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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가 사임하면서 대권을 잡은 사람은 보리스 옐친이었습니다. 이미 그 전부터 보리스 옐친은 실권을 다 잡은 상황이었고, 그 당시 이미 연방에서 탈퇴해버린 발트3국과 그루지아, 몰도바, 아르메니아를 제외하고, 러시아를 포함한 구 소련 소속 9개 공화국의 지도자들과 CIS
즉, 독립국가연합을 결성하기로 약속을 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소련 연방을 탈퇴해 버렸던 것입니다.
너무 상황정리를 오래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이 정도까지만 해 놓고 바로 지금 하는 얘기로 들어갑니다.
독립을 했을 당시 우크라이나에 어마어마한 양의 핵무기가 있었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지만, 당시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머리가 지끈지끈한 상황이었습니다. 소련이 해체된 것이 1992년 12월 26일의 일인데, 딱 열흘이 지난 1월 6일부터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앞편에서 보여드린 지도를 내놓습니다. 여기 보면 우크라이나의 남쪽에 크림반도가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크림반도는 주로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 지역입니다. 물론 러시아어를 사용하지만, 이들은 우크라이나인입니다. 하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는 친러적인 경향이 큰 지역입니다.
이 반도에 있는 가장 큰 도시가 바로 세바스토플입니다. 1차대전 얘기만 나오면 늘 등장하는 바로 그 세바스토플입니다. 이곳과 우크라이나 전역을 합쳐, 당시 소련의 강력한 함대인 흑해함대가 있었고, 연방군 병력만 130만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병력은 언제나 중동지역에 투입할 수 있도록 무장상태도 좋았습니다.
1992년 1월 1일부터 우크라이나는 연방군 병사들에게 충성서약을 강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너희들은 이제 우크라이나 군인이니까 충성서약을 하라’ 라는 것입니다. 러시아로서는 두고 볼 수 없는 사태였습니다.
함대문제는 더 컸습니다. 당시 흑해함대는 45척의 전함과 28척의 잠수함 등 모두 3백척 이상의 함정을 보유한 막강한 해군력이었고, 그 모항이 바로 세바스토플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세바스토플이 우리 땅이니까 이 함대도 우리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나온 것입니다.
러시아로서는 급했습니다. 그래서 ‘연방군이 처음 창설될 때 러시아군 아니었냐’ 라고 하면서 ‘그러지 말고 우리 나눠먹자’ 로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사실 크림반도는 우리 러시아거야’ 라는 생각도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의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기서 ‘봐야 한다’ 라는 것은 그것이 꼭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뜻도 같이 포함합니다. 아무튼 그런데, 흐루시초프가 소련의 행정구역을 재조정하면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로 귀속시켰던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겠죠.
12월 27일에 연방이 해체되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우크라이나가 이렇게 얼굴을 싹 바꿔버린 것은 우크라이나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사실은 러시아가 흑해 함대의 주력은 최신예 핵항모를 발트함대로 소속시키면서 빼돌려 버렸던 것이 더 큰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우크라이나나 러시아나 다들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러시아라고 해서 핵항모를 그냥 줄 수는 없잖아요.
러시아가 이 당시에 내세운 논리가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옐친이 9개 공화국과 함께 CIS 를 창설해놓고 있었다’ 라고 했는데, 이미 그들은 민스크에서 협정을 맺었고, 그 내용에는 ‘핵무기는 CIS전략군사령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항모나 핵탑재가 가능한 전력은 모두 CIS 전략군사령부, 즉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는 ‘흑해함대는 유사시에만 핵을 탑재한다’ 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관리할 수 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그렇게 나서니까 그때부터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벨라루시 등등 조그만 나라들도 들썩거리기 시작했고, 거기에 한수 더 떠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곡물수출을 통제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그 별명이 ‘붉은 대륙의 빵바구니’ 였을 정도로 곡물이 풍부하고, 세계 최고의 비옥한 토양을 가진 곳입니다. 러시아와 완전히 척을 지면 우크라이나는 그냥 좀 덜 쓰면 되지만, 러시아는 굶어 죽은 것입니다. 누가 더 바쁜지는 불 보듯 훤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까지 갈 정도로 시끄러워졌을 때 나선 것이 미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잘 중재해서, 두 나라는 적당한 접점을 찾았습니다.
즉,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의 것이다. 단, 러시아군은 크림반도에 계속 주둔할 수 있다’ 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종류의 합의가 잘 지켜지는 경우를 과연 몇번이나 보셨습니까? 이제 합의가 깨지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사실은 여기까지 쓰고 다음 편으로 넘기려고 했는데,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조금만 더 씁니다.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어느 정도 봉합이 되었고, 큰 문제 없이 그저 그렇게 이어가나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크라이나의 행동이 러시아의 비위를 거스르기 시작합니다. 우크라이나는 이제 살아야 했습니다.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EU 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세력들은 동방으로 힘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총보다 더 무서운, 종교보다 더 무서운, 돈을 가지고 접근했던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이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던 중 2004년 유시첸코라는 사람이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 사람은 정말로 적극적으로 친서방정책을 취했습니다. 일단 살아야 했으니까요.
사실상 이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가 좋아질 가능성은 사라졌다고 봐야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국가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때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파이프를 잠궈 버렸습니다. 아래 지도는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가스 의존도로 2007년의 지도입니다. 핀란드, 슬로바키아, 불가리아는 100% 입니다. 이런 나라들은 러시아가 가스 끊어버리면 끝장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도 그 대상 중 하나인데, 러시아는 이 천연가스를 가지고 유럽을 조율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라는 사실은 유럽국가들도 잘 압니다. 특히 영국이 가장 방방 뜹니다. 지도를 보더라도 영국은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가 전체의 16%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아주 좋은 케이스가 생겨 버렸습니다. 그루지아가 NATO 에 가입할 것이라고 독일이 확인해 주면서 러시아 증시가 5%나 폭락해 버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한번 가스를 잠궈 버리면 러시아의 신용등급도 추락해 버리고, 외환보유액도 날아가 버리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NATO 에 붙으면 러시아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010년 우크라이나에 새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지금 얘기하는 일의 핵심인데, 야누코비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청소년 시절에 도둑질과 폭력으로 소년원에서 수감생활을 했고, 버스회사 전기공 등으로 일하다가 정치에 입문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야누코비치는 친러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별 문제 없이 잘 지냈습니다.
그러다, 2013년에 일이 터져 버렸습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이래서 중립적으로 글 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근본적 원인은 친러성향의 동부지역과 친서방성향의 서부시역 간의 내부갈등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돈 문제가 생겨 버린 것입니다.
2008년 전세계를 휩쓸었던 경제위기 때 우크라이나는 아주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되고, 2013년 말이 되자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기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외환이 없으면 빌려와야 하고, 빌려 주겠다는 곳도 있었습니다.
빌려주겠다는 곳은 먼저 EU가 있었고, 또한 러시아가 있었습니다. 이제 우크라이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닥친 것입니다.
당시 우크라이나가 살아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은 약 280억불 정도였던 것으로 계산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얘기를 잘 해야 하는데, 양쪽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하니까 팩트를 체크하고 말을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150억불이면 될거야. 걱정마. 내가 빌려줄게’ 라고 했고, EU 는 ‘일단 200억 급하게 줄게. 그리고 나머지도 곧 줄게’ 라고 한 것입니다. 게다가 러시아는 주겠다는 150억불을 그냥 cash 로 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부 현금, 일부 천연가스라고 제시했습니다. 반면 EU 는 당연히 cash 로 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EU 것이 좋죠?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EU 가 돈이 어디 있어서 빌려 주겠습니까? EU가 빌려주겠다는 돈은 거의 다 IMF 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한번 휩쓸고 지나갔던 IMF 의 이름이 여기서 또 나옵니다.
IMF 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조건을 걸었습니다. 즉, ‘강도 높은 개혁’ 을 선행조건으로 한 것입니다.
IMF 가 나쁜 놈이라구요? 그건 아니죠. 우크라이나는 이미 그 전에 4번이나 IMF 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았는데, 그걸 전혀 갚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 갚아서 그렇지 IMF 에서 돈 빌려서 갚은 나라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갚을 능력 있으면 돈을 빌리지 않았겠죠. 어차피 IMF 는 EU 에게 보증을 요구했고, EU 는 보증을 한다면 당연히 개혁요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 엄청난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연금개혁, 고용환경변화 등 우리나라에 대해서 했던 것들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천연가스의 소비자가격 시장가격화 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천연가스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해 와서 가공한 다음 소비자에게는 국제시장 가격보다 훨씬 싸게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가 착해서 그렇게 싸게 줬을까요? 그건 아니죠. 러시아군대가 우크라이나 땅 쓰고 있었잖아요.
아무튼 이 판에는 착한 놈도 없고 나쁜 놈도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 입장에서는 어느 쪽도 결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2013년 12월 야누코비치 정권은 EU 의 조건을 거절하고 러시아와 협정을 맺기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저라도 야누코비치를 욕했을 것입니다. 즉, 러시아 측 손을 들어주면서 정권의 안정성을 달성하는 대신, 국가의 경제발전을 포기한 행위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때 우크라이나는 이미 러시아에 빚이 많았습니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EU 쪽에 붙어 버리면 러시아는 ‘빚 갚아라’ 라고 하다가, 그 빚을 못 갚으면 ‘그럼 빚 갚을 때까지 너희들 땅 우리가 잠시 가지고 있을게’ 라고 할 가능성이 거의 100% 였습니다.
나치 독일이 체코의 주데텐란트를 점령했던 일 아시죠? 아래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인데, 여기 보이는 아줌마가 우는 것은 달리 우는 것이 아닙니다. 드디어 독일군이 와서 너무 좋아서 우는 것입니다. 주데텐은 거의 독일어 쓰는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었거든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에 들어오면 그 사람들은 당연히 저런 모습 보였을 것입니다.
일단 여기까지 쓰고, 다음 편으로 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