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밍량 감독의 영화 <구멍> (1998)에 부쳐
거리에서 나는 구체관절인형처럼 우울하다. 거리
에서 나는 전염병 환자처럼 우울하다. 거리에서 나
는 바퀴벌레처럼 우울하다. 나는 벌레처럼 기어서 허
름한 나만의 아파트로 돌아온다. 문을 잠그는 것을
잊지 않는다.
푸른 비에 젖은 옷을 벗으면서 가스레인지 앞으로
간다. 재스민차가 끓는 소리를 듣는다. 따뜻한 소리
다. 따뜻하고 노란 소리가 집 안에 퍼진다. 라디오에
선 연일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다.
'정부는 쓰레기 수거를 중단했습니다.'
'부득이 정부는 단수 조치를 내렸습니다.'
'정부는 소개령疏開令을 내렸습니다.'
'독감 증세를 보이다가 벌레처럼 변해 죽는다
고...... .'
벽지가 눅눅해진다. 누수가 시작된다. 배관공은
비싸게 군다. 나는 캔맥주를 들이켠다. 형광등이 깜
빡인다. 맥주 거품의 밤이다. 배관공 녀석은 비싸
게 군다. 분노가 거품처럼 일어난다. 배관공에게
욕설을 퍼붓고 나는 문이 잠겼는지 확인한다.
텔레비전은 김치라면 조리법에 대해 설교한다.
어디선가 물통테가 터진다. 어디선가 지렁이들이
아스팔트를 뚫고 세상으로 나온다. 나는 대야를 머
리에 이고 변기에 앉는다. 나는 방구석에 쭈그려
앉아 컵라면을 먹는다. 참치 통조림도 딴다. 캔맥
주를 하나 더 들이켠다. 캔은 찌그러진다. 나는 약
간 풀이 죽는다. 현관은 잠겨 있다. 발바닥이 새카
매진 걸 발견한다.
이불에서 냄새가 난다. 침대는 젖었지만 나는
침대로 기어든다. 뇌수를 쪼는 빗소리를 견디며 나
는 뒤척인다. 콧물이 흐르고 기침이 나오지만 나는
참는다. 베란다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여렴풋이
등려군鄧麗君의 <하일군재래何日君再來>가 들려온다.
며칠째 같은 노래다. 옆집 여자는 뭐 하는 여자일까.
[안국동울음상점1.5], 걷는사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