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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풀꽃·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 나 태주 시 ‘풀꽃 1.2.3’
아직도 남아있는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
아직도 만나야 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여 주소서
아멘이라고 말할 때
네 얼굴이 떠올랐다
퍼뜩 놀라 그만 나는
눈을 뜨고 말았다.
- 나 태주 시 ‘화살기도‘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 2015)
멀리서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좋아
가끔 목소리
듣기만 해도 좋아
그치만 아이야
너무 가까이
오려고 애쓰지 말아라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고
하늘까지 높은 날
봄날이라도 눈물
글썽이는 저녁 무렵
나는 여기 잠시
너 보다가 날 저물면
돌아갈 사람이란다.
- 나 태주 시 ‘제비꽃 연정 1‘
[제30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인 시선집], 문학사상, 2020.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것
힘들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것
외로울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것
- 나 태주 시 ‘행복 ’
펜과 종이와 돋보기
쓰다가
읽다가
졸다가
말이 없다가
창 너머 먼 산 바라보며
너를 기다리다가.
- 나 태주 시 ‘ 말년 ’
[나비꽃 연정],문학사상, 2020.
세상이 많이
헐거워졌다
쓸쓸해지고
많이 늙었다
거리가 훨씬 느슨해지고
잡초가 무성해졌다
바람이 더 많은 하늘을 차지하고
구름이 많아졌다
가까운 사람 멀어지고
먼 사람은 더욱 멀어진 날들
잘 있겠지 그래 잘 있을 거야
만나서 밥이라도 한번
나누면 좋으련만
허!
어머니도 그 나라에서
편히 계시겠지요?
- 나 태주 시 ‘ 포스트 코로나 1‘
[제비꽃 연정], 문학사상, 2020.
한밤중에
까닭없이
잠이 깨었다
우연히 방안의
화분에 눈길이 갔다
바짝 말라있는 화분
어,너였구나
네가 목말라 나를
깨웠구나.
- 나 태주 시 ‘ 한밤중에 ‘
너는 지금쯤 어느 골목
어느 낯선 지붕 밑에 서서 울고 있느냐
세상은 또다시 6월이 와서
감꽃이 피고 쥐똥나무 흰꽃이 일어
벌을 꼬이는데
감나무 새 잎새에 6월 비단햇빛이 흐르고
길섶의 양달개비
파란 혼불꽃은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나는데
너는 지금쯤 어느 하늘
어느 강물을 혼자 건너가며 울고 있느냐
내가 조금만 더 잘해주었던들
너는 그리 쉬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가진 것을 조금만 더 나누어 주었던들
너는 내 곁에서 더 오래 숨쉬고 있었을 텐데
온다간다 말도 없이 떠나간 아이야
울면서 울면서 쑥굴헝의 고개 고개를
넘어만 가고 있는 쬐꼬만 이 6월 기집애야
돌아오려무나 돌아오려무나
감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
쥐똥나무 흰꽃이 다 지기 전에
돌아오려무나
돌아와 양달개비 파란 혼불꽃 옆에서
우리도 양달개비 파란 꽃 되어
두 손을 마주 잡자꾸나
다시는 나뉘어지지 말자꾸나
- 나 태주 시 ‘ 6월 기집애‘
교회 앞 비좁은 길에
높다라히 서 있던 나무
한 그루 메타세쿼이아
처음 교회를 지은 목사님이 심은 나무
40년도 넘은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님 그 나무
싹둑 잘라버렸다
이유는 교회 건물이 안 보이고
교회 십자가를 가린다는 것
어찌 젊은 목사님
그 나무가 바로 교회이고
해마다 키를 더하는 또 다른
십자가인 걸 몰랐을까.
- 나 태주 시 ’ 아깝다 ‘
[한들한들], 밥북 , 2015.
그대 만약 스스로
조그만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풀밭에 나아가 풀꽃을 만나 보시라
그대 만약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라 여겨진다면
풀꽃과 눈을 포개 보시라
풀꽃이 그대를 향해 웃어줄 것이다
조금씩 풀꽃의 웃음과
풀꽃의 생각이 그대 것으로 바뀔 것이다.
그대 부디 지금, 인생한테
휴가를 얻어 들판에서 풀꽃과
즐겁게 놀고 있는 중이라 생각해 보시라
그대의 인생도 천천히
아름다운 인생 향기로운 인생으로
바뀌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 나 태주 시 ‘ 풀꽃과 놀다‘
홀로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바닷가 파도 소리
곁에 있든지
산골 나무 아래 있든지
내가 기쁜 생각을 하면
지구가 금세 발갛게
등불 하나 켜들고 마주 나오고
우주도 발그레
웃음 지으며 손을 내민다
언제든 내가
세계의 중심이고
우주의 가슴이라는 생각
비록 작지만 말이다
이것은 참 좋은 생각이다
- 나 태주 시 ‘ 작은 생각‘
잘 퍼진 쌀밥이 고봉으로 열렸다
이팝나무 가지, 가지 위
구수한 조밥이 대접으로 담겼다
조팝나무 가지, 가지 위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그쟈?
누나가 말했다
우리는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아직 못 먹었잖아!
한참 만에 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 새들은 저렇게 울어쌓고
지랄하고 그런다냐? 그것은
꾀꼬리 쌍으로 우는 환한 대낮이었다.
- 나 태주 시 ’환한 대낯‘
전화 걸면 날마다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누구와 있냐고 또 별일 없냐고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 나 태주 시 ‘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1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 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명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쪽빛 나래 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들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다 죽는다.
2
세상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퇴근 버스를 놓친 날 아예
다음 차 기다리는 일을 포기해버리고
길바닥에 나를 놓아버리기로 한다
누가 나를 주워가 줄 것인가?
만약 주워가 준다면 얼마나 내가
나의 길을 줄였을 때
주위가 줄 것인가?
- 나 태주 시 ‘ 사는 일 ‘
[슬픔에 손목 잡혀], 시와시학사, 2000.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고 싶다.
- 나 태주 시 ‘ 천천히 가는 시계‘
우리가 과연
만나기나 했던 것일까
나무에게 말을 걸어본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가진 것을 모두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보일 듯 말 듯
나무가 몸을 비튼다.
- 나 태주 시 ‘ 나무에게 말을 걸다‘
[나무가 말하였네], 마음산책, 2011.
1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모를 것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邊方의 둘레를 돌면서
내가 얼마나 너를 생각하고 있는가를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까마득 짐작도 못할 것이다
겨울 저수지의 外廓길을 돌면서
맑은 물낯에 산을 한 채 비쳐보고
겨울 흰구름 몇 송이 띄워보고
볼우물 곱게 웃음 웃는 너의 얼굴 또한
그 물낯에 비쳐보기도 하다가
이내 싱거워 돌멩이 하나 던져 깨뜨리고 마는
슬픈 나의 장난을.
2
솔바람 소리는 그늘조차 푸른빛이다
솔바람 소리의 그늘에 들면 옷깃에도
푸른 옥빛 물감이 들 것만 같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조차 그만
포로소롬 옥빛 물감이 들고 만다면
어쩌겠느냐 어쩌겠느냐
솔바람 소리 속에는
자수정빛 네 눈물 비린내 스며 있다
솔바람 소리 속에는
비릿한 네 속살 내음새 묻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 마음조차 그만
눈물 비린내에 스미고 만다면
어쩌겠느냐 어쩌겠느냐
3
나는 지금도 네게로 가고 있다.
마른 갈꽃내음 한아름 가슴에 안고
살얼음에 버려진 골목길 저만큼
네모난 창문의 방안에 숨어서
나를 기다리는
빨강치마는 흰버선 속의 따스한 너의 맨발을 찾아서
네 열개 발가락의 잘 다듬어진 발톱들 속으로
지금도 나는 네게로 가고 있다.
마른 갈꽃송이 꺽어 한아름 가슴에 안고
처마 밑에 정갈히 내건 한 초롱
네 처녀의 등불을 찾아서
네 이쁜 배꼽의 한 접시 목마름 속으로
기뻐서 지줄대는 네 실핏줄의 노래들 속으로.
- 나 태주 시 ‘ 배회 ‘
(나태주 시화집 - 너도 그렇다 / 종려나무, 2009)
살아서 숨쉬는 사람인
것만으로도 좋아요
아믄, 아믄요
그냥 계신 것만으로도 참 좋아요
그러엄, 그러믄요
오늘은 전화를 다 주셨군요
배꽃 필 때 배꽃 보러
멀리 한번 길 떠나겠습니다.
- 나 태주 시 ‘ 꽃 피는 전화 ‘
* (너도 그렇다) 종려나무 2009
주머니를 뒤지고
지갑을 뒤져도
돈이 나와 주지 않는다
그래도 딸아인 기대에 찬 얼굴이다
(아빠는 언제나 힘에 세고 부자니까)
깜깜해진 아빠의 얼굴
아빠는 무너진 하늘이다
찢어진 우산이다
그래도 딸아인 여전히
아빠의 주머니 속을 믿는 눈치다
아직은 믿을만한 구석이 아빠에게
남아 있기는 남아 있나 보다
그래, 아무리 무너진 하늘
찢어진 우산일망정
없는 거보다
나을 테니까.
- 나 태주 시 ‘ 두얼굴 ‘
* [슬픔에 손목 잡혀] 시와 시학.
모처럼 맘에 드는 시 한 편 써지면
안방에 있는 아내 불러 만 원씩 원고료로 준다
지갑에 만 원밖에 없을 때도 그 만 원 빼서 준다
서울서 출판사나 잡지사 젊은 여기자나 편집자 찾아왔다가
돌아갈 때도 만 원씩 새 돈으로 골라서 준다
가다가 배고프거든 국수 사먹고 집에 들어가라고 만 원씩 준다
그냥 준다
- 나 태주 시 ‘ 그냥 준다 ‘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 나 태주 시 ‘ 안부 ‘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 아름 바다를 안은 기쁨이겠습니다.
- 나 태주 시 ‘선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 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 나 태주 시 ‘ 시 ’
1
빈 언덕 위에
키 큰 상수리나무 하나를 둘 것
그 아래 방 한 칸짜리
오두막집을 둘 것
그리고 하늘엔
노을 한 자락도 걸어 둘 것.
2
흙내 나는
오두막집 방 안으로 돌아가고 싶다
따스한 아랫목의
잠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외할머니
옆에 계시고
밤이 깊어도
잠들지 못하고 속살거리는
상수리나무 마른잎
무엇보다 먼저
내 몸이 작아지고 싶다
- 나 태주 시 ‘ 꿈 ‘
사람들 많이 만나고
집에 돌아온 밤이면
언제고 한가지쯤
언짢은 일 있게 마련이다
사알짝, 마음에 긁힌 자죽
다른 사람들 내게 준
조그만 표정이며
석연찮은 한두 가지 말들
가시되어 걸려있을 때 있다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더 언짢아질 때 더러 있다
- 나 태주 시 ‘ 외출에서 돌아와‘
활짝 핀 꽃나무 아래서
우리는 만나서 웃었다
눈이 꽃잎이었고
이마가 꽃잎이었고
입술이 꽃잎이었다
우리는 술을 마셨다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고
그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와 사진을 빼보니
꽃잎만 찍혀 있었다.
- 나 태주 시 ‘ 꽃잎 ’
그대 떠난 자리에 혼자 남아
그대를 지킨다
그대의 자취
그대의 숨결
그대의 추억
그대가 남긴 산을 지키고
그대가 없는 들을 지키고
그대가 바라보던 강에 하늘에
흰구름을 지킨다
그러면서 혼자서 변해간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대도 모르게 조금씩.
- 나 태주 시 ‘ 그대 떠난 자리에‘
때 절은 종이창문 흐릿한 달빛 한줌이었다가
바람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바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
기약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소리였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레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며든 봉숭아 빠알간 물감이었다가
잘려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 나 태주 시 ‘지상에서의 며칠 ‘
<현대시학>2006.3월호
강물은 흐른다
그대 생각하는 내 마음도 흐른다
나무는 춥다
그대 생각하는 내 마음도 춥다
날 어둡자
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반짝이는 게 어디 별뿐이랴
그대 생각하는 내 마음도 반짝인다
마을의 불빛은 애닯다
애닯은게 어디 마을의 불빛뿐이랴
그대 지키는 내 마음의 등불도 애닯다.
- 나 태주 시 ‘ 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 . 12‘
[그대 지키는 등불 / 고려원],1987
1
한잔을 마시면 순한 아기가 되어
잠들고 싶고요
두잔을 마시면 고운 새가 되어
노래하고 싶고요
세잔을 마시면 버림받은 아이가 되어
울고 싶어요.
2
한잔을 마실 때 그대는
돌아온 옛애인이 되고
두잔을 마실 때 그대는
금강산의 선녀가 되고
세잔을 마실 때 그대는
길거리의 헤픈 웃음의 여인이 됩니다.
- 나 태주 시 ‘ 술 ’
[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고려원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뚝
떨어지는 어여쁜
슬픔의 입술을 본다
그것도
비 오는 이른 아침
마디마디 또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 나 태주 시 ‘ 상사화 ’
* 계간<시와시학.2004.여름호>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 나 태주 시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들이 군대에 가고
대학생이 된 딸아이마저
서울로 가게 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자고 했다
아는 사진관을 찾아가서
두 아이는 앉히고 아내도
그 옆자리에 앉히고 나는 뒤에 서서
가족사진이란 걸 찍었다
미장원에 다녀오고 무쓰도 발라보고
웃는 표정을 짓는다고 지어보았지만
그만 찡그린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떫은 땡감을 씹은 듯
껄쩍지근한 아내의 얼굴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나의 얼굴
그것은 결혼 25년만에
우리가 만든 첫 번째 세상이었다.
- 나 태주 시 ‘가족사진’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 하며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希望的인 일이겠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 나태주 시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일지사/1984
챙이 넓은 여름모자를 하나
사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빛깔이 새하얀 걸로 하나
사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오동꽃은 피었다 지고
개구리 울음소리 땅 속으로 다 자즈러들고
그대 만나지도 못한 채
또다시 여름은 와서
나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소
집을 지키며 앓고 있소.
- 나태주 시 ‘쓸쓸한 여름‘
* (추억의 묶음)미래사. 1991
외롭다고 생각할 때일수록
혼자이기를,
말하고 싶은 말이 많은 때일수록
말을 삼가기를,
울고 싶은 생각이 깊을수록
울음을 안으로 곱게 삭이기를,
꿈꾸고 꿈꾸노니-
많은 사람들로부터 빠져나와
키 큰 미루나무옆에 서보고
혼자 고개숙여 산길을
걷게 하소서.
- 나 태주 시 ‘외롭다고 생각할 때일수록‘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 나 태주 시 ‘ 사랑하는 마음내게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
있다 가고 싶었는데
아는 듯 모르는 듯
잊혀지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대 가슴에 못을 치고
나의 가슴에 흉터를 남기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나의 고집과 옹졸
나의 고뇌와 슬픔
나의 고독과 독선
그것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과연 좋은 것이던가
사는 듯 마는 듯 살다 가고 싶었는데
웃는 듯 마는 듯 웃다 가고 싶었는데
그대 가슴에 자국을 남기고
나의 가슴에 후회를 남기고
모난 돌처럼 모난 돌처럼
혼자서 쓸쓸히.
- 나태주 시 ‘ 어쩌다 이렇게‘
엊저녁에 거친 비바람에
우리 집 두어 평짜리 꽃밭이 그만
망가져 버렸습니다
봄부터 딸아이가 정성스레
심어 가꾼 봉숭아며 분꽃 몇 그루
하도 아까운 마음이 들어
다가가 보니 꽃나무들은
아주 망가져 버린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꾀를 부려 비바람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약한 줄기와 뿌리를 드러내고 옆으로 누임으로
살아 남을 궁리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옆으로 누운 꽃나무들을 일으켜 세우며
저는 알았습니다
연약함도 때로는
크나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대 생각하는 나의 여린 마음또한
크나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 나태주 시 ‘ 연약함도 때로는 힘입니다‘
말을 아껴야지, 눈물을 아껴야지
참고 참으면 사람의 말에서도 향내가 나고
아끼고 아끼면 사람의 눈물도 포도알이 될 것이다
혼자 속삭이는 말,
돌아서서 지우는 눈물.
- 나 태주 시 ‘가난’
** 나 태주: 시인, 1945년 3월 16일, 충남 서천군
만 79세, 데뷔,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대숲 아래서' 등단.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1963.공주사범학교 졸업.
2020.09.제31회 김달진문학상 시부문
2014.09.제26회 정지용문학상
2009.제41회 한국시인협회상
황조근정훈장
충청남도문화상
1979.제3회 흙의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