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면
굴 속에서 기어나와
노닐고,
매양,
너물국 한 보시기
싸래기밥 두어 술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다.
남루를 벗어
바위에 빨아 널고
발가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서
등솔기에 햇살을 쪼이다.
해 지면
굴 안으로 기어들어
쉬나니.
- 김 관식 시 ’옹손지(饔飱志)‘
* 옹손지(: 아침 옹, 1: 저녁밥 손, : 뜻 지)- 한마디로 옹손지는 아 침, 저녁의 끼니 이야기이다.
** 이 시 에는 무력감에 쌓인 시인의 자신에 대한 비에가 서려있다. 60 년대 후반에 이르면 김관식은 무력한 생활로 일상을 보낸다.
특히 이 시가 발표되었던 68년경에 이르면 무허가 집장사에 도 실패하여 생계의 수단을 잃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시인 은 시적주체에 자신을 투영시키고 있다. 아침밥과 저녁밥이 라는 단조로운 제목이 의미하듯 그에게는 삶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수천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에
한 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지막 타는 안스러이 부셔지는 저녁 햇살을......
얇은 나래야 바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지러이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젯밤 자고온 풀시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갓난애기의 새끼손가락보담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 세로 자질하며 가물가물 높이 또 돌아
다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 오르는 어리디어린 아그배 나무같이 물 오른 아희들이 윗도리를 벗고 서서 물 가운데 어떤 놈은 물속의 하늘만을 들여다보고 제가끔 골 똘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그늘진 개흙밭에 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연꽃이 그 큰 봉오리를 열었다.
- 김 관식 시 ‘ 연‘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십 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간, 심, 비, 폐, 신, …..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 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 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르거리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
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 에서 살고 안락 에서 죽 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김관식, 「병상록』
연노랑 송화 가루에 하얀 민들레 꽃, 슬쩍 흔들리고
보리수 꽃 피어, 하르르...르
햇살 아래
쑥쑥 자란 냉이 꽃 무리
너울너울
솔솔바람 또 불다가
머뭇거리고
눈물이 메마른 엄마는 눈만 깜빡. 깜..빡...
냉이 꽃, 사이로 바람 스치고
지난 일들이 가물거리고 옛일이 또 지워지고...
- 김 관식 시 ‘ 냉이꽃‘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고
당신의 그림자가 어릴울 때까지를 가슴 조여
안타까웁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그러면 저의 옆에 가까이 와주십시오.
만일이라도……만일이라도……
이승저승 어리중간 아니면 어데든지
당신이 계시지 않을 양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몸뚱어리는
암소 황소 쟁기결이 날카론 보습으로
갈아헤친 농이랑의 흙덩어리와 같습니다
따순 봄날 재양한 햇살 아래
눈 비비며 싹터 오르는 갈대순같이
그렇게 소생하는 힘을 주시옵소서
- 김 관식 시 ‘ 다시 광야에‘
<대전시 보문산 사정공원 중턱에 자리한 시비>1992.10.22.세워짐.
이제 天下는 어느 한 놈의 天下가 아니라 모름지기 天下의 天下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난 이같이 證言증언한다.)
天下의 利리를 뒤에 하는 者자, 너 또한 天下를 얻을 것이고
天下의 利에 앞서 하는 者, 너 또한 天下를 잃을 것이다.
옛날 東洋동양의 善선한 智慧지혜는
열 눈이 보고 열 손이 가리키니 무서웁다 했거니
신나무 잎 같은 너 하나의 가녈핀 손바닥을 가지고, 진실로 天下의 눈! 눈! 網子망자 뒤집혀 흰창만 남아 부릅뜬 눈! 憤怒분노의 새파란 火炎화염이 타는… 저, 數數千萬수수천만의 눈총들을 어찌 가리울 수 있겠는가.
松都송도 적 불가사리는 그래도
(하, 그렇지 불가사리는 不可殺불가살이지 遁甲藏身둔갑장신하여 절대로 죽이지 못했으니까.)
무쇠만을 골라서 먹었다나 보던데
오늘의 불가사리는 찌락배기 황소라 아가리가 넓죽하여 하 그리 먹성이 좋은가. 그저 닥치는 대로 無所不食무소불식!!?
바다를 팔아먹고 社稷公園사직공원 땅이고 뭐고 심지어는 漢江한강 白沙場백사장!!!
'모래알로 떡 해 놓고… 맛있게 냠냠.'
허나 어디 그뿐이던가.
우리 先祖선조로도 일찌기 두려운 몸부림에 발 들이지 못하던 오래인 聖域성역.
斧斤부근이 한 번도 닿은 일 없는 山꼭대기, 하늘 찌르는 아름드리 아람드리 거창한 나무. 伐木丁丁벌목정정 山更幽산경유가 아니라 鼓膜고막 찢는 듯 소름 끼치는 오비노꼬* 마루노꼬**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란한 소리…
보라 ! 文明문명이 虐殺학살한 저 鬱蒼울창한 숲 속 크낙한 나무들의 시커먼 屍身시신들을…
워낙 굴헝이 응성깊고*** 풀떨기가 짓어야 날짐승 길짐승도 깃들이는데… 불쌍한 새짐승들 索莫삭막한 겨울밤 어데서 샐까. 智異山지리산 가마귀 떼 보리밭 고랑으로 下野하야들 하시는가.
虐殺학살의 禍화가 드디어 禽獸금수에게 미친 것은 姑捨是고사시하고 저 玄玄현현한 穹隆궁륭 어디에 오롯이 솟은 寶座보좌 위에서의 神신의 夢寐몽매조차 설치어 不安불안했으리로다.
나 본시 귀머거리도 당달봉사도 아니언마는
獨裁者독재자! 獨載者치고 베개에 바로 누워 考終命고종명한 ****일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노라.
同胞동포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同胞여.
* 오비노꼬 : 띠톱기. 긴 톱의 두 끝을 맞붙여 두 개의 띠 바퀴에 걸어서 켜는 기계.
** 마루노꼬: 둥근톱. 강철판 둘레에 있는 톱니가 돌아가며나무를 자르거나 썬다.
*** 응성깊고 : 웅숭깊고.
**** 고종명(考終命) :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 김 관식 시 ‘이제 天下는‘
[김관식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아희야. 봄비가 오거들랑 그 어데 이웃에라도 가서 藤등나무 苗種묘종이나 한 포기 얻어다가 사립 앞에 심어라.
그리고 또 늬 親舊친구들이 더러 찾아오거든 뜰 안에 돋아나는 슬기로운 풀잎들이 하나도 다치잖게 멀찌암치 물러나 한길에 가 놀아라.
앞으로 여기 와서 여치와 베쨍이가 맑고 가는 목청으로 은실을 뽑아 가을비 멎은 뒤의 시냇물 같이 사느라운 노랫가락 나즉히 읊으리니.
花草화초밭에는 온가지의 꽃송이가 제각금 쏜살같이 흐르는 한줄기 별빛인 양 빛나는 눈웃음을 그윽히 먹음고 서로 잘 어울리어 아름다운 얘기를 향기로히 주고받아 한껏 즐거운 삶을 누리는 모양을 똑똑히 좀 익혀 보아 두어라.
우리들은 모름즉이 天生천생 麗質여질의 착한 性稟성품을 無恙무양하게 자라도록 김매고 고수런해 가꾸어 보자.
철따라 菜麻채마에선 아욱이나 명아주 푸새가 나고 山에는 삽주싹과 수리치도 있길래 풀뿌리를 캐 먹고 延命연명을 하더래도 錦心
繡腸금심수장을 지녀야 하느니라.
- 김 관식 시 ‘山林經濟산림경제‘
[김관식 시집],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南向남향 미닫이, 채양한 마루 끝에
귀여운 젖메기 무릎에 안고 앉아 조용히 엄마의 얼굴처럼 和色화색이 도는 慈愛자애로운 하늘 아래, 하잔한 微物미물들과 푸나무 떨기조차 은총에 젖어 祝福축복을 받는
오늘은 春分춘분! 낮과 밤이 같은 날.
나의 臨終임종은 子正자정에 오라!
가장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
너를 위해 즐겨 마중하고 있으며
비인 房방에 호올로 누워 千古천고의 秘密비밀을 그윽히 맛보노니…………
가여운 아내 아들 딸들아.
아이예, 불쌍한 울음을랑 들내지 말라.
그 동안 신세 끼친 旅宿여숙을 떠나
永遠영원한 本宅본택돌아가는 길이다.
벌판에 내던지면 소리개와 전갈蝎들 밥이 될 게고, 땅에 묻으면 개아미와 구데기의 즐거운 饗宴향연
., 어차피 활활 타는 불가마에 넣어 다<벌거숭이로 왔으니 벌거숭이로!>
佛陀불타여. 파피 빨아 먹고 산 공변된 공변된 業업이요 報보가 아니오니까.
白雲臺백운대 위에 세워 風葬풍장을 해도 싀원키야 하겠다만, 모초럼만에 戀人연인들을 데불고 하이킹 코오스를 밟아 나온 알피니스트 諸位제위께서 뜻하지 않이 당하는 일에 질겁들을 하실 테니…… , 어차피 활활 타는 불가마에 넣어 다비하는 게 또한 해롭지는 않을라.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난 여름 밤
별구 깔따구를 앞세우고 날아 와
스스로 불을 들어
懊惱오뇌의 나래 파다거려 사루는 불나비처럼, 깃은 찢기고 죽지만 남아
形骸형해 뿐의 白骨백골이지만 달라는 이 있거든 서슴없이 引導인도하라.
그리고 또 落葉낙엽이 구으는 가을 黃昏황혼에 빗물에 홈이 파진 외딴 山산골 길.
민첩한 나래미 손에서도 어느 새 빠져나와
가랑잎 사이 구르는 橡상수리 열매처럼
四苦사고의 허울 벗어버리고 모든 것 거기 두고 나 여기 간다.
잘 있어! 서러워 말아다고.
한참 자고 난
겨울 아침에
豫告예고도 없이 별안간 조촐 티조촐한 흰 옷을 입고
즐거운 눈발인 양 飄飄표표히 내 이승에 다시 날아올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
- 김 관식 ‘ 나의 臨終임종은‘
[詩와 佛敎의 만남 4],東國譯經院,1989.
窓창 밖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가을이던가
鹿車녹거에 家具가구를 싣고
가랑잎 솔솔 내리는
이끼 낀 숲길
영각 소릴 쩔렁쩔렁 울리며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도 없네
반겨 맞아 줄 고향도 집도.
순채나물
魚+盧魚膾농어회
江東강동으로나 갈거나
歐陽脩구양수
글을 읽는
이 가을밤에.
- 김 관식 시 ‘ 이 가을에’
[김관식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 김관식(숲제 1934. 5.10~1970.8.30) 시인, 번역문학가. 호는 추수, 만오,우 현,현현자,본관은 사천.
충남 논산군 연무읍 소룡리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 학하며 동양고전과 유학을 섭렵했다. 충청남도 논산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립 충남대학교 공 과대학 토목공학과와 사립 고려대 공대 건축공학과 를 거쳐 사립 동국대농대 농학과를 중퇴했다. 서울 상고에 교사로 재직하던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연〉(초), <계곡에서>, <자하 밖>을 내면서 문단 에 등단했다. 미당 서정주가 김관식을 추천했는데, 미당은 김관식의 동서. 이후 세계일보 논설위원 등 을 역임했다.
1960년 4.19 시민혁명 이후 치러진 국회의원선거 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 장면과 겨뤘으나 낙마한 뒤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다 병을 얻어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