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이런 거밖에 못 하겠어' 라고 말하자 침묵이 다가
온다 햇빛을 머금은 침묵이 파스타를 끌고 와 식탁을 짧
은 편지처럼 바라보게 한다 연결되는 굶주림에서 일어나
온몸을 적시는 목소리들이 파고든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사뿐히 포진한 하루 이틀 사이 알 수 없는 음악이 흘러나
오며 인간이 소외되는 구도 속 검은 거울 검은 빛 어두운
만남 이것뿐 우린 이 정도에서 멈춰야겠어
산문의 평행이 우리를 가로지른다 우리 속에 아무런
혼동이 없다 모든 게 다 지루하지? 다행이야 결심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두렵지도 않은 일이지
수만 잔의 마티니를 마시고 기억을 음절로 토막 내는
거잖아
따분한 염세의 걸음으로 조명이 거의 다 꺼져 있는 재
활원의 복도를 걷는 게
위압적인 위로를 끌어안게 하진 않잖아
억지로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게 이렇게 기분 나쁜 일
일 줄이야 깊게 생각하지는 않을래 그래 어젠 새로운 나
의 환시가 도착했어
1층 로비에서 코코넛 주스를 마시며 너를 기다리고 있
을 땐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음속으로 코코넛 주스를 삼키고
있다고 생각해
영원을 목구멍에 부으며
목이 막히기를 기원하는 것 같다고
그게 우리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고
우린 고작 가로질러 가는 중이지만
가로질러 높게 낮게
낮게 높게
재능들과 리허설을 해 보며
언제나
집에 돌아오면 다시 침묵과 멀어진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들을 나의 환시는 함께 바라보지 않는다 거기 뭐가
있냐고, 대체 뭘 바라보고 있는 거냐고 말하지 않는다
소라 속에 환시를 가득 채워 넣고
껍질을 조심스럽게 망치질해 보고 싶다
깨진 가루들을 세차게 불어 바닥에 떨어뜨리고
공명의 모양대로 다시 굳어 버린 환시를 목에 걸고 다
녀 보고 싶다
그렇게 이 세상을 다 보여 줄 것이다
환시는 여러 번 이렇게 말한다 저녁을 먹으러 가지 않
을래?
제발 저녁을 함께 먹지 않을래?
혼자가 싫고 혼자가 관습이 되는 것도 싫어
그러면 나는 그와 저녁을 먹으러 간다
해가 지고 있는데 창밖의 탑에서 사람들이 번지점프를
준비하고 있다
3,2, 1 숫자를 세면
뛰어내리려다 멈추고
다시 숫자를 세면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뛰어내림을 한 번 창조해 보는 사람들처럼
모든 기억을 조물하고 박제해서
자판기 버튼을 누르는 듯한 단순함으로
삶을 한 번 떨어뜨려 보듯이
기회를 얻으려는 유언도
유언의 연재도 이제 그만
멈춰야겠어
나는 또 재활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동시에
통과하고 있었다 소실점을 눈앞에 두고 참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작 화장실의 빈 칸을 찾아다녔다 주스
를 마시고, 의사 선생님을 찾아, 내 앞의 암전을 끝내 주
세요 하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로 원한다면 끝내는 것은 쉬울 것이다
인사를 녹여 놓은 습기로, 보도블록으로, 화살처럼 꽂혀
가는 사교로
밤이라는 시간, 그러나 멈춰야겠어
나의 길을 따라가면 다시 나의 집이 나오고 우리는 눈
을 감고도 그곳까지 찾아갈 수 있다 문을 열고 침실 안
탁자에 시계를 벗어 두고 부엌에 앉아 딱딱하게 굳어 버
린 식빵을 따뜻한 우유 한 모금과 함께 먹으며 거실 소파
에 누워 바짓단을 접으면서 리모콘을 집었다가 그러다
나도 몰래 잠들 때까지 편안한 시간을 보내다가
잠시 잠에서 깼을 때 눈을 뜨지도 않고
다시 침실로 돌아가면
나의 환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디서부터 들을래?
어제 그곳에서부터 다시?
나는 그곳에 뭐가 있냐고 묻지도 못하는 잠결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있어서 편하다
잠결, 소녀들아, 소년들아
세상에, 그 많은 석탄을 끌고 몇 마일을 걸어온 거니?
이제 멈춰도 돼
노랠 들어도, 잠결로 시를 쓰는 대신에
영혼을 가득 채워서, 높고 낮게 날아도
뛰어내리자
- 펜 소스, 민음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