1928년에는 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해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루사코프 사건이 발생한 이후 소비에트 체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변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내전[편집]
1926년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이혼했으며 이후 프랑스어와 그리스어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1940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이 그리스를 침공하자, 일시적으로 민족주의 쪽으로 돌아서기도 했으며 1944년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때 12월 사태로 알려진 내전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이후 정치로 다시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리스 사회당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소풀리스 연립정부의 정무 장관으로 임명된다. 1946년 정무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해, 그리스 작가 협회는 카잔차키스와 앙겔로스 시겔리아노스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 동반자였던 엘레니 사미우와 결혼했다.
1953년 소설 《미할리스 대장》이 발간되자 그리스 정교회는 맹렬히 카잔차키스를 비난했으며 이듬해 로마 가톨릭 교회도 《최후의 유혹》을 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이후 카잔차키스의 소설은 그리스에서 일시적으로 출간되지 않기도 했다. 카잔차키스는 교부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의 말을 인용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 자신의 입장을 옹호했다. 1955년에는 그리스 왕실의 도움으로 《최후의 유혹》이 그리스에서 발간되었다.
1956년에는 국제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7년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여행했으며 일본을 경유해 돌아오는 도중 백혈병 증세를 보여 급히 독일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때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와 만나기도 했다. 고비를 넘겼으나 독감에 걸려 10월 26일 독일에서 사망했다.
<문학세계>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베르그송과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탐구,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대다수의 작품에서 줄거리 전개보다는 사상의 흐름을 강조했으며, 1951년과 1956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대표작으로는 후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최후의 유혹》과 《그리스인 조르바》,《오디세이아》(시)가 있다. 이중 소설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으로부터 신성모독을 이유로 파문당할 만큼 당시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니코스 카찬차키스는 교회로부터 반기독교도로 매도되는 탄압을 받았어도, 평생 자유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극작으로 1946년에 <카포디스토리아스>, 1959년에는 <배교자(背敎者) 율리우스>, 1962년에는 <메리사>가 각기 상연되었다.
첫댓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니 영화 장면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