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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6연대 반란사건'은 세 차례에 걸쳐 군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사상자의 대부분은 군인들이었고 대구시민사회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거의 없었다. 제1차 반란 사건은 1948년 11월 2일 6연대 내의 좌익혐의자인 곽종진 특무상사가 자신을 연행하러온 헌병대의 조장필 소위를 권총으로 사살하면서 시작되었다. 조 소위가 쓰러지자 곽 상사와 한통속이던 이정택 상사가 '궐기'를 선동했고, 이에 동조하지 않은 하사관 10여명을 사살하면서 확대되었다. 이들은 진압하러온 헌병장교와 사병 등 6명을 사살하고, 칠곡군 동명지서를 습격한 뒤 팔공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제2차 반란 사건은 1948년 12월 6일 '여순반군' 진압작전 후 복귀하던 6연대 소속 병력 가운데 좌익성향인 이상백 상사를 비롯한 28명의 하사관과 14명의 병사들이 숙군을 두려워해 장교 9명을 사살하고 팔공산으로 들어간 사건이다. 제3차 반란 사건은 1949년 1월 30일 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6연대 소속 제4중대내의 좌익사병 일부가 곽종진 상사 등의 지령을 받고, 백달현 소위와 하사관 1명을 사살한 뒤, 중대원들을 선동하다가 여의치 않자 탈주한 사건이다. 반란주동자들은 대부분 토벌되었고, '반란연대'가 된 6연대는 1949년 4월 22연대로 흡수, 해체되었다. [출처] 대구 제6연대내 반란사건|작성자 KoreaWar |
가장 사회주의가 활발했던 대구에 보수의 색채가 가장 짙은 곳이 된 이유는
대구 10.1사건과 6연대 반란사건이 진압되어지며 많은 좌익운동가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출처는 주위 사람들)
2차례의 인혁당사건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 http://blog.ohmynews.com/junnamu/29244
아무튼 조선의 모스크바 대구가 우파 정당 새누리당의 정치적 고향이 된 것은
근현대사의 아이러니 이다.
http://www.parkbongpal.com/bbs/board.php?bo_table=B02&wr_id=1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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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네..ㅋㅋ 처음 알았다.
오늘날 가장 보수색이 짙은 TK가 해방 전엔 조선 사회주의-좌파의 거점이었다는군.
상전벽해라는 말이 생각남.
첫댓글 이...이런.. 빨갱이들의 본거지가 여기였구만.
그럼 시발 땅크로 밀어버려야제.,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