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 바오로의 등장
사도 성 바오로
중국 금(金)나라의 동해원(董解元)이 지은 「서상」(西廂)에 이런 구절이 있다. “참으로 이른바 좋은 시기는 얻기 어렵고, 좋은 일을 이루려면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眞所謂佳期難得, 好事多磨)
그렇다. 성난 파도가 훌륭한 뱃사람을 만든다. 잔잔한 바다만 경험해서는 절대로 1급 항해사가 될 수 없다. 쇠망치와 불의 단련을 받고 나서야 명검(名劍)이 탄생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그렇게 굳은 땅에 물이 괸다. 마찬가지로, ‘고난’(수난)이 승화될 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도약’(부활) 또한 가능하다. 이것이 ‘고통의 신비’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교회에 그 고통의 신비가 찾아온다.
출발은 환희의 신비였다. 예수 그 이후, 초기 교회는 급속히 성장한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7) 하지만 좋은 일은 많이 일어나도 문제다. 교회는 급격히 늘어난 신자 때문에 고민이었다. 처음에는 사도들이 직접 관리를 맡았지만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협조자(부제) 7명을 뽑았다. 그들의 이름은 스테파노,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니콜라오스다.(사도6,5 참조) 여기서 우리는 스테파노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바로 최초의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스테파노를 주보 성인으로 모신 오스트리아 빈 슈테판 대성당
스테파노는 열정적으로 교회 일에 임했다. 그런 그를 유대 사회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고통의 신비’가 시작된다. 스테파노가 최고 의회에 끌려왔다. 고발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대 사회를 붕괴시키려 한 죄.’ 하지만 스테파노는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사처럼 보이는 얼굴(사도 6,15)로 대사제 및 유대교 원로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사도 7,51)
“여러분은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사도 7,53)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모욕으로 들렸다. 변호사에게 ‘당신은 법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수학 교사에게 수학을 모른다고 하고, 육군 장성에게 소총 사용법을 모른다고 하면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분노한 유대인들은 달려들어 스테파노를 포박했다. 그리고 성 밖으로 끌고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피가 튀었다. 이때 스테파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기도였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평판이 좋고 지혜와 믿음, 성령이 충만했던 스테파노(사도 6,3-5 참조)는 그렇게 잠들었다.
사도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요한의 형제였던 대 야고보 사도의 머리가 잘렸다.(42년) 끝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교회를 이끌던, 초대 기둥 중 하나(갈라 2,9)였던 알패오의 아들(마태 10,3) 소 야고보 사도도 모세의 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돌에 맞아 죽었다.(62년) 베드로 사도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한 것(사도12,6-19 참조)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밖에도 예수 그 이후, 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와 차별, 고립을 겪었던 정황은 성경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사도 17,5;24,5 참조)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1베드 4,14-16)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신앙인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기반이었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와해 된다. 그럼에도 성령에 충만했던 사도들과 신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라는 약속을 믿고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을 코웃음 치며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 여기서 그가 성경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사울(훗날의 바오로 사도)이었다. 바리사이파이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그는 스테파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글 _ 편집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