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53호
혁명과 시
김종수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체 게바라는 전선에서 수많은 시를 필사했고**
군장에 넣고 다니며 전투 없는 날마다 읽었다
호치민은 중국 옥중에서 100편이 넘는 시를 썼고
민족해방 혁명 철학의 바탕이 됐다
레닌은, 마오쩌둥은, 무수한 혁명가들은 어떠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백만의 혁명군들이 도열해 있다
끝이 가물가물하다
만 번째 줄, 눈빛 형형한 그대
그대의 손수첩에는
눈물로 헤어진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는 사랑에 대해
혁명의 과정에서 야기되는 수많은 비극에 대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수많은 야사野史에 대해
핏빛으로
깨알처럼 쓰여지리라
서슬 퍼런 결기만을 선동하지 말라
도구화되었다 한들 연정戀情조차 없으랴
고즈넉한 그리움이 없으랴
혁명의 전장이라고 향기로운 풀꽃 아니 피랴
혁명의 궁극은 무엇이더냐
이념과 체제가 그 무엇이든 모두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더냐
자유 평등 평화 인간해방 아니더냐
한바탕 폭풍을 위해 풀꽃의 향기를 꺾는다면
아름답고 슬프고 서럽고도 고독한
시 한 줄의 낭만조차 허락할 수 없다면
그것이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정말 그것을 혁명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정녕 그것도 해방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별똥별 비처럼 쏟아지는 벌판에 선
만 번째 줄, 눈빛 형형한 그대
백만의 혁명군들이 도열해 있다
*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여자의 육체」(『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민음사, 2007) 부분.
** 체게바라는 볼리비아 혁명 중 체포되고, 1967년 10월 9일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 그의 군장 속에 있던 녹색 노트에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 17편 세사르 바예호의 시 18편 니콜라스 기엔의 시 25편 레온 펠리뻬의 시 9편 등 총 69편의 시가 필사되어 있었다.
***
양아치로, 해고 노동자로, 데모꾼으로 지금껏 살았으니 이제 시건달로 살겠다는 김종수 형을 응원하면서
김종수 형의 신작 시 한 편을 띄웁니다.
김종수 형을 왜 응원하느냐고요?
어느 날 그가 시집으로 묶을 수 있겠냐며, 한 보따리를 부려놓고 가는 거였습니다.
보따리를 풀자 늙은 엄니의 울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라는 대학 대신 양아치가 된 자식 때문에 십 년을 흘린 엄니의 울음이,
해고 노동자로 데모꾼이 된 자식 때문에 다시 삼십 년을 흘린 엄니의 울음이
대바지강처럼 흘러 넘쳤습니다.
그의 첫 시집 『엄니와 데모꾼』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젊음을 건달로 허비했고
반평생을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었는데
이제와 굳이 왜 시를 쓰려고 하느냐 묻자
“조까튼 세상 바꿔보려고 반평생을 데모꾼으로 살았다”고
그러니 이제 남은 반평생은 詩건달이 되어
“조까튼 세상을 꽃 같은 세상으로 한번 바꿔보려 한다”고 합니다.
“꼴릴 때 쓰고 꼴리는 대로 쓰고 꼴리도록 쓰다가 죽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유배한, 자청해서 “들꽃징역”을 살고 있는 그를
나는 낭만 가객이라 부릅니다.
그가 이제 진짜 건달바가 되고, 진짜 시건달이 되어
조까튼 세상과 제대로 한판 붙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를 응원하는 까닭입니다.
김종수 형이 이제 제대로 시건달이 될 모양입니다.
이제 진짜 혁명을 시작할 모양입니다.
"아름답고 슬프고 서럽고도 고독한"
시 한 줄의 낭만, 랑에 관한 미완과 무한의 혁명 말입니다.
눈빛 형형한 그를 두고 볼 일입니다.
2024. 9. 9.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