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구가 사는 골짜기는 입구 쪽이 절벽 아랫길이다
가게에서 막걸리 한 병 사가지고 들어가던 친구 앞으로 멧돼지가 떨어졌다 두세 걸음 앞서 나갔다면 명줄을 놓칠 수도 있었다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주워 챙기며 바라보니 멧돼지가 머리를 들고 꾸울꿀 애원을 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고기가 아닌가?
놈은 앞발만 겨우 세우는 지경이었다 어찌 산속에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비가 온 뒤라고는 하지만 멀쩡했을 때도 절벽 아래로 떨어진 놈이다
어서 죽여 달라구?
돌을 들고 가 서너 번 내려치면서 친구는 하늘로부터 상을 받을만한 일을 언제 했는가를 생각했다 좀체 떠오르질 않았다 먹고 나서 생각해보자 잘한 일이 없다면 하면 되지 않겠는가
2
우리는 쓸개즙을 탄 소주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시는 것으로 작업을 마치고 둘러앉았다
막 처녀티가 나는 암퇘지라 그런지 잡내가 나진 않았지만 단단한 육질이 내 허술한 이를 힘들게 했다 피를 머금은 간과 염통과 콩팥도 썰어 구웠다 똥을 빼내고 뒤집어 물로 씻어내고 밀가루를 묻혀 세 번, 왕소금을 뿌려 두 번 더 치대어 헹궈낸 덕인지 창자도 철판에 자글자글 익히니 소주와 짝이 맞았다
얘가 부처여, 자기 몸을 내놓아 우리가 거하게 먹고 마시도록 해주니
그렇긴 그려, 남을 즐겁게 해주는 게 쉬운 일인감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흩어져 사는 친구 다섯이 모여 깊어가는 밤을 술잔에 따르는데
우지직 우지지직, 계곡의 물소리를 죽이며 보이지 않는 소리가 다가온다
아이구, 윗집 옥수수는 오늘로 다 먹었구만
소리가 보통이 아닌데, 바위만 한 놈이 분명해
어둠을 깨뜨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술잔을 비우고 고기를 씹었다 고기가 수북이 담겼던 바가지도 얼추 비어가고 있었다 우지직 우지지직, 옥수수밭을 뭉개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아무도 멧돼지를 쫓으려하지 않았다
3
앞발로 옥수수를 감싸 안듯이 하면서 밭두둑을 타고 쭉 앞으로 가는 거야 가슴 밑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옥수숫대가 넘어져 배에 눌리며 쭈욱 눕는 거지 그렇게 해놓고 새끼들을 불러 먹인다구
엄니가 나를 살펴준 거보다 더 살뜰히 보살피더라구 한번은 총을 쐈는데 엉덩이가 맞은 거야 뒷다리를 쓸 수 없으니 앞다리만으로 몸을 질질 끌고 가더라구 그러면서도 새끼들을 둘러보며 끽 소리도 내지 않더라니까 양옆이 벼랑으로 이뤄진 길에서 만난 적도 있는데 차를 들이받으며 비키질 않는 거야 밀어버릴 마음으로 살펴보니 새끼들이 있더라구
녀석들이 얼마나 영리하냐면, 저번에 죽은 사람 알지? 왜 개 두 마리와 함께 씹혀 죽었다는 사람 있잖아 그 사람 이 멧돼지를 추격하고 있었거든, 쫓기던 놈들이 계산을 한 거야 자기들이 숫자가 많거든, 몸을 돌려 공격을 한 거지
사냥꾼 친구의 이야기를 흘려듣는 동안에도 윗집 옥수수밭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어둠이 두텁게 내려앉아 비탈밭과 하늘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았다
_[하늘에서 멧돼지가 떨어졌다], 시와 에세이,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